오너들 잇달아 이른 은퇴 선언...경영세습 탈피 새 바람 부나

[비즈]by 한국일보

이웅열 이어 서정진 “소유ㆍ경영 분리”… 김정주도 넥슨 매각 시사

경영승계 때 상속세 부담… “검찰 수사ㆍ갑질 논란 등도 작용” 관측도

오너들 잇달아 이른 은퇴 선언...경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내년 말 경영 은퇴 구상을 밝히고 있다. 셀트리온 제공

지난해 말 이웅열(63) 전 코오롱 회장이 전격 은퇴한 데 이어 서정진(62) 셀트리온 회장까지 내년 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 회장은 바이오산업 불모지인 한국에서 셀트리온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40대 중반인 2002년 셀트리온을 설립한 그가 회사를 이끈 기간은 20년이 채 안 된다. 경영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60대 초반의 은퇴 선언이어서 재계는 뜻 밖이라는 반응이다.


기업가치가 10조원에 이르는 게임업체 넥슨 매각을 검토한 창업주 김정주(50) NXC 대표의 고민도 업계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총수 자리를 지켰던 대기업 1, 2세대 경영인들과는 결이 다른 결정이다. 불과 최근까지도 기업 경영권 승계를 놓고 갈등하고 반목했던 오너 일가들이 적지 않았다. 연초부터 ‘경영권은 무엇인가’란 묵직한 화두가 재계에 던져졌다.

오너들 잇달아 이른 은퇴 선언...경

23년간 코오롱그룹을 이끈 이웅열 회장이 지난해 11월 28일 서울 마곡동 코오롱원앤온리타워에서 퇴임을 발표하고 있다. 코오롱 제공

기업의 ‘소유와 경영 분리’ 확산되나

‘때 이른 은퇴’의 공식적인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기업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은퇴 이후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아들에겐 이사회 의장을 맡겨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최대주주는 이사회 의장을 맡는 글로벌 기업들의 이사회 중심 경영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웅열 회장이 사임한 코오롱그룹은 지난 2일 이웅열ㆍ유석진 대표이사 체제에서 유석진 단독 대표이사 체제로 바뀌었다. 이 전 회장의 외아들 이규호 코오롱 전략기획담당 상무가 전무로 승진해 ‘코오롱이 4세 경영 시대 준비에 착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현재 코오롱을 이끄는 원톱은 유 사장이다. 이 전 회장은 “(아들에게) 사업 부문을 경영하게 한 건 기회를 준 것”이라며 “성과를 내면 모르겠지만 능력이 안 되는데 굳이 지분을 물려주고 경영권을 넘길 생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룹 소유와 경영을 분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전 회장은 “코오롱의 변화를 위해 앞장서 달려왔지만 한계를 느꼈다”고도 했다. 기업환경이 급변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용퇴하는 것이 그룹에 도움이 될 거라 본 것이다.


김정주 대표는 지난 4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일에 뛰어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데 뒷받침이 되는 여러 방안을 숙고 중”이라며 매각 추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문맥상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경영권에 집착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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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전 설립해 국내 최대 게임기업으로 키운 넥슨의 매각을 검토하는 김정주 NXC 대표. 넥슨 제공

천문학적인 상속세, 악화하는 기업환경

이들이 은퇴 명분으로 내세운 소유와 경영 분리, 새로운 도전은 부의 대물림이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청춘을 바쳐 평생 쌓은 ‘공든탑’을 포기하는 것에는 갈수록 악화하는 기업 환경 등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을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막대한 상속세 부담은 이 가운데 하나다. 최근 구광모 LG 회장 등 고 구본무 LG 회장의 자녀들은 상속 재산의 60%에 이르는 9,200억원의 상속세를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오너들은 많지 않다. 많은 대기업들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온간 편법을 동원해왔고, 아직까지 송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웅열 전 회장의 경우 지주회사 코오롱 지분 49.7%를 가졌지만 아들 이 전무는 지주회사 지분이 거의 없다. 지분 증여를 통해 경영권을 승계하기엔 상속세 부담이 큰 상황이다.


강화되는 대기업 규제와 수사의 칼날,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회장님’ 자리에 대한 부담감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분석이다. 이 전 회장이 은퇴를 선언한 직후 공교롭게도 검찰은 이동찬 명예회장이 보유했던 코오롱 주식 상속 과정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서정진 회장은 지난해 11월 대한항공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폭언 등 갑질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렀다. 또 계열사 셀트리온헬스케어의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돼 금융 당국이 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김정주 대표는 고교 동창인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넥슨 비상장 주식을 준 혐의로 2년여 간 검찰과 법원을 오가야 했다. 지난해 5월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김 대표는 지인들에게 “너무 지쳐 쉬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분석기관인 CEO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오너 경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어려워지는 경영환경 부담, 점차 경영권 세습이 힘들어지는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며 “편법 등으로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아예 회사를 팔거나, 지분 일부를 매각해 새로운 투자에 나서는 경향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변태섭 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2019.02.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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