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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초대합니다

by한국일보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박정선씨는 8년간 다니던 회사를 떠나며 약 300명의 동료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퇴사 이벤트'를 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보다는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떠나자는 취지다. 사진은 당시 박씨의 '퇴사 포스터'. 박정선씨 제공.

‘한 분 한 분 인사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대신, 카페에 커피 한 잔씩 맡겨두었으니 한 잔씩 드세요!’ 첫 직장을 그만두기 전날 퇴근길, 박정선(42)씨는 마지막 ‘한 턱’을 알리는 자신의 ‘퇴사 포스터’를 회사 엘리베이터에 붙였다. 8년 내내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고단한 일이 많았지만, 막상 오래 다닌 회사를 떠나려니 그 동안 쌓인 미운정 고운정이 다 생각나서 ‘퇴사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박씨는 떠나기 며칠 전 인사팀에 문의해 사내 전 직원의 명단을 받았다. 정규직뿐 아니라 파견직, 상근프리랜서부터 사내에 입주한 외부 관계사 직원들, 그리고 청소ㆍ경비업체 직원부터 구두닦이 아저씨까지. 그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모으니 약 300명이나 됐다. 그렇게 만든 고마운 이들의 명단을 사내 카페에 맡겼다. 박씨의 계획을 들은 사장님은 가장 저렴한 음료에 맞춰 커피값을 깎아주며 그를 격려했다.


이벤트에 대한 반응은 마지막 출근이 겸연쩍을 정도로 뜨거웠다. 얼굴만 알던 동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청소부 아주머니도 “아이고 오늘까지만 나오는 거여? 커피 잘 마실게요”라고 안부를 물었다. 모르는 전화번호로 온 격려문자도 수십 통. 그 때의 추억을 지난해 쓴 책 ‘희망퇴사’에 담아낸 박씨는 “회사에 다닐 때도 동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퇴사 당일 통보를 하는 게 아쉬웠다”며 “사내 커피값이 꽤 저렴해서 시작한 이벤트지만 사회생활에서 만난 인간관계를 짧고 단편적인 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떠날 때는 조용히? 파티하고 응원하는 새로운 퇴사문화

‘떠날 때는 말 없이.’ 퇴사는 ‘조직 부적응’이요, 이직은 ‘배신’이라 여기는 우리네 ‘가족적’ 직장문화가 빚어낸 흔한 퇴사 풍경이다. 사표를 낸 뒤에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주어진 프로젝트만 마친 채 조용히 퇴근하듯 떠나거나, 퇴사 전날까지도 함께 웃고 떠들다가 당일이 되어서야 동료에게 알리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퇴사 후 친했던 몇몇 동료들과 나누는 비공식적인 술자리가 ‘사회생활 잘 했다’는 증표였을 뿐이다. 기껏해야 회사 단체 카톡방에 “도비(집요정)는 자유에요”라며 ‘회사 노예’ 생활 청산을 알리는 짤방(짤림 방지의 줄임말로 편집을 하거나 전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찍어 표정 등이 매우 웃긴 사진 등을 통칭)을 올린 채 떠나는 것 정도가 웃으며 하는 퇴사 인사였달까.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해리포터’의 집요정 도비가 주인으로부터 풀려난 뒤 ‘도비는 자유에요’라고 외치는 장면은 탈출을 꿈꾸는 ‘회사 노비’들의 통쾌함을 대변하는 ‘퇴사 필수 짤방’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쳐.

하지만 ‘조용한 이별’은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이어진 ‘퇴사 열풍’으로 퇴사는 더 이상 ‘포기’가 아닌 ‘용기’로 받아들여지게 됐고, 박씨처럼 자신의 결정을 당당하게 알리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퇴사파티 #퇴사축하파티 같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넘쳐난다.


물론 친구, 가족과 함께 퇴사를 자축하는 파티라면 새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즘 ‘퇴사파티’는 달라졌다. 파티 장소는 회사 안, 파티 호스트는 직장 동료들이다. 지난해 봄 현도경(26)씨도 당시 소속팀 팀장님의 퇴사일에 맞춰 팀원들과 함께 축하파티를 준비했다. 문구점에서 사온 재료들로 손수 축하 플래카드를 만들고, 회사의 다른 팀 직원들을 파티에 초대하기 위한 재미난 포스터도 만들었다. 꽃다발ㆍ케이크가 있는 깜짝 축하부터 1~2차로 이어진 밤샘 파티까지, 퇴사를 축하하는 거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즐겁고 유쾌한 축하가 이어졌다고 한다.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현도경씨가 동료의 퇴사파티를 위해 만든 포스터. 현도경씨 유튜브 캡쳐.

물론 그날의 파티는 회사가 좋아할 이벤트는 아니었다. 현씨는 “퇴사파티를 한다고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특히 높은 직급으로 갈 수록 ‘유별나다’며 안 좋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고 돌아봤다. 퇴사자는 떠나는 마당이지만, 남아있는 직원들은 좀 눈치가 보이지 않았을까?


“팀장님과 함께 있는 동안 정말 즐겁게 일해왔거든요. 회사 눈치를 보기보다는 팀장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파티를 진행했네요.”


이 같은 분위기 변화는 설문조사에서도 보인다. 지난해 모바일 리서치 기업 ‘오픈서베이’가 20~40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동료가 퇴사할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라고 물어본 결과 ‘부럽다ㆍ응원한다ㆍ이해간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경우가 60.2%(602명)였다. ‘안타깝다’거나 ‘조금만 더 버텨보지, 이해 안 간다’라는 답변은 21.4%(214명)였다. 더 이상 동료의 퇴사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말리기보다 ‘새 출발’로 응원하는 시선이 대세로 자리잡은 것이다.

현도경씨는 퇴사파티의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 동료들과 함께 공유했다

공백기 없애는데 연연 않고 푹 쉬겠습니다

‘퇴사 후 공백기는 짧을수록 좋다’는 사회생활의 불문율도 깨지고 있다. 퇴사 후 곧바로 다른 직장을 찾아 안간힘을 쓰는 대신,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게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주는 것이다.


김태현(33)씨에게 그 휴식은 ‘퇴사여행’ 이었다. 김씨는 원래 ‘회사에 뼈를 묻자’고 생각할 정도로 애사심이 깊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꿈에 그리던 직장에 입사했고, 늘 바라온 홈쇼핑 MD(상품기획자)라는 직함을 달고 즐겁게 일했다고 한다. 오후 10시 이후에만 할 수 있는 속옷판매방송을 담당 할 때도 매일같이 야근을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할수록 ‘나만의 목표’는 사라지고 회사의 매출, 영업이익을 목표 삼아 사는 것 같아 고민스러웠다고 한다. ‘묵묵히 달리면 커리어가 쌓이고 성공하겠지’라고 일하며 7년 차가 된 2016년의 어느 날, 인생의 좌표를 찾지 못한 선후배들이 줄줄이 회사를 나서는걸 보고 1년간 품고 있던 사표를 꺼냈다. 그리고 약 한 달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첫 직장을 그만둔 뒤 퇴사여행을 떠난 김태현씨가 크로아티아의 해변을 거닐고 있다. 김씨는 자신의 퇴사여행기를 책 ‘퇴사하고 여행갑니다’로 사람들과 공유했다. 김태현씨 제공

사실 김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여행을 다녔다. 주말을 틈타 일본에 놀러 갔고, 휴가철이 되면 열심히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퇴사를 결정하기 직전에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남은 연차휴가를 모아 네덜란드로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퇴사 후 ‘무소속 자연인’으로서 가는 여행은 달랐다. 남들 출근할 때 유유자적하는 재미를 원 없이 즐겼기 때문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한복판의 루더스 온천에서 오전 8시부터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 에르제베트 다리 위로 차들이 빽빽히 줄을 서서 지나가고 있었어요. 출근 시간이라 직장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거죠. 저도 모르게 사악한 미소가 번지면서 ‘나는 여행하는 베짱이, 너는 출근하는 일개미!’라고 속으로 외쳤죠.” 물론 다음 월급이 없는 백수신세로 돈 걱정을 달고 다녔지만, 마음만은 편한 ‘시간부자’였다는 설명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 잘 그만둬 봅시다

퇴사는 더 이상 은밀한 욕망도, 숨겨야 할 비밀도 아니다. 다음소프트가 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 12월 31일까지 올라온 트위터 게시물 114억6,597만건, 블로그 4억1,842만건, 뉴스 2,804건을 분석한 결과 올해 새해 계획 키워드에 처음으로 ‘퇴사’가 등장했다. 20~40대 직장인들이 스스로를 ‘퇴준생(퇴사준비생)’이라 생각하면서 적극적으로 ‘좋은 퇴사’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8위를 차지한 ‘퇴사’와 함께 ‘취업’이라는 새해 계획이 5위에 오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2016년 퇴사한 뒤 한 달간 퇴사여행을 다녀왔던 김대근(34)씨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취업난에서 찾았다. “저도 첫 직장에 입사하기 전 몇 백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어요. 그런데 막상 면접보라는 곳도, 합격되는 곳도 몇 개 안되잖아요. ‘정말 여기에 가고 싶었나’ 라고 생각이 들 정도의 회사에 가야하고, 또 입사하면 직장인 한 명이 하는 일은 모두 매뉴얼대로 짜여 있죠. 결국 취업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취업하고 나면 부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기지 않을까요?”

김대리, 부장님... 제 퇴사파티에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둔 뒤 퇴사여행으로 체코 프라하를 방문한 김대근씨가 스카이다이빙을 즐기고 있다. 김대근씨는 김태현씨와 함께 자신의 여행기를 책 ‘퇴사하고 여행갑니다’로 펴냈다. 김대근씨 제공.

그렇게 우리는 한 회사와의 관계에 끝을 고하지만, 머지않아 또 직장과 일을 찾아가야 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기에, 우리는 그 끝을 더욱 후회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퇴사문화를 연 사람들의 말이다. 김대근씨는 “퇴사여행을 가서 좋았던 건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충분히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라며 “여행을 다녀온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만큼은 훨씬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정선씨도 “내 정체성을 회사 이름과 직함에 가두지 않고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넓게 규정한다면, 퇴사 역시 어둡고 심각한 결정이 아니라 나의 성장을 위한 좋은 이별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