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향해 실탄 사격까지…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컬처]by 한국일보

반공영화에 반전 메시지 담았던 이만희 감독

배우 향해 실탄 사격까지… 전쟁영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봉구 역할을 맡은 구봉서가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실감 나는 전투 장면에 반전 메시지를 담아 크게 흥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 ‘무진기행’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승옥은 이만희(1931~1975)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전진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영화인에게 바치는 더없이 아름다운 헌사이자, 영화감독 이만희가 걸어온 평생의 경력을 단번에 함축하는 명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의미심장한 건 문장의 서두에서 전쟁영화를 먼저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만희의 영화세계를 두고 환상의 걸작 ‘만추’(1966)나 유작이 된 ‘삼포 가는 길’(1975), 만주 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1971)나 스릴러 ‘마의 계단’(1964), 또는 ‘검은 머리’(1964)가 주로 논의되지만, 감독 이만희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 근간은 바로 전쟁이었음을 김승옥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영화에 담긴 휴머니즘, 시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생동감 있는 묘사는 몸소 겪은 전쟁의 경험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참전용사 감독, 전쟁영화 만들다

이만희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한국전쟁을 맞아 통신병으로 5년간 복무한 참전용사 출신이었다. 영화계에 발을 들인 뒤에도 종종 지인들에게 “내가 가진 기억은 군대와 영화밖에 없다”거나 “영화감독이 안 되었으면 계속 직업군인으로 살았을 것 같다”라 술회하곤 했다고 한다. 배우 문숙이 쓴 ‘마지막 한 해-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에선 어린 나이에 전쟁에 뛰어들어 “못 볼 것을 많이 봤다”라며 술자리에서 전쟁 시기를 회고하는 면면이 드러난다. 51편의 필모그래피 중 11편이 전쟁영화로 채워져 있을 만큼 이만희는 전쟁이란 소재에 깊이 천착했다. 멜로드라마로 분류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1962)나 ‘귀로’(1967)에서조차도 배우 김진규가 연기한 두 인물이 각각 북한군 여장교를 구출해 사랑에 빠지는 해병대 소위이거나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하반신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장교 출신의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을 만큼, 전쟁은 이만희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는 전쟁영화의 유행기이기도 했다.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1961)이나 조긍하의 ‘철조망’(1960), 김묵의 ‘전쟁과 사랑’(1962) 등 전쟁영화가 매년 서너 편씩 만들어져 극장가를 도배하곤 했다. 가족드라마 ‘주마등’(1961)으로 막 입봉한 신인감독 이만희 또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만희의 ‘살아있는 그날까지’(1962)의 초반부 전투 장면 연출에 깊은 인상을 받은 대원영화사의 사장 원선은 이만희에게 본격적인 전쟁영화를 한 편 감독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전쟁영화의 걸작이자 이만희 초년의 출세작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정민 촬영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이만희 감독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오프닝을 일체의 대사 없는 전쟁 다큐멘터리처럼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특수효과 부문의 발전이 미진했던 한국영화의 제작 환경상 실감나는 묘사를 얻기 위해 실탄 사격을 감행하는 등 현장은 전장 그 자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통념과는 달리 ‘돌아오지 않는 해병’만이 실탄을 사용한 영화였던 건 아니었다. 이미 ‘5인의 해병’이 있었고, 바로 전년에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가 5만발 넘는 실탄을 소모한 전례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유독 전설로 불리게 된 건 여타의 영화들과는 차원이 남다른 스케일 때문이었다.

중공군 교전장면에 해병대 3,000명 투입

배우 향해 실탄 사격까지…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배우 장동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엑스트라 연인원 10만명 등 대규모 물량이 투입돼 제작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등장 인원 1만4,500명, 엑스트라가 연(延) 10만명’(조선일보 1963년 4월 9일자). 오늘날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영화의 물량은 현역 해병대 장병들과 탱크, 군용기 등의 실전 군 장비를 대거 투입한 결과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이야기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시작해서 장단 사천강 전투로 끝나는데, 국군의 무용담을 그린다는 점을 주목받아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끌어낸 것이다. 시가전은 전쟁 때 파괴된 폐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용산의 한전부지, 후반부 전투는 김포평야에서 로케이션 촬영이 이루어졌고, 1,500발의 TNT와 5,000여개 넘는 뇌관이 폭발했으며, 중공군과의 교전 장면에만 3,000명의 해병대 인원이 투입되었다. 막대한 물량을 쏟은 탓에 6개월간의 촬영은 비용 문제로 중단되고 재개하기를 밥 먹듯 했다. 제작자 원선은 도중에 영화를 엎으려다 전투 장면 촬영분을 보고서야 마음을 돌렸고, 시사용 필름을 본 지방흥행업자들이 호응하여 돈을 보태준 덕에 간신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평균 영화 제작비가 200만~300만원이던 시절, 영화에 들어간 예산은 총 880만원에 달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촬영 과정은 위험천만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인기 코미디언이기도 했던 배우 구봉서의 회고에 따르면 이만희 감독의 현장에서는 배우들이 의식하고 피해 다닐까 봐 땅속 어디에 뭐가 묻혀있는지를 얘기하지 않았고, 다른 영화에서 쓰이는 양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양의 폭약을 묻어 터뜨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압권인 건 배우들 옆에 총알이 박히는 컷의 촬영이었다. 전 군과 서울시경에서 엄선되어 차출된 특등 사수들이 배우들 몸 근처로 실탄을 빗 맞추었고, 심지어 이만희 감독 본인이 카메라 옆에서 직접 M1 개런드 소총을 잡고 사격하기도 했다. 최일병 역의 배우 최무룡이 1980년대에 연재한 회고담에 따르면 지프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장교가 촬영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안전을 경시한 현장은 숱한 사고로 얼룩졌다. 땅에 묻은 폭약으로 인해 중공군 엑스트라 한 명의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가 벌어져 강남의 논 열 마지기를 구해 주는 것으로 수습한 일도 있었다. 영화는 서울 관객 20만을 넘기고 2,100만원의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지만, 촬영 과정에 있었던 피해에 대한 보상 처리를 하고 남은 금액은 1,000만원 남짓이었다.

이만희를 찾아온 ‘감방 동기’

당시 반공영화 또는 분단영화로 불렸던 전쟁영화의 주인공들은 시종일관 영웅적이며 흔들림 없는 이념의 화신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만희 영화의 남자들은 달랐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으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희로애락을 잊지 않는 등, 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에 밀착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영화의 유행을 견인한 대표작으로 꼽히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만희의 초점은 애국이나 반공이 아닌, 전쟁 속에 떨어진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반전 메시지, 비극적 휴머니즘에 찍혀 있다. 소녀 영희(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옥희 역으로 유명한 전영선이 맡았다)는 시가전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며, 영희와 같은 마을에 살던 구 일병은 학살에 휘말린 여동생의 주검을 목격하고 오열한다.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는 평소에 알던 이웃이었고 그 이웃의 동생 최 일병이 같은 부대로 전입 오는 데서 영화의 비극적 아이러니는 정점에 달한다.

배우 향해 실탄 사격까지… 전쟁영화

촬영장에서의 이만희 감독. 이 감독은 전쟁영화와 스릴러, 멜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사를 빛낸 천재 중 한 명으로 종종 꼽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 이후 이만희는 해병의 요청을 받은 ‘YMS 504의 수병’(1963)을 비롯해 여러 편의 전쟁영화를 연출하게 된다. 문제는 ‘7인의 여포로’(1965) 때 터졌다. 술에 취한 양공주가 “양키 고홈”을 외치는 장면을 비롯해, “이 나라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 전쟁만 안겨줬을 뿐” 등의 대사가 반미 성향에다 반공법을 위반한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검열에서 난도질당한 채 억지로 개봉된 영화는 실패했고, 이만희 감독은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한 달 넘도록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소 후 다시 영화 작업에 몰입하던 어느 날, 이만희 감독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감옥에서 알게 된 그 청년은 2박 3일 휴가를 받아 자신을 만나러 왔는데, 이때 감독은 ‘만약 저 청년이 나를 만나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갔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한국영화사 최고의 걸작 중 한 편으로 꼽히는 ‘만추’의 탄생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2019.04.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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