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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골프가 인생 전부였던 박세리 “그러나 즐기지 못했다”

by한국일보

<38>골프의 전설 박세리


“슬럼프 덕에 못 봤던 걸 볼 수 있게 됐다”

후배들에게… “골프가 인생 전부 되면 안돼”

소렌스탐 등과 내달 레전드매치 출전… 은퇴후 처음

한국일보

골프의 신화를 쓴 박세리 도쿄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5일 서울 강남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돌이켜 보면, 골프를 즐기면서 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세상을 빛내리.’ 그래서 세리였다.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있는데 그가 그랬다. 할머니가 지어준 한글 이름이라고 했다. 그의 할머니는 이름을 선사할 때 진짜 그렇게 되리라고 과연 확신했을까.


박세리(42)라는 이름 석자에는 한국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1998년 메이저 중의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맨발로 워터해저드(골프 코스 안에 걸쳐진 호수나 연못 같은 수역)에 들어가 기슭에 놓인 공을 자신 있게 날리던 모습. 이는 IMF 구제금융의 위기에도 좌절하지 않는 한국인의 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시작한 지 불과 7개월 만의 성과였다. 그것도 이미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이었으니 이 무서운 신인을 세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12년 간 LPGA 투어에서 거머쥔 우승 트로피가 스물다섯 개, 그 중 다섯이 메이저 대회에서였다.


전설의 시작은 중학교 1학년 때 한 옹골진 결심이었다. 열세 살의 세리는 차 안에 있었고, 그의 부모가 밖에 있었다. 우연히 보고 듣게 된 장면, 어머니가 한 달만 이자를 미뤄 달라고 사정했지만, 상대는 매몰찼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지인에게 돈을 빌렸던 거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진 줄 몰랐다. 그는 우는 대신, 마음에 결기를 새겼다. “꼭 성공해서 엄마, 아빠가 저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뒤부터는 공 하나를 쳐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쳤어요. 그런데 (결심대로) 이뤘으니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운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다. 아버지가 아침에 연습장에 데려다 주고는 깜빡 잊고 밤 늦게 집으로 퇴근해도 그는 여전히 공을 치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 아버지가 부랴부랴 그를 데리러 온 적도 있었다니 나이 열셋의 결심이 참 독했다.


2007년, 최대 목표였던 LPGA ‘명예의 전당’(자동으로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회) 헌액(獻額)을 달성했다, 골프채를 쥔 지 17년 만의 성과다. 9년 뒤 후배 박인비 선수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역대 최연소 입성이었다.


어느 성공기나 그렇듯 그에게도 빛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운동 선수라면 피할 수 없는 슬럼프도 찾아 왔다. 슬럼프까지 고려해 스스로 완벽한 관리를 해왔다고 생각했기에 받아들이기 힘든 시기였다. “스윙을 하는데 제가 아닌 것 같았죠.” 나중에는 대회장에서 골프채를 쥐고 있는 자신이 싫었을 정도였다니.


그가 찾은 방법은 모두 다 내려놓는 거였다.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골프 인생을 시작했고, 2006년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 캐리 웹(호주)을 꺾고 트로피를 안았다. 연장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박세리, 자신으로 돌아온 거다. 슬럼프가 그에게 준 선물은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되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다음 달 20일부터 22일까지 강원 양양군에서 열리는 ‘설해원 레전드 매치’에 출전하느라 2년 반 만에 다시 골프채를 잡은 박세리 2020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을 5일 만났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누가 봐도 ‘운동하는 언니’ 같았고 얼굴은 화면에서보다 훨씬 작아 놀랐다.

‘최고’로 소개되고 싶어 잡은 골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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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감독은 초등학교 때 육상 선수로 발탁돼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육상을 했다. 중1 때 우연히 간 골프대회에서 육상과는 다른 골프의 매력을 느꼈다. 홍인기 기자

-세리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지어주셨어요. 한글 이름이죠. ‘세계를 빛내리’라는 뜻으로 지으셨다고 들었어요. 근데 또 우연찮게 (그렇게 돼서)… 하하하.”


-어릴 때 이름에 담긴 의미를 들었나요.


“어릴 때는 전혀 신경을 안 썼어요. 골프 시작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랬죠. 미국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나왔을 때 여쭤본 적이 있어요. ‘할머니, 내 이름은 한자가 없으니까 뜻도 없는 거야?’ 물었더니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신기하네요!


“네, 어떻게 또 하다 보니까 (이름처럼) 그렇게 됐죠. (미소)”


-골프하기 전 육상부터 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종목이었나요.


“저는 만능이었어요. 하하. 허들, 멀리뛰기, 200m 달리기, 계주, 투포환… 뭐 학교에서 다 시켰죠.”


-그럼 시켜서 한 건가요.


“육상은 하고 싶었어요. 운동을 좋아했거든요. 제가 딸 셋 중 둘째인데, 제가 가장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육상 선수가 되고 싶었죠.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땐 육상부가 학교마다 거의 있었잖아요.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반마다 뒷줄에 앉은 학생들 다 일어나서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키가 커서 뒤에 앉았거든요. 육상부를 뽑으려고 그런 거였어요. 그때 뽑혀서 했죠. 육상하면서 좋기는 했는데, 선생님들이 하도 때리니까 못하겠더라고요. 잘 해도 때리고 못해도 때리고, 그래서 엉덩이가 맨날 멍들어있었어요. 엄마한테 못하겠다고 해서 그러라셨는데, 아빠는 또 계속 하라고 하셔서 도망 다니고 그랬어요. 하하. 그러다가 중학교 올라가면서 골프를 시작하게 됐죠.”


-아버지가 골프를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권유를 한 건가요.


“골프를 아버지가 좋아했고 또 잘 하셨어요. 예전에는 기계체조 선수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육상을 했기 때문에 골프엔 관심이 없었어요. 어느 날 아빠가 ‘연습장 가서 골프 한번 해볼래’ 해서 간 적이 있는데 저는 재미있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다들 어른들뿐이고요. 그러다가 골프를 엄청나게 좋아하시는 아빠 친구가 시도 때도 없이 아빠한테 전화를 해서 저를 골프 대회 내보내라고, 아니면 골프 대회 구경이라도 시키라고 한 모양이에요.”


-왜요?


“글쎄요. 저는 골프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도 그러니까 아빠 친구가 한번 대회에 구경 가보자고 해서 갔어요. 거기서 그 분이 선수들을 인사시켜 줬죠. 그런데 저보다 한 학년 높았던 중학교 2학년 선수를 소개하면서는 ‘중등부에서 전국 최고’, 또 저보다 한 살 어린 초등학교 6학년 선수를 소개하면서는 ‘초등부에서 전국 최고’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듣는데 기분이 남다르더라고요. 왠지 누가 나를 그렇게 소개하면 참 괜찮겠다는, 좋은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아빠한테 골프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연습장 가자고 해서 처음 골프채 잡았을 때 느낌 기억 나나요.


“중1 때인데, 뭘 할 줄 알아야 느낌이 오지, 하하하. 그때는 별로 관심도, 재미도 없었어요. 육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중학교도 육상부에서 스카우트 제의 받아서 진학했거든요. 육상하던 친구들도 다 함께 갔고요. 친구들하고 함께 놀면서 운동하는 게 좋으니까 골프는 눈에 안 들어왔죠.”


-대회 구경하고 와서 ‘골프를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뒤에 잡았을 때는 어땠나요.


“그때는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잡은 거라 연습을 열심히 했죠. 8개월 만에 처음 나간 대회가 아마 시즌 마지막 대회였을 텐데 3등인가 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해 겨울에 열심히 했죠.”


-왜 열심히 하게 됐나요.


“꼭 성공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생겼기 때문에요.”


-첫 대회에 3등이라서 좀더 하면 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서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음… 흠…”


그가 좀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반드시 성공하겠어’ 박세리를 만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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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골프로 꼭 성공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가 아직도 생생한 듯 기억을 떠올렸다. 홍인기 기자

“누구나 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데요. 골프가 좋아져서 시작할 때쯤 아빠 사업이 잘 안돼서 힘들었어요. 부모님은 제게 집안 사정은 전혀 말씀을 안 하시고 표도 안 내셨죠. 저를 그저 꾸준히 뒷받침 해주려고 하셨어요. 제가 아는 저의 부모님, 특히 아빠는 당신이 좀 다치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말은 못하는 분이에요. 그런데 우연찮게 제가 차 안에 있을 때 어떤 장면을 봤어요. 그 장면이 저한테는 동기가 됐어요.”


-어떤 장면이었나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아빠가 처음으로 엄마 명의로 해주신 빌라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 사업이 잘 안돼서 그걸 담보로 돈을 빌린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자도 매달 줬어야 했는데, 한 달 정도 밀려서 엄마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상대가 너무나 야박하게 대하는 거예요. 엄마는 많이 속상해했고요. 그것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정말 성공해야겠다고.”


-중1 때니까 어렸잖아요. 울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울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대신 그 이후엔 공 하나를 치더라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쳤죠. ‘꼭 성공해서 보여줘야겠다’는. 스토리가 약간 드라마 같죠. 아마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한테는 그게 동기부여가 된 거죠. 그래서 열심히 해서 성공하려고 했고 운이 좋게 성공을 했어요.”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마음 먹은 대로 실력으로 다 나타나기는 어렵잖아요. 이루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겠지요.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아빠도, 엄마도 항상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 말고는 누구도 나를 강하게 할 수 없다. 네가 네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거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연습을 하면서도 계속 상황을 만들어 가면서 했어요. 공만 치면 재미도 없고 지루하잖아요. 그러니까 공을 치면서 이건 무슨 대회, 어떤 상황, 어떤 샷이다 이렇게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가면서 쳤죠. 뭐든지 내가 선택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어요. 골프를 선택 했으니 골프에 관해선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죠.”


-굉장히 혹독하게 훈련한 걸로 유명한데요.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했어요.”


-그 정도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음, 시간으로 따지면 이런 적이 있었어요. 아빠가 아침에 연습장에 내려주고 가셨는데 저녁까지 사람들 만나고 일하다가 깜빡 잊은 거죠. 한밤에 집에 들어갔는데 제가 없으니 그때 생각이 난 거예요.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연습장에 가보니 그때도 제가 연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한국 선수들 연습 양이 아주 많아요.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기 보다 스스로 하는 게 가장 남지요.”


-미국에서 활동을 하게 됐잖아요. 왜 가게 됐나요.


“무작정 갔어요, 혼자서.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로 전향했잖아요. 중3 때 프로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면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고요. 자신감이 많이 생겼죠. 그러다가 대학 갈 시기가 왔어요. 그때 좀 (결정하기가) 힘들었죠.”


-왜요?


“대학 갈 나이에 대학에 가는 건 평생에 딱 한번이잖아요. 다시 오지 않는 시기이고요. 캠퍼스라는 곳에 나이에 맞게 가서 1년이든, 4년이든 시간을 보내더라도 어차피 프로로 턴(전향)할 거였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게 맞을지, 아니면 제가 가고자 하는 프로의 길로 바로 가는 게 좋을지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프로였기 때문에 프로로 바로 턴을 했고 한국이 아닌 더 큰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보다 미국이 훨씬 크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투어니까,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죠.”


그는 이후 2007년 숙명여대 정치행정학부에 합격해 ‘서른 살 새내기’가 됐다.

‘미국 엄마’가 준 지혜, ‘아니요’

한국일보

무서운 루키.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워터해저드에 들어가 기슭에 박힌 공을 쳐낸 박세리 감독. 연장에 재연장 끝에 그는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에 혼자 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엄청 힘들었어요.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가족, 친구, 지인 아무도 없었으니까. (투어를 다닐 때) 공항에서 티켓을 받아서 게이트를 찾아가야 하는데 영어를 할 줄 알아야 찾죠. 안내 모니터 앞에서 알파벳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확인하고, 가면서도 맞는 건지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티켓 내밀면서 계속 물어보고요. 게이트에서 기다릴 때도 영어로 뭐라고 하는데 이게 간다는 건지 안 간다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죠. 비행기 타서도 이 비행기가 맞는지 확인하느라고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했고요. 공항에 내려서 캐디 만나서 대회장에 가고 끝나면 밥은 먹어야 하니까 가는 길에 샌드위치 사서 호텔에 가서 먹었죠. 처음에는 대회장에 가서도 라커실에도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다른 선수들이 뭐라고 말을 걸면 답을 해야 하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말을 못하면 그 선수도 민망하고 나도 그럴 테니까. 그래서 처음 몇 개월은 안 들어갔어요. 차에서 신발 갈아 신고 하면서 생활했죠. 그러다가 낸시 로페즈(62)와 로리 케인(55) 선수를 알게 됐어요. 그들은 제가 영어를 못하는 걸 아니까 조심스럽게 많이 도와주셨죠. 함께 연습 라운드도 많이 했고요. 그렇게 친해지면서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어요.”


낸시 로페즈는 1987년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또 하나의 전설적인 골퍼다.


-친구가 되어 준 거네요.


“가족처럼 잘 해주셨어요. 로페즈는 저를 보면 자신의 젊었을 때가 생각이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줬죠. ‘너 하나가 100명이면 100명 모두를 만족 시킬 수는 없다. 그러니 가끔 ‘노’라고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선수 생활을 하면서 네 자신을 관리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폭도 넓어진다’고요. 한국 문화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배우지도 않잖아요. 그러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최선을 다하느라 힘들었죠. 그런데 그런 걸 가르쳐주셔서, 이럴 땐 이렇게 ‘노’를 해야 하는구나 알게 됐죠.”


-그래야 자기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군요.


“투어하면서 정말 많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거든요. (메이저) 우승하고 나서는 연습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인터뷰가 많았어요. 더구나 당시엔 한국에서 온 선수는 거의 없었으니까 굉장히 이슈가 됐죠. 특히 US오픈 우승하고 나서 그랬죠. 루키인데 우승한 첫 대회도 메이저고, 두 번째도 메이저니까 그게 기록이었죠. 연습을 못할 정도로 스케줄이 있으니 그걸 보다가 그런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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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절의 박세리 감독(오른쪽)이 낸시 로페즈 선수와 1998년 7월 LPGA JAL 빅애플클래식 1라운드에서 티오프를 기다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스승이기도 했네요.


“미국에 있을 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고 도움을 많이 받아서 제가 ‘미국에 있는 엄마’라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골프가) 잘 안 될 때도요. 우리 부모님도 감사해 하셨죠.”


-낸시 로페즈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제가 루키일 때 그 분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요. 대회에서 만났죠. 미국에서 ‘낸시 로페즈’하면 선수로서도 최고지만 한 사람으로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에요. 저는 그 분의 모든 게 좋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커리어를 보고도 존경하지만, 가장 인정하는 건 그의 인간미예요. 그게 저는 되게 멋있었어요. 그래서 최고의 선수도 되고 싶지만, 나 박세리라는 한 인간을 봤을 때 존경심이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아직도 멀었지만 그 분한테 배운 걸 실천하려고 노력해요.”


-미국 무대는 어땠나요. LPGA 첫 경기에서 떨리진 않았는지 궁금해요.


“아마추어 때도 대회에 많이 출전해서 그런지 떨리는 건 없었어요. 욕심이 났죠. 전에도 우승은 많이 해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어요. 새로운 환경이긴 하지만 나는 잘 하는 선수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자만 아닌 자만이었죠. 막상 가서 보니까, 저는 아우~! 새내기도 완전 그런 새내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직 많은 게 부족하다고 느끼고 많은 걸 배워가면서 했죠. 매 시합 나가면서 어느 선수든 보면서 배우려고 노력했어요. 또 우선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여유롭게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미국 들어가기 전에 적응기를 3년으로 해뒀죠.”


-그런데 가자마자 첫해(1998)에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했잖아요.


“하지만 첫 시즌 시작하고 3개월쯤 되니까 한국에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성적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루키가 첫 대회에서 예선도 안 떨어지고 20위 안에 든 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빠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으니 들어와서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죠. 아마도 스폰서(후원사) 쪽에서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건 아니라고 했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려고 왔는데 3개월 있다가 들어가는 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가겠다고 했죠. 그러고서 한달 반 정도 있다가 우승을 한 거예요. 제가 아빠한테 전화해서 그랬죠. ‘봐봐, 기다리라고 했지!’ 하하하.”


그는 마치 당시로 돌아간 듯 그때의 자신을 성대모사했다.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 사실 스물한 살이었잖아요. 어떻게 그 나이에 자기 자신을 그렇게 믿을 수 있었나요.


“목표가 있으니까요. 시작도 전에 돌아가면 안되잖아요. 저는 꿈 하나만 갖고 갔어요. 당장은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고, 더 큰 목표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거였죠. 그걸 다 이뤘으니 제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죠.”

골프에 인생이 담긴 것처럼 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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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경 42.67mm 이상, 무게 45.93g 이하의 골프공. 이 작은 공에 인생을 담아 살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가 왔다. 홍인기 기자

-LPGA 투어 12년 간 25회 우승을 했죠. 하지만, 성적이 매번 좋을 수도 없었을 테고,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적도 있었을 텐데요.


“슬럼프가 있었죠. 2004년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는 데 필요한 포인트(승점) 1점을 남겨뒀을 때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모든 포인트를 다 받게 됐죠. 그 다음 한국에서 경기가 있었어요. 마친 뒤에 다시 미국에 와서 출전을 했는데, 그때 저는 그게 슬럼프인 줄 몰랐죠. 첫 라운드에서 스윙을 하는데 내가 갖고 있던 감의 스윙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는 둘째 라운드부터 못 쳤죠.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회 끝난 뒤에 일주일쯤 쉬고 다음 대회에 나갔는데 똑같은 거예요. 그래도 슬럼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슬럼프였던 거죠. 저는 운동선수니까 슬럼프가 올 것을 알고 그것마저도 대비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처럼 생활을 했거든요. 슬럼프를 방어하기 위해서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서 관리를 했어요. 골프를 위해서 낭비 없이 살았죠. 그런데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관리를 잘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마치 내 인생의 모든 게 골프에 담긴 것처럼 살았는데, 골프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던 거죠. 돌이켜보면 슬럼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걸 배웠고 그간 보지 못한 걸 보게 됐어요. 슬럼프나 어려움 없이 내 인생이 완벽하게 지나왔다고 한다면, 글쎄요. 명성은 더 얻었을지 모르겠지만, 많은 게 부족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슬럼프로 어떤 게 보였나요.


“슬럼프가 왔을 때는 모든 게 다 싫었어요. 그냥 조용히 나를 좀 놔뒀으면 싶었죠. 그러니까 사람이 끝도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더라고요. 그때는 부진하니까 언론도 뭐 (기사가)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옆에서 누가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항상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니, 아마 전에도 같은 말을 했을 텐데 나한텐 들리지 않았던 거죠. 가기 싫지만 그때는 그냥 갔어요. 부상도 있어서 어차피 골프채를 잡지 못할 때였거든요.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골프를 잘 하든, 못 하든 이들은 항상 옆에 있었는데, 나는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여유 없이 살았구나. 내가 대체 어떻게 살았나.’ 사실 커피 한 잔 마신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러지 못하고 살았던 거예요. 조금 더 여유 있게 선수 생활을 했더라면 더 오래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그가 후배들이 생각났는지 말을 좀더 이어갔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얘기해요. 인생에서 밸런스(조화)를 맞춰가는 게 중요하다고요. 이제는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다 알아서 최선을 다하고 무한히 노력하거든요. 골프 이외의 내 삶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게 뭔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나는 몰랐어요. 미국에서 (선수 시절에) 인터뷰할 때도 항상 ‘나는 그간 즐길 줄 몰랐는데 이제는 즐겨야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즐기지를 못했어요. ‘즐긴다’는 단어의 답을 못 찾았죠. 굳이 어디 멀리 가서 뭘 하는 게 아니라 잠시나마 나를 위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한데 저는 그런 걸 참고 살았던 거죠. 한국 선수들이 보통 그래요. 외국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런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일찍 지치는 거죠.


“네, 인생의 밸런스를 잡는 게 쉽지 않지만, 중요해요. 그러니 저도 자기 관리에서 결과적으로 부족했던 거죠. 만약 그런 걸 좀더 빨리 알았거나 실천했다면 달랐을 텐데, 저는 이미 그 틀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력은 했지만 그걸 깨진 못했어요.”


-커피 한 잔에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지 못했나요.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죠. 전에는 다른 외국 골프 선수가 ‘나는 골프 선수이고, 골프가 내 생업이지만, 이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안다’고 말해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말이 맞더라고요.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한다면 너무 힘들죠.”


그의 슬럼프는 1년 반 정도 지속됐다. 그러나 이겨냈기에 지금의 박세리가 있는 거다.

슬럼프엔 내려놓는 게 답

한국일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절, 대회가 끝난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박세리 감독. 그는 메이저 대회 5회를 포함해 LPGA 투어 통산 25회 우승을 거뒀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14회(아마추어 6회 포함)까지 총 39회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세마스포츠마케팅 제공

-결국 극복했지요.


“아마 다른 운동선수들도 똑같을 텐데 슬럼프를 벗어나려고 굉장히 노력을 해요. 내가 왜, 뭣 때문에, 뭐가 부족했나, 뭐부터 시작해야 하나 더 집착을 하게 되더라고요. 운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나를 더 못살게 굴고 그래서 더 지치더라고요. 그러니 일어나는 시간도 더 일러지고, 연습장에 더 오래 있고요. 그때 동생과 함께 있었는데,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이러다가 우리 언니 죽을 거 같다고. 정말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더래요. 말을 해도 듣는 것도 아니고, 혼자 생각하고, 새벽에 나가는데 밤새 잠도 안 잔 것 같고… 그런데 그때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나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내려놓는 게 답이었어요. 힘드니까, 가장 힘들 때니까 쉬어야 하는 거죠.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음 다시 나와야 하는 건데 프로 골퍼에게 그게 되나요. 누가 기다려주겠어요. 언론이, 대중이, 스폰서가. 그때 알았어요. 나는 내가 골프채를 놓고 싶을 때 놓고 싶다고, 이렇게 놓고 싶지는 않다고. 그때 저는 운이 좋게도 스폰서가 이해하고 기다려줬죠. 그래서 다 내려놓고 시간을 좀 가졌어요. 그리고 차근차근 다시 시작했죠. 예를 들면 연습할 때 어제보다 0.1%라도 좋아진 게 있다면 만족했죠. 대회에 다시 나가면서도 ‘전 대회보다 감이 나아졌네, 이번 주는 훨씬 좋네’라고 기대치를 확 낮추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제 위치를 생각하니 내려놓지를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노력했죠. 그렇게 차츰 하다 보니 나아졌고, 오랜만에 베스트가 나오더라고요. 다시 우승하게 됐죠.”


그게 2006년 맥도날드 챔피언십이다. 슬럼프를 딛고 다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다시 골프 인생을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겠어요.


“그렇죠. 슬럼프가 왔을 때 정말 처음 느낀 기분이었는데, 티박스에 서는 순간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쉬고 싶은데 또 여기에 와있는 거죠. 그러니 첫 홀부터 모든 게 힘들고 싫었죠. 그래서 골프를 그만 둬야 하나 생각까지 할 만큼. 그런 시간을 보내고 다시 우승한 거였죠.”


-그간 경기를 한 걸 보면 연장전에서 패한 적이 없죠. 그런데 그러기까지 과정을 보면 계속 안 풀리다가 동타를 만들고 버디 하면 우승인데 그게 또 안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승리하고요.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어르신들이 많이 말씀 하시더라고요. 인생과 같은 게 골프라고. 생각대로, 마음대로 안되니까요. 아무리 프로라고 한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골프라고요.”


-박 감독 생각은 어떤가요.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인생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골프가 굉장히 힘들거든요. 다른 스포츠는 보통 살아있는 공을 치는데, 골프는 서 있는 공을 살리는 거잖아요. 그것도 어려운데 또 외롭게 홀로 싸워야 하거든요. 체력도 그렇지만 정신력도 좋아야 해요. 아주 예민한 운동이기도 하고요. 몸이 어디 살짝 베이기만 해도 문제가 될 만큼. 그런데 또 가장 매력 있는 운동이 골프예요. 골프는 알면 알수록 더 어려워지죠.”


-골프는 뭐다,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면요.


“골프는 인생의 도전과도 같아요. 한 홀, 한 홀이 다 다르거든요. 분명히 제가 제 공을 치는데도, 티샷했을 때, 세컨샷 했을 때, 퍼트했을 때 다 달라요. 대신 어떤 상황에서든 도전할 수 있는 희망도 보이고 용기도 생기죠. 좌절할지라도 다시 희망을 찾게 돼요. 그러니 도전이죠.”

선수 때 왜 동료와 밥 한번 못 먹었나

한국일보

전장이자, 배움터이자, 친구이자, 인생이었던 그린을 떠나는 은퇴 경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홍인기 기자

-2016년 은퇴를 했죠. 그 시즌 경기할 때 어땠나요.


“되게 묘했어요. 은퇴 하기 전 3년을 두고 준비를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훅 다가와 있더라고요. 2년도 더 남았네, 1년 반 정도 남았네 하다가 1년 밖에 안 남았더라고요. 너무 빨랐어요. 2016년에 열리는 대회는 저한테는 모두 마지막이니까 느낌이 달랐죠. 시즌에 대회가 스무 개 정도 있었는데, US오픈이 미국에서 하는 마지막 경기였어요. 첫 라운드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둘째 라운드 마지막 홀 남겨두고 ‘이게 미국에서 마지막 경기가 되겠구나’ 싶더니 후반 들어가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요. 마지막 홀에서 티샷하고 그린에 올라가는데 굉장히 이상했어요…”


순식간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를 생각하니 울컥했던 거다. 눈물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늘 이 자리에 있었는데 이제는 없을 거니까… 친했던 선수 친구들이 그립더라고요. 제가 (은퇴하고 한국으로) 간다니까 다들 울더라고요. 그게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네요.”


-중1 때 차 안에서 했던 결심도 이뤘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니 이루고자 했던 건 다 이뤘죠. 안타까운 것 하나는 그랜드슬램을 하지 못한 건데 그것 외에는 제가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이에요. 꿈을 가진다 해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참 적은데, 저는 결국 이뤘으니까요.”


-한국에서 은퇴 경기(2016 KEB하나은행 챔피언십)가 있었죠.


“첫 홀부터 울면서 쳤어요. 1라운드만 하면 저는 끝나는 거였거든요. 많은 분들이 오셨더라고요. 그 18홀이 어느 때보다 좋았어요. 그린을 걸어가면서 생각했죠. 나는 더 이상 내가 듣고 싶은 환호성을 듣지 못하고, 팬들은 또 보고 싶은 선수를 더 이상 못 보는 거잖아요. 행복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어요. 선수로서 모든 걸 아쉬움 없이 마쳤어요. 이제 나는 또 다른 인생의 출발선에 서서 비기너(초보)처럼 시작을 해야 하죠. 저의 선수 생활은 이제 역사 속에 남을 거지만, 앞에 있는 후배들을 보니 위로가 되면서 든든하더라고요. 저의 대에서 끝났으면 아쉽기만 했을 텐데, 후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현재 선수들도 또 어느 누군가의 꿈이 돼 있고요. 제 꿈이 현실이 되는 과정이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주고 그게 이어지고 있으니 저한텐 의미가 커요.”


그는 꿈의 책임을 아는 프로였다.


-우리 여자 골퍼가 LPGA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인, 실재하는 증거였으니까요.


“최고를 만드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에요. 어떤 유능한 코치가 와서 가르친다고 해도 받는 사람이 다 최고가 되지는 않으니까. 내가 나를 만들어 가야 해요. 또 나를 알아가는 게 그래서 가장 힘들고요. 좌절 속에서도 희망은 있어요. 누구한테든 기회는 동등하게 와요. 내가 어떻게, 언제, 어디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저한테는 그런 (차 안에서 느낀) 동기부여가 기회를 잡을 수 있게 했고요.”


-은퇴 시점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고려해서 잡은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하. 감독 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하고 싶다고 다 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생각만 했는데 운 좋게 감독을 하게 됐고, 은퇴 시점과도 우연히 잘 맞았죠.”

잔디 알레르기가 있는 걸 몰랐다

한국일보

골프로 세계를 제패한 박세리 감독, 은퇴 후 골프채를 잡지 않았던 그는 다음달 ‘설해원 레전드 매치’에 출전한다. 그를 비롯해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 로레나 오초아(멕시코), 줄리 잉스터(미국) 등 LPGA의 전설들과 박성현(솔레어), 렉시 톰슨(미국), 아리야 주타누간(태국) 등 차세대 주자들이 나선다. 홍인기 기자

-골프로 많은 걸 이뤘지만, 개인 박세리를 생각했을 때 아쉬운 것도 있을 듯해요.


“함께 생활했던 한국 선수들하고 밥 한번을 제대로 먹지를 못했어요. 스케줄에만 연연해서. 한 명씩 은퇴하니까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표현은 잘 안 했어도 서로 의지했거든요.”


-은퇴 전에 이후의 삶을 계획했나요.


“운동선수였으니 은퇴하고도 운동에 관련된 일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골프 선수도 은퇴하고 나서 할 게 많다는 걸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죠.”


그는 평소 관심 있던 와인으로 전문업체 올빈과 손잡고 ‘세리 와인’ 브랜드를 만들어 출시해 관심을 모았다. 최근에는 선쿠션(엘로엘) 광고도 찍었다. 그가 이 얘기를 하니 장면 하나가 생각났다. 다시 1998년 US오픈, 해저드에 들어가 공을 쳐내기 전 그가 골프화와 양말을 벗었을 때다. 까맣게 탄 얼굴, 팔, 다리와 달리 신발 속 그의 발은 새하얬다.


-그때 하얀 발을 보면서 찡했어요.


“그땐 몸에 끈적이는 게 싫어서 아무 것도 안 발랐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피부는 더 까매진 거죠.”


-은퇴하고 골프를 전혀 안 했다고 들었는데, 다음달 설해원 레전드 매치 때 출전하죠.


“그거 때문에 요즘 직업이 다시 생겼죠. 선수 생활 그만 뒀더니 선수 때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하하. 선수 때만큼은 아니지만.”


-연습 시작 했나요.


“지난달 설해원 레전드 매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난 뒤부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부모님 모시고 한두 번쯤 나갔고 웬만해서는 안 했죠. (출전) 발표 하고 나서는 연습장도 가는데, 선수 때하고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아직 선수 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서 힘들더라고요. 하하. 그걸 받아들이는 게 잘 안 돼요. 하하하.”


그래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이번 레전드 매치에는 선수 때 라이벌 중 하나였던 아니카 소렌스탐(48)도 출전한다. 그래서 물었다.


-소렌스탐이 의식되지는 않나요.


“전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승부사의 눈빛이 비쳤다.


“제가 소렌스탐보다 아마 힘이 좀더 많이 남아 있을 거예요. 하하하. 저보다 먼저 은퇴했거든요. 하하. 아마 (은퇴 후에) 골프는 저보다 더 많이 칠 거예요.”


-은퇴 후에 왜 골프를 안 했어요.


“그동안 후회 없이 칠 만큼 치고 은퇴해서요. 아직은 은퇴한 지 별로 안돼서 그런지 그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햇빛 알레르기, 잔디 알레르기가 있었다고요, 선수 생활 할 때는 몰랐나요.


“더워서 그런가 보다, 뭘 잘못 먹었나 보다 그러고는 무시했죠. 선수 생활 끝나고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건 무시할 만한 것 같아요. 신경 써서 아프다, 아프다 하면 더 아프잖아요. 웬만큼 심각한 게 아니면요. 뭐든지 마음 먹기에 달렸어요. 그렇게 최면 걸듯 살아서 그런지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지 뭔 알레르기가 있는지 몰랐죠. 그런데 비염은 엄청 심해서 코에 맞는 알레르기 주사의 도움을 받아서 좋아졌고요.”


전설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인생에서 골프 말고 남은 게 뭐가 있나요.


“골프 말고 제 인생에서요? 없는 거 같아요. 인생의 전반전은 골프가 모든 것이었죠. 후반전에 뭘 선택할 지 모르지만 다 잘해보고 싶어요. 전반전이 언더 파(규정 타수보다 적은 타수)라면, 후반전은 그만큼은 아니어도 이븐 파(규정 타수와 같은 타수)는 하면서 재미있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고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하는 삶의 원칙이 뭔가요.


“저 혼자 이 자리에 온 게 아닌 걸 알아요. 그간 제가 받았던 걸 나누고 싶어요. 골프 선수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후배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아마 진짜 운이 좋은 건 우리 아닐까. US오픈에서 포기하지 않고 죽은 것 같았던 공을 살려냈고, 슬럼프가 왔지만 ‘진짜 골프채를 놓고 싶은 때’가 아니기에 놓지 않고 이겨냈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눈물을 흘리며 은퇴할 수 있는 영웅을 우리는 또 한 명 갖게 됐지 않은가. 그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엔 즐기는 법을 몰랐다고 했다. 그러니 다음 달, 2년 반 만에 다시 서는 라운드에선 충분히 즐겨보기를, 그래서 ‘즐기는 승부의 맛’을 전해주게 되기를.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