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슬의 코러스 김효수 “내 목표는 가수가 아니다”

[컬처]by 한국일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5>가수 뒤의 가수 김효수


24년간 2만여 곡에 코러스 입힌 ‘전설’


평양무대 두 번 선 유일한 코러스이자,


빅마마의 ‘브레이크 어웨이’ 원곡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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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가수가 못돼서 코러스를 한다고 여기고 측은해 하죠.”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신인 가수 유산슬의 코러스로 그를 처음 봤다.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다. 개그맨이자 방송인 유재석씨를 트로트 가수로 데뷔시키는 과정에 그가 등장했다. 유산슬은 ‘가수 유재석’의 활동명이다. 유산슬의 노래 녹음이 끝나고 코러스인 그가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녹음 부스로 들어가 “노래 한번 쭉 들을게요”라며, ‘합정역 5번 출구’를 듣더니 곧장 코러스를 시작했다. 악보도 현장에서 처음 받은 참이었다. 그 악보엔 어디서 어떻게 코러스를 넣으라는 가이드나 가사는 전혀 없다. 오롯이 코러스 가수의 창작에 달려있는 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런 전문 코러스 세션은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귀하다고 한다. 그는 전주에서 “아아아아, 합정역 5번 출구”, 간주에선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같은 코러스를 넣었다. 때론 가수의 노래 바로 다음 같은 가사를 반복해 추임새를 했다. 자신의 코러스에 자신이 화음을 몇 겹씩 넣어 한층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유산슬의 목소리에 그의 화음이 포개지니 같은 곡인가 싶을 정도로 깊고 화려해졌다. ‘박토벤’이라 불리는 트로트의 대가 박현우 선생이 과연 “우리나라 코러스에서 이거”라며 엄지를 치켜 들만 했다.


그 장면에서 눈길을 잡은 건 이 한마디였다. “가수분은 끝을 좀 짧게 끊으셨는데.” 유산슬을 ‘가수’라고 칭하는 대목이었다. 누가 봐도 가수는 그였는데 말이다. 어떤 마음으로 코러스를 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게다가 그는 1997년 솔로 앨범까지 낸 터였다. 빅마마가 히트 시킨 ‘브레이크 어웨이(Break away)’가 여기 실렸다. ‘브레이크 어웨이’의 원곡 가수인데 왜 코러스를 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는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을 이상하게 여기는 전문 코러스였다. “저는 코러스가 정말 재미있고 좋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 때까지 합창단으로 활동한 경험이 그를 자연스럽게 코러스의 길로 인도했다. 여기다 창작가요 동아리로 유명한 인하대 꼬망스에 든 게 결정적이었다. 1989년 강변가요제에서 ‘이젠 모두 잊고 싶어요’로 대상을 탄 가수 박영미의 공연에 코러스로 선 것이다. 박영미 역시 꼬망스 출신이다. 그렇게 시작해 1990년대 최고의 뮤지션으로 인정받던 김현철, 콘서트의 황제 이승환의 무대까지 이어졌다. 공연뿐 아니라 음반 녹음에도 코러스로 참여했다.


그가 24년간 코러스를 넣은 노래가 무려 2만여 곡. 한달 평균 70~80곡, 1년이면 1,000곡 가까이 녹음한다니 실제는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나훈아, 이문세, 신승훈, 자우림, 백지영, 성시경, 싸이, 유승준, 핑클, 베이비복스, 쿨, 이정현, 지오디, 씨스타, 뉴이스트… 한 시절을 풍미한, 내로라 하는 가수의 뒤에는 그가 있었다. 가왕 조용필의 세션(연주그룹)으로 2005년에 이어 지난해까지 두 번이나 평양 무대에 선 코러스도 그가 유일하다.


그와의 인터뷰는 고정관념을 내내 뒤집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심벌즈가 아니라 제1바이올린, 편집자가 아니라 작가, 보좌관이 아니라 국회의원을, 사람들이 더 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던 거였다. 앞에 나서는 이만이 주인공이라고 말이다. 그가 말했다. “톱이나 1등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 되는 게 중요하죠.”


‘온리 원’ 코러스, 가수 뒤의 가수, 김효수라는 악기를 지닌 김효수(44)씨를 2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이날도 새벽 1시까지 녹음을 마치고 온 터였다.


◇생명공학도가 코러스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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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면 뭐하니’에 출연한 뒤로 반응이 뜨겁죠?


“맞아요. 일반 대중이 코러스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듯해요. 코러스라고 하면 음악 방송 무대 뒤에 서서 노래하는 사람들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방송으로 코러스가 하는 일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된 거죠. ‘코러스도 특별한 일이구나’하는. 노래에 코러스를 입히는 작업을 방송으로 공개하는 기회가 돼서 기분도 좋고, 무척 감사해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도 하루 새 400명이 늘더라고요.”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코러스로 활동한 지 얼마나 됐나요.


“공연 무대는 1995년 처음 섰고, 음반 레코딩은 1996년에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햇수로 25년째죠. 대략 추산해보니 그간 코러스를 넣은 노래가 2만여 곡쯤 될 것 같아요. 한달 평균 80곡 정도 하니까요.”


-대학 전공은 생명공학이던데, 어떻게 노래를 하게 됐어요.


“가요는 대학 때 동아리를 하면서 부르게 됐지만, 그 전부터 계속 노래를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단 활동을 했거든요. 중창단으로 뽑혀서 대회도 나가고요. 대학 때 노래 동아리에 든 건 가수 박영미 언니 때문이에요. 엄청 좋아하는 가수였는데 알고 보니 대학 선배였고, 꼬망스라는 동아리 출신이더라고요. 동아리 오디션에서 김종서의 ‘겨울비’를 남자 키로 불렀죠.”


-어떻게 됐나요?


“선배들이 듣더니, 좀더 올려보라고 해서 올리다 보니까 올라가는 거예요. 저는 합창단할 때 늘 알토 파트였거든요. 그런데 높이 불러보니 되더라고요. ‘어, 나도 되네’ 싶어서 신나더라고요. 그 뒤에 노래방 엄청 다녔죠. 지르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요. 노래방에서 닥치는 대로 연습했죠. 하하.”


-노래 부르는 재미를 그때 알게 된 건가요?


“맞아요. 합창단은 클래식 발성이라 흔히 말하는 생목소리는 안 쓰거든요. 게다가 저는 음역이 낮아서 그동안 고음 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거죠. 그런데 (고음도) 되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어디까지 되는지 한번 해볼까 싶었죠.”


-1997년 솔로 앨범 ‘속물근성’은 대학 재학 중에 낸 건가요?


“네, 중간에 휴학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필드에도 나가게 됐고, 자리를 잡았죠.”


-필드라 함은 어디를 말하나요.


“무대요(미소). 박영미 언니가 데뷔하고 나서 첫 콘서트 때 학교 동아리 후배들로 코러스를 구성한 거죠. 그래서 저도 소극장 공연 코러스로 서게 됐어요. 그때 건반을 쳤던 조현석씨가 저를 가수 김현철씨한테 소개를 해줬어요. 공연을 하는데 코러스를 찾는다고요. 그런데 사실 저는 좀 망설였거든요. 주위 설득으로 도전을 하게 됐죠. 오디션을 보고 공연에 투입 돼서 1년간 투어에 함께 했어요. 당시 김현철씨는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이자 가수였잖아요. 그러니 자신의 곡을 다른 가수들에게도 많이 주기도 했어요. 그래서 김현철씨가 만든 곡을 녹음할 때도 코러스로 참여하게 됐어요. 김현철씨 덕분에 정말 많은 기회를 얻었죠. 그래서 이문세, 이소라, 봄여름가을겨울 이런 (유명) 가수들의 노래에도 코러스를 하게 된 거예요. 돌아보면 김현철씨가 준 그 기회가 제 인생을 바꿨어요.”


당시 그는 역시 대학 동아리 선배였던 이현정, 신연아씨와 함께 코러스로 활동했다. ‘빈칸채우기’라고 코러스팀 이름도 지었다. “언니들, 이왕 하는 거 우리 재미있게, 제대로 해봐요”라며 명함을 만든 것도 그다. 일도 의욕만큼 몰려들어 유승준, 백지영, 핑클, 젝스키스 같은 그 무렵 데뷔한 가수들의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이후 이현정씨는 유명 작곡가로, 신연아씨는 빅마마의 멤버가 된다.


-코러스를 꽤 잘했나 봐요.


“하하. 김현철씨가 많이 챙겨준 덕분이기도 하고요. 당시에 알앤비(R&B)나 팝 느낌의 가요들이 쏟아져 나올 때라, 그런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코러스를 많이 찾기도 했어요. 다행히 저나 이현정, 신연아 언니가 그게 됐거든요(미소). 그러니 스튜디오들에서 스케줄을 많이 잡아줬죠. 무대 코러스와 달리 녹음에 참여하는 스튜디오 코러스는 창작의 영역이에요. 코러스는 보통 따로 악보가 없거든요. 현장에서 바로 만들어야 해요. 그렇게 공연 무대와 스튜디오 녹음, 이렇게 두 갈래로 코러스 할 기회가 많이 생겼죠.”


스물을 갓 넘은 1995년부터 불과 1, 2년 사이의 일이었다.


◇솔로 앨범으로 얻은 교훈 “나는 코러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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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코러스로 먼저 데뷔하고 솔로 앨범을 낸 거군요.


“당시 대성기획(현 DSP미디어) 이호연 사장님이 제가 코러스 하는 걸 우연히 보고 음반을 내자고 하셨어요. 당시 대성의 ‘아이돌’이라는 팀 코러스 녹음을 하고 있을 때였죠. 그런 대형 기획사에서 제안이 오니까 쉽게 거절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앨범을 하게 된 거예요.”


-어땠나요.


“저는 가수를 하고 싶다는 꿈이 없었어요. 코러스 하는 게 정말 좋고 재미있었거든요. ‘나는 코러스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걸 잘해보자’ 하던 때였죠. 그런데 앨범 제안이 오니까 ‘나도 그럼 이참에 가수를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의외였다. 그의 앨범에 든 12곡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곡들이고 실력도 좋았다.


-노래를 계속 해왔으니 잘했을 것 같은데 왜 힘들었을까요.


“주위의 기대치는 높았고 받은 노래들은 버거울 정도로 어려웠어요. 코러스는 감정을 세밀하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거든요. 가수로서 하는 노래는 달랐죠.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감정을 좀더 넣어봐’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는데 뭘 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뒤가 아니라 앞에 나서서 혼자 노래하는 부담도 컸고요.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녹음하는 내내 너무나 힘들었고, 끝나고 나서 몇 번 무대에 선 뒤로는 다시는 그 앨범을 안 들었어요. 잊어버리고 싶었죠. 유일하게 듣는 곡이 ‘브레이크 어웨이’예요. 이건 언니들(이현정, 신연아)과 코러스 녹음하는 것처럼 부른 곡이거든요. 한 큐에 녹음해서 기분도 좋았고요.”


-나중에 빅마마가 불러 유명해진 곡인데요.


“함께 코러스팀(빈칸채우기)으로 활동하던 신연아 언니가 YG엔터테인먼트에서 빅마마 프로듀서 겸 멤버로 데뷔를 준비 중이었어요. 그때 회사에서 녹음 실습을 하면서 ‘브레이크 어웨이’를 불렀는데, 양현석 전 YG 사장이 듣고 정말 좋다면서 이걸로 빅마마 데뷔를 하자고 해서 데뷔곡이 된 거예요.”


신연아씨는 빅마마의 데뷔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자신의 곡을 다른 팀이 불러 큰 인기를 얻은 걸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두 가지 마음이 들었죠.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 영광이 내가 불러서 온 거면 좋았겠지만, 빅마마가 아니었다면 이 노래는 묻혔을 테니까요. 정말 좋은 곡이라 아까웠거든요. 나중에라도 그 곡이 잘 됐으니까 그 곡이 내 첫 앨범에 실린 곡이라고 이렇게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같은 곡인데 가수를 달리 만나니 잘 된 건가 씁쓸한 생각이 들 법도 한데요.


“덕분에 모든 일이 다 때가 있다는 걸 체감했어요. 노래도 그렇구나 하는.”


신연아씨가 빅마마로 데뷔하면서 그도 홀로서기를 했다. 앞서 빈칸채우기의 다른 멤버였던 이현정씨 역시 이미 작곡가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터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각자 갈 길을 걷게 된 거다.


-본인의 첫 앨범 반응은 어땠나요.


“잘 안됐어요. 방송도 몇 번 안 했고요. 복잡한 마음이 들었어요. 저는 벌이도 중요했거든요. 생계형 뮤지션이었으니까. 코러스할 때는 제법 수중에 돈이 생겼어요. 코러스를 하면서부터는 제가 번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고 생활을 했죠. 그런데 앨범으로는 돈이 안 생기는 거예요. 혼자 다니는 것도 너무 외로웠고, 홀로 무대에 서는 것도 마치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죠. 앨범 내고 6개월쯤 있다가 제가 사장님께 이렇게 말했어요. ‘사장님, 저 그냥 코러스하면 안될까요.’ 어차피 대성기획과 계약서까지 쓰고 앨범을 낸 건 아니었거든요. 사장님 입장에서도 앨범 내고 6개월이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더 활동하라고도 못하셨고요.”


-사람들은 그래도 대성기획에서 앨범을 낸 걸 알면 놀랄 듯해요.


“맞아요. 그리고 왜 계속 안 했느냐고 되묻죠. 가수를 하지 않는 걸 측은하게 보는 분들이 많아요. ‘놀면 뭐하니’ 유튜브에 ‘언니도 꿈이 가수였을 텐데 잘돼서 어서 앨범 내세요’ 하는 댓글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진짜 코러스가 좋고 이게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여전히 앞에 나서는 일은 쑥스러워요.”


코러스팀을 할 때 명함까지 만들어 올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첫 앨범 내고 10년 뒤에는 밴드로 앨범을 냈죠?


“네, 2007년에 도트라는 밴드를 결성했죠. 제가 자우림의 세션을 할 때였어요. 콘서트 투어를 하면서 ‘아, 밴드가 이런 거구나’ 싶었죠. 자우림의 팀워크와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정말 부러웠어요. 나도 이런 밴드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마침 당시 자우림 멤버였던 구태훈씨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사운드홀릭에서 여자 밴드를 준비한다고 합류 제의를 했어요. 저는 보컬을 맡았고, 나머지 세 멤버는 피아노, 드럼, 베이스를 쳤어요. 피아노 치는 친구가 곡도 쓰고요. 그래서 곡을 만드는 것부터 편곡까지 다 멤버들이 함께 했죠.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는 보컬이라는 악기를 맡을 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노래도 코러스 하듯 힘을 빼고 불렀죠.”


도트는 싱글과 정규, 두 장의 앨범을 냈다.


-코러스는 그때 접은 건가요?


“도트는 언더그라운드였기 때문에 멤버들이 다들 다른 일이나, 다른 팀과 병행했어요. 저도 코러스를 한편으로 계속 했고요. 처음부터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고 만든 팀이 아니었죠.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하자, 그래야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중간에 결혼하고 아이 낳는 멤버가 생기다 보니 공백기가 생겼지만, 아이 다 키우고 다시 모이자 했죠. 그러니 도트는 해체하지 않은 밴드예요.”


◇코러스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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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도 가수처럼 성장하는 게 느껴지나요.


“그럼요. 코러스는 제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소리로 표현하는 일인데, 사람마다 자기 스타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누가 코러스를 하느냐에 따라서 곡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또 작곡자나 편곡자가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좋겠다고 하기도 하고요. 작곡자나 편곡자를 만날 때마다 많이 배우죠. 그러니 녹음 자체가 연습이 되기도 해요. 매번 새 곡이니 녹음 때마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죠. 그런 시간이 쌓여서 일하는 속도도 빨라지고요.”


-힘들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럼요. 한번은 4시간 동안 8마디를 채 못나간 적이 있어요. 엄청 힘들었죠. 제가 ‘우-아-’하면 (부스) 밖에서 ‘그거 말고 가을 하늘 뜬구름 같은 소리를 내달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머릿속에 있는 온갖 가을 하늘 뜬구름 같은 소리를 끄집어내봤지만, 아니라는 거예요. 그날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런 날은 몸에 피로가 고스란히 쌓여서 엄청나게 지치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결국 오케이가 나지 않았어요. 8시간 하고 나서 ‘저는 못하겠다’고 했어요.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비용도 받지 않고 나왔죠. 나중에 들어보니 이미 다른 코러스가 왔다가 안 돼서 저를 불렀던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못하겠다고 말을 하는 편이군요.


“보통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작곡가나 편곡가, 프로듀서 등이) 제게 맡겨주는 편이지만,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 저와 생각이 같으면 좋겠지만 정반대인 경우도 있거든요. 여기쯤 뭐가 들어가면 좋겠는데 거기 말고 여기라고 하거나, 죽어도 화음이 잘 안 쌓아지는 자리에 넣어달라고 하거나. 그러면 억지로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하죠. 그러면 저 스스로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렇게 의견이 다르면 제 의견을 강하게 얘기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이게 정답이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많이 편해졌죠. 더 뻔뻔해지기도 한 것 같고요. 하하.”


-코러스란 게 뭘까요?


“사람으로 치면, 토털 메이크업이나 마찬가지죠. 반주에 가수 노래만 있는 상태가 ‘생얼’이면 코러스는 풀 메이크업에 액세서리까지 하는 과정이죠. 그래서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완전히 달라요. 가수의 노래가 그 자체로 풍부하면 코러스가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코러스를 해서 되레 가수를 가리면 안되니까요.”


-하지만 코러스는 없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없으면 안 돼요. 예를 들어, 아이돌 댄스 음악은 거의 100% 처음부터 끝까지 코러스가 들어가요. 화음을 쌓는 게 아니라 가수의 목소리에 덧대서 목소리 톤을 바꿔주고 음정도 맞추는 효과를 내는 거예요. 코러스가 없으면 가수들의 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해요. 운 좋게도 제가 활동을 시작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코러스가 많아졌는데 그 이유가 아이돌이 늘어나면서예요. 모든 멤버가 다 노래를 잘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냥 한 팀이라고 생각하고 코러스 해달라’는 주문도 많이 받았죠.”


-‘놀면 뭐하니’를 보니, 코러스를 입히기 전후를 비교해서 아주 실감이 나더군요.


“맞아요. 그런데 유재석씨가 음정, 박자가 좋던데요! 생각보다 잘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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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을 많이 하는 날은 얼마나 하나요.


“유승준씨 앨범 준비할 때 36시간 동안 녹음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첫 방송 날짜를 잡아놓고 앨범 준비를 시작하던 때거든요. 그러니까 ‘낼 모레 첫 방이야’ 하면서 그 시간을 맞추려고 몰아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병이 났어요. 두 달 정도를 집에 누워만 있어야 할 정도로요. 미각을 잃고 헛것도 보이고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별 이상은 없다고 해서 한의원도 갔죠. 피가 말랐다고, 진이 다 빠졌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컨디션은 생각하지 않고 밤 새서 무리하게 녹음하고 했던 피로가 그때 한꺼번에 왔던 모양이에요. 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으니까 들어오는 대로 다 한 거죠. 그 이후로는 스케줄을 과하게 잡지 않아요. 조절하는 법을 배웠죠. 하지만, 요즘도 많이 다닐 때는 하루 이동거리가 300㎞ 정도 될 때도 있어요.”


-코러스의 매력이 뭔가요?


“가수의 목소리와 탁 맞아 들어가서 예쁘게 완성됐을 때 정말 뿌듯하고 좋아요. 성취감이 느껴지죠. 오히려 제 목소리로만 노래하는 건 쑥스럽거든요. 코러스는 화음이 쌓이고 합해지면서 제 목소리의 단점은 거의 사라지고, 장점만 부각되거든요.”


-완벽주의자인 것 같아요.


“약간 그렇기도 한 듯해요. 남한테 단점을 드러내기 싫은 거죠. 그런데 안되고 못하는 걸 무대에서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나요.”


◇조용필에게 배운 ‘무대 서는 사람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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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가수들과 많이 작업하기도 했는데 인상적인 기억을 몇 개 꺼낸다면요.


“김현철씨는 정말 감사한 분이고, 이승환씨도 기억에 남아요. 이승환 코러스는 아무나 못하거든요. 2000년까지 4, 5년 정도 무대에 섰어요. 그때 콘서트에서 봤다면서 저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죠. 이승환씨 무대에선 코러스도 가만히 서 있지 않거든요. 서커스도 하고 춤도 추죠. 하하. 이승환씨 공연은 정말 대단하잖아요. 그러니 무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말 많이 배웠죠.”


-조용필씨 무대에도 서잖아요.


“맞아요. 지금은 무대는 조용필 선생님 공연만 서요.”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나요?


“2004년 즈음에 한류 바람이 불면서 우리나라 가수들이 일본 공연을 많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도 코러스로 일본 무대에 많이 섰죠. 신승훈, 비, 박정현… 뭐 웬만한 가수들 일본 공연에 다 코러스를 했어요. 가수는 바뀌는데 코러스는 같으니까 일본에서 ‘한국은 코러스가 너희밖에 없느냐’고 할 정도였죠. 하하. 그때 조용필 선생님의 위대한 탄생 팀에서 코러스를 찾는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그래서 면접을 보고 함께 하게 됐죠. 선생님 공연이 잡히면 무조건 다른 스케줄은 조정하고 따라갔죠.”


-대가들과 작업하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도 많을 텐데요.


“맞아요! 조용필 선생님 공연 준비할 때 처음 연습 간 날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철딱서니 없었어요. 코러스로 나름 잘 나갈 때이니 제가 안일했던 거죠. 앉아서 노래를 하니까 선생님이 ‘누가 앉아서 노래를 하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코러스 친구랑 벌떡 일어났죠. 연습할 때도 공연처럼 하시는 거예요. 그 팀에 오래 있어보니 ‘내가 아주 기본적인 것도 몰랐구나’ 싶더라고요. 무대에 서는 사람이 갖춰야 할 예의 같은 거요. 선생님은 ‘무대 올라가는 사람은 옷도 함부로 입어선 안 된다. 무대에 올라가는 사람이 그렇게 (추리닝을) 입고 있으면 어떡해’ 하셨어요. 리허설을 하더라도 신경 쓰고 긴장하라는 말씀이죠. 2015년에 ‘헬로(Hello)’ 앨범을 내시고 콘서트 연습을 할 때 일화도 있어요. 공연용 영상이나 특수효과에 맞춰보려고 가수가 연습한 걸 녹음해 가거든요. 진짜 쓸 음원이 아니니까 대개 대충 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도 허투루 하지 않으세요. ‘아무리 연습이지만 조용필이 막 부른 걸 어떻게 보내느냐’는 거죠. 이런 것들이 선생님을 만들었구나 싶었어요.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는데 거기다 노력도 엄청나게 하시는 거죠.”


-가장 행복했던 무대를 꼽는다면요?


“스티비 원더가 내한 공연(2010)을 할 때 코러스를 했어요! 스티비 원더는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전 스태프와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대요. 그날은 (한국의) 코러스 멤버 중 하나가 했어요. 그러곤 무대에 섰는데 ‘내가 스티비 원더와 한 무대에 있어! 이게 현실이야?’하는 생각에 정말 벅차더라고요. 목이 터져라 정말 신나게 불렀어요. 이 일을 하면서 늘 꿈에나 나왔던 가수들을 만나는 게 아직도 정말 신나요. ‘김현철, 이승환… 내가 이런 사람들과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야’하는 거죠. 하하.”


-이런 곡도 코러스를 해봤다 할 수 있는 경험도 있나요?


“아, 스님의 앨범이요! 하하하. 보통 스케줄 잡을 때 시간하고 장소만 받거든요. 어떤 가수의 무슨 곡인지는 스튜디오에 가야 알아요. 그런데 하루는 갔더니 스님이 낸 앨범인 거예요. 목탁 반주에 스님이 불경을 읽는 앨범이었죠. 스님이 절대 음감으로 D와 A, 두 음으로만 부른 앨범이었어요. 코드도 없고요. 하하. 어떻게 하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염불이 무척 생소했지만, 화음을 쌓았죠. 하하. 무척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아, 내가 이런 코러스도 해보는구나’ 싶었죠.”


◇“서태지ㆍBTS 노래에 코러스 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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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해보고 싶은데 못해서 아쉬운 가수도 있나요?


“웬만한 분들과는 다 해봤는데, 서태지씨는 못해봤어요! 팬심으로 정말 만나보고 싶은 아티스트죠. 방탄소년단(BTS)도 너무 해보고 싶고요!”


-지금은 가수가 되고 싶은 욕심 없나요?


“앨범은 내고 싶어요. 가수로 활동할 목적이 아니라 저의 작품을 남기고 싶은 거죠. 싱글이든 뭐든 저의 음원을 갖고 있는 게 정말 소중하더라고요. 20대에 낸 그 앨범도 너무 힘들게 작업했지만, 그 시절 내 목소리가 담겨 있잖아요.”


-그때와는 또 다르겠죠.


“당시엔 어려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되는 줄 알았죠. 지금은 ‘나는 이렇게 할래, 이렇게 바꿔보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해봤기에 얻은 내공일 테다.


-코러스를 할 때 행복한가요?


“되게 좋아요. 사적인 문제로 굉장히 낙담한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 기분도 너무 안 좋았죠. 그런데 하필 그날 녹음 일정이 두 개가 있었어요. 첫 일정을 힘들게 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두 번째 일정을 하러 갔는데 상큼 발랄한 아이돌(뉴이스트)의 노래였어요. 곡에 제 목소리를 넣었는데 기분이 확 올라오더라고요. 노래가 밝으니까 입 꼬리도 한껏 올려서 불러야 하고요. 새삼 ‘아, 그래도 내가 이 일을 할 때 가장 좋구나’ 느꼈어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요.


“있었죠. 많았어요. 이 일이 순전히 전화로만 연결되거든요. 누가 나를 찾을 때만 가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내가 만들거나 도모할 수 없죠. 온전히 고용이 돼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바쁘면 전화가 매일 오는데, 그렇지 않은 때도 있어요. 일이 뚝 끊기는 거죠. 보름간 전화가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보름을 논 거예요. 안정적인 일이 아니니 그런 불규칙한 게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싶었죠. 2000년 즈음 한동안 일이 들어오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만두고 복장학원이나 다닐까’ 했어요. 원래 옷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때 대학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막 실용음악과들이 생길 때였거든요. 한 학교에서 시작하니 여러 대학에서 또 요청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강의도 많이 했죠. 희한하게 그렇게 풀리기도 하더라고요. 2009년 즈음에도 위기가 있었죠. MP3가 나오면서 음악 시장이 앨범에서 음원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예요. 제작 과정이 디지털화하면서 비용도 줄여나가기 시작한 거죠. 코러스 10번 해야 할 걸 2번만 한다든지. 시간이 돈이니까요. 그런데 그때도 한동안 일이 없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바빠졌죠. 그런 시기가 지나고 이제야 안정권에 접어든 듯해요. 운이 좋았어요.”


◇나는 코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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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도 자기 색깔이 있나요?


“그럼요. 목소리만 들으면 다 알아요. 저도 제 목소리를 다 알아듣죠. ‘에어 보이스’라고 하는 ‘공기 반, 소리 반’이 빈칸채우기의 장점이었죠. 하하. 효과음도 내고요. 젝스키스 ‘폼생폼사’에 나오는 ‘얼씨구!’ ‘지화자!’ 이런 것도 다 코러스예요.”


가수가 부른 줄 알았던 대목이 코러스였다.


-연기도 해야 하는군요.


“그럼요. 악기예요. 세션이죠. 노래마다 톤도 바꾸고요. 그래서 저희도 저작권이 있어요. 저작자, 실연자, 음반제작자의 비율이 정해져 있는데, 코러스는 실연자에 속하죠. 다만, 실연자 중 가수가 가장 많은 비중이고, 나머지를 연주자들과 코러스가 나눠 가지니 비율이 낮을 뿐이에요.”


-자신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면 뭐가 있을까요?


“저는 그냥 ‘코러스 김효수’가 좋아요. 진짜,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자신만의 삶의 도가 있나요?


“늘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한테 폐가 되는 것도 싫고요. 그래서 코러스 할 때도 내가 못해서 안 되는 건 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말해요.”


그간 노래의 절반만 들었구나 싶다. ‘코러스 김효수’ 덕분에 가요들을 다시 찾아 음미한다.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노래 속에서 솔(Soul) 가득한 여인이기도, 디스코로 유혹하는 클러버이기도, 간드러지는 여성이기도 했다. 그의 음성이 담긴 2만여 곡 중 불과 10여 곡을 들었을 뿐인데 갈증이 났다. 가수나 곡명이 아니라 코러스 가수 이름으로도 검색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가 3년 전 코러스로 함께 작업한 가수가 이런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 “존경하는 효수 언니께. 언제나 부스 밖에서 ‘짱짱!’이라며 감동받고 있어요. 늘 제 부족한 음반에 아름다운 색채를 더해주셔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옆에 그린 하트가 진심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별이 빛나는 이유는 태양 덕분이다. 스타의 노래 뒤에는 그를 비추는 코러스가 있다. “코러스로 최고가 돼 볼 거야”란 절대음감이, 그를 대체 불가한 태양 같은 코러스로 만들었다.

한국일보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2020.03.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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