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상품권 장당 14만원 차익” 가족이라서 믿었던 꿈 같은 수익률

[이슈]by 한국일보

[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23>상품권환매사기


평범한 주부는 어떻게 6년간 260억대 사기를 칠 수 있었나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 격주 화요일 연재하는 지능범죄 시리즈에서는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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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큰 여행사에 다니는데 여행상품권을 싸게 판대. 한 장을 사서 되팔 때마다 14만원을 벌 수 있거든. 너도 해볼래?”


2018년 1월 전업주부 A씨는 사촌언니 B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B씨의 친구에게 100만원짜리 상품권을 78만원에 산 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티켓나라에서 92만원에 환매하면 장당 14만원이 남는 투자였다. 한 달 간 수익률이 무려 18%에 이르는 단기 고수익 투자인데다 어릴 때부터 친한 사촌언니의 말이었다. B씨는 “장당 78만원을 보내주면 14만원을 얹어 92만원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A씨가 2,000만원을 입금하고 한 달이 지났다. A씨 통장엔 투자 원금과 이익금을 합친 2,498만원이 찍혔다. 수익률은 약 25%. 애초 약속한 18%보다 7%포인트나 높았다.


거래가 몇 차례 이어지던 무렵 B씨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는 사람들 더 모아줄 수 있을까?”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투자금과 수익을 받았던 A씨는 친오빠의 아내 C씨에게 여행상품권 투자를 권유했다. 올케인 C씨 역시 가족모임을 통해 남편의 사촌동생인 B씨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시누이인 A씨가 돈을 벌었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C씨는 A씨의 제안을 수락했다. 2018년 1월부터 약 4개월간 A씨와 C씨는 10억7,000여만원 상당의 여행상품권을 구입했다. ‘가족사기극’이 탄로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가족은 가장 든든한 돈줄


서울 양천경찰서 강명수 수사관은 2년 전 자신이 수사한 이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큰 여행사에 다니는 친구, 장당 14만원을 남길 수 있는 여행상품권,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있다는 티켓나라까지 모든 게 B씨가 지어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사기 사건을 해결한 베테랑 수사관에게도 황당한 사건이었다.


‘월 수익률 18%의 단기간ㆍ고수익 보장’. 길거리나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불법 전단지 속 꿈 같은 얘기지만, 그 허황된 말이 가족의 입을 통해서 나올 때는 현실이 됐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그야말로 평범한 주부였다. 20대 중반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키웠다. 남편도 일반적인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B씨는 유난히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졌다.


학창시절부터 말썽 한번 일으킨 적 없는 모범생이었고 전과도 당연히 없었다. B씨가 누군가에게 사기를 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2013년 2월 밀린 카드대금 청구서가 날아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작은 단순한 거짓말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첫 사기 대상은 여섯 살 많은 친언니였고 수법은 여행상품권 사기와 같았다. 처음엔 그저 밀린 카드대금만 막고 말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목돈을 만진 뒤 범행이 이어졌다. B씨의 손길은 어머니와 남편, 친척들에게로 뻗쳤다.


범행이 거듭되면서 수법도 대담해졌다. B씨는 투자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수익금만 받고 원금은 다음 달에 재투자하라고 권유했다. 78만원을 받아서 14만원을 돌려주면 64만원은 고스란히 자신의 돈이 됐다.


이런 수법으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12명에게 1,066차례에 걸쳐 263억여원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은 평균적으로 21억여원을 B씨에게 보냈다. 가장 돈을 많이 보낸 피해자는 2015년부터 거래를 시작한 B씨의 지인 D씨다. D씨는 총 67억여원어치의 상품권을 구입했다.


B씨는 범행 수익을 대부분 생활비로 탕진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를 구입할 때도 범행 수익 8,500만원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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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금 돌려막고 통장 잔고 조작


여행상품권 사기 6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B씨가 관리해야 할 돈은 무려 50억이 넘었다. 초범이 감당하기엔 꽤나 큰 액수였다. 누구한테 얼마를 받아왔고 누구에게 얼마를 줘야 하는지 철두철미하게 관리하지 않는 이상 정확한 액수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2018년까지는 별 문제 없이 원금 상환이 이뤄졌다. 누군가 원금을 돌려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투자한 돈으로 돌려막았다.


주먹구구식으로 버텼지만 2018년부터 원금 상환 요구가 부쩍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피해자 7명의 원금으로 돌려막은 탓에 통장은 메말라 있었다. 사촌동생인 A씨와 그의 올케 C씨 등 5명이 B씨의 사기행각에 말려든 것도 이 무렵이다. 새로운 피해자들이 생긴 2018년 1월부터 4월까지 매달 적게는 1억원부터 많게는 8억5,000여만원까지 16억여원이 B씨의 계좌로 들어왔다.


그래도 원금 상환 요구를 모두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가족들의 성화가 높아지자 처음엔 아이가 아파서 이번주는 일을 못하게 됐다든지, 일회용비밀번호 생성기(OPT)가 고장이 나 인터넷 뱅킹을 못했다고 둘러댔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티켓나라 사장이 상을 당해 장사를 못한다며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티켓나라는 B씨가 만들어낸 허구의 가게라 실제론 불이 꺼진 상점 하나를 골라 자신이 만든 공지문을 앞에 붙인 뒤 조작한 사진에 불과했다.


허술한 방식으로 의심을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특히 사기극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투자금을 건넨 한씨는 기일이 계속 밀리자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여행사 직원인 친구가 진짜로 존재하는지, 원금은 가지고 있는 것인지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B씨는 휴대폰 한 대로 두 개의 전화번호를 사용할 수 있는 듀얼넘버 서비스를 이용해 여행사 친구와의 가상 대화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가상의 인물이 ‘오늘은 (티켓나라에) 가기 힘든 거지? 내가 다녀올게ㅎㅎ’라고 하면 B씨가 ‘ㅇㅇ 병원을 좀 가야 해서…완전 땡큐ㅋㅋㅋㅋ’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포토샵으로 통장 잔고를 수정하기도 했다. 숫자 ‘0’을 몇 개 덧붙이는 방식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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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엄마도 몽땅 속았다


가족이 원수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B씨의 해명에도 대금 지급 기일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피해자들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사촌동생 A씨가 2018년 5월 B씨를 잡아 끌고 은행으로 갔다. 번호표까지 뽑고 나니 그제서야 통장에 돈이 없다고 실토했다.


B씨는 여행사 친구가 돈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핑계를 대며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줬다. 확인해보니 없는 번호였다.


속이 타들어가는 가족들이 다시 연락했지만 B씨는 만남을 회피했다. 찾아가도 불을 끈 채 집안에 없는 척했다. 가족들이 이틀 간 잠복 수사하듯 집 주변을 지킨 뒤에야 B씨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들은 그를 대동하고 양천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6년간 이어진 가족사기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B씨는 피해자 12명에게 263억여원을 받아 18억여원을 미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B씨 남편과 어머니는 고소장을 제출하지 않아 피해자로 분류되지 않았다.


가장 큰 피해자인 사촌오빠의 아내 C씨는 3억7,000여만원을 날렸다. B씨가 허술하게 돈을 관리한 탓에 돈을 번 사람도 3명이나 됐다. 가장 많이 번 사람은 9억여원을 가져갔다. 엑셀 등을 이용해 돈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원금을 지급하다 보니 피해자 간 피해 금액 차이도 상당했다.


경찰은 B씨 남편과 어머니에 대한 공범 여부 수사도 진행했다. 가족을 상대로 한 사기라 최소한 그들은 알고 있지 않았겠느냐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남편은 친구들 돈까지 빌려 7억원 가까이를 투자했지만 대부분 회수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8,000여만원의 손해를 입었다.


서울남부지법은 2018년 8월 B씨의 사기 혐의를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편취한 돈을 생활비 등으로 소비하고 다른 사기 범행을 하지 않고는 원금 및 이익금을 지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범행을 계속한 점, 피해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거짓 사실과 정보를 고지해 피해를 가중시킨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항소가 기각돼 1심 판결은 확정판결이 됐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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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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