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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가위로 콕 집어 잘라낸다

by중앙일보

기초과학연구원 김진수 연구팀

인간 배아서 유전자 교정 성공

국내선 규제에 막혀 실험 못해

미국 연구진에게 맡겨 효과 증명

오늘 네이처 온라인판에 실려

 

“이 신생아가 질병을 앓을 확률은 각각 신경계질병 60%, 우울증 42%, 집중력장애 89%, 심장질환 99%입니다.”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혁명, 위기인가 기회인가. [일러스트=박용석]

인간 유전자 치료의 미래를 그린 미국 과학소설(SF) 영화(앤드루 니콜 감독, 1998년 개봉) ‘가타카(Gattaca)’의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 분)는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런 진단을 받는다. 그가 30.2세에 조기 사망한다는 분석 결과를 받자 빈센트의 부모는 탈모·근시·약물중독·폭력성·비만 등 열성인자를 제거한 빈센트의 동생 안톤(로렌 딘 분)을 낳기로 한다.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영화 가타카에서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 분)는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통해 특정 질병에 걸릴 확률을 통보받는다. [사진 The Film Experience]

이렇게 인간 유전자에서 특정 질병을 제거하는 기술이 현실로 등장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2일 “김진수 유전체교정연구단 연구팀이 인간 배아에서 돌연사(비후성 심근증)를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유전자 가위로 선천적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싹둑’ 잘라냈다는 뜻이다.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한국 기초과학연구원 연구진이 제공한 유전자 가위를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연구진이 인간 배아 난자에 주입해 유전자를 바꾸는 실제 장면. [사진 기초과학연구원·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연구진이 개발한 유전자 가위는 말 그대로 가위처럼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거나 붙여넣어 디옥시리보핵산(DNA)을 갈아끼우는 ‘짜깁기’ 기술이다. 생물의 특징을 결정하는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DNA은 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이라는 염기가 특정 순서로 배열돼 있는데, 이들의 순서가 생물의 차이를 만든다.

 

영상1) 유전자 가위를 인간 배아 난자에 주입해 유전자를 교정하는 장면

정상인의 난자에 돌연변이 정자를 주입하는 모습. 주삿바늘을 통해 주입하는 용액 속에는 유전자 가위가 녹아 있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연구진은 정자와 동시에 유전자 가위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일부 세포가 교정되지 않는 현상을 피했다. [영상 기초과학연구원·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유전질환은 이 DNA 염기서열이 잘못됐을 때 발병한다. 염기서열이 엉켜 발생하는 질병은 혈우병·적혈구빈혈·헌팅턴무도병 등 약 1만 가지에 달한다. 김진수 단장은 “전체 신생아의 1% 정도가 유전질환을 안고 태어나는데, 대부분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서울대 종신교수 포기하고 기초과학연구원 택한 '유전자 가위 1인자' 김진수 박사. 김성룡 기자.

연구진은 다양한 유전질환 중 하나인 비후성심근증에 도전했다. 심장근육 일부가 두꺼워져 발병하는 비후성심근증은 젊을 때 돌연사를 야기하는 질환이다. 브라질 프로축구팀 상카에타누의 세르 지뉴 선수가 이 질환 때문에 경기 중 갑자기 사망했는데, 당시 30세였다.

 

비후성심근증도 특정 돌연변이 유전자(MYBPC3) 때문에 발병한다. 연구진은 이 유전자 사슬만 골라서 끊어내는 유전자 가위를 개발했다. DNA 사슬을 잘라내는 역할을 하는 단백질(카스9분해효소)에 MYBPC3의 염기서열을 인식할 수 있는 일종의 표적탐지기를 조합한 유전자 가위다.

 

하지만 정작 인간 배아에서 유전자 가위의 효과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국의 생명윤리법(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20개 안팎의 희귀·난치병을 연구할 때만 인간 배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비후성심근증은 생명윤리법이 규정한 연구 대상이 아니다. 국내에서 연구를 강행했다간 감방에 갈 판이었다(3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생명윤리법66조2항).

 

영상2) 유전자 가위의 원리를 설명하는 동영상

유전자 가위는 DNA 사슬을 잘라내는 단백질(카스9분해효소·영상에서 초록색 덩어리)과 특정 염기서열을 인식하는 일종의 표적탐지기(가이드RNA·영상에서 보라색 선)로 구성된다. 가이드RNA가 표적 DNA(영상에서 파란색 이중나선)를 만나자 카스9분해효소가 특정 염기를 잘라낸 뒤 정상 염기(영상에서 붉은색 이중나선)로 교체하는 모습. [영상 기초과학연구원]

 

‘세상을 바꿀 기술’을 실험실에서 썩힐 수 없었던 연구진은 어쩔 수 없이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교수팀에게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제공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 국립과학원·국립의학원은 유전적 난치병 치료 연구를 위해 실험실에서 인간 배아에 변화를 주는 행위(유전자 교정연구)를 허용한다. 기술을 확보하고도 규제에 막혀 미국 연구진에게 실험을 맡긴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스웨덴 등 선도국은 정부 승인을 전제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연구를 일정 부분 허용한다. 일본·벨기에·프랑스 등도 유전자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인간 배아 유전자 연구는 가능하다. 중국에선 아예 특별한 관련 규제가 없을 정도다.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미국 연구진의 실험 결과, 유전자 가위 효과는 탁월했다. 기존 유전자 가위는 일부 세포의 DNA 염기서열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연구진의 유전자 가위는 모든 세포의 DNA 염기서열을 바꿀 수 있었다. 정자와 만난 난자(수정란)에게 유전자 가위를 조합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정자와 유전자 가위를 동시에 난자에 주입했기 때문이다. 원래 부모 중 한 명이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다면 배아에게 유전될 확률은 50%인데, 연구진은 이를 27.6%로 낮췄다.

2030 돌연사 유발 DNA, 유전자

절단 유전체 시퀀싱 분석법을 통한 유전자 가위의 정확성 확인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또 유전자 가위가 오작동할 확률이 낮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유전자 가위가 엉뚱한 DNA 사슬을 잘라내는 경우가 드물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유전자 가위가 얼마나 정확한 곳에서 돌연변이 유전자를 잘라내는지 분석하는 기법(절단유전체시퀀싱)도 자체 개발해 이를 증명했다.

 

김진수 단장은 “연구윤리에 따라 유전자를 교정한 난자를 산모 자궁에 착상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착상했다면 9개월 후 비후성심근증에 걸릴 확률이 낮은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을 것”이라며 “기술적 문제를 모두 극복했으니 배아 연구에 대한 사회·제도적 합의가 이뤄질 차례”라고 말했다. 한국인(박상욱 기초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제1 저자인 이번 연구 결과는 3일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 온라인판에 실렸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