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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by중앙일보

냉장고가 사망하면서 바뀐 내 일상

그날 먹을 것만 사 버리는 음식 줄고

많이 사는 버릇 고쳐지고 매일 장 봐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우리 집 냉장고가 죽었다. [사진 freeimages.co.uk]

내가 없는 새 냉장고가 죽었다.

 

며칠 집에 다녀왔다. 이젠 제법 도시 공기에 숨이 막히고, 교통체증에 어지럼증이 생길 정도로 시골 사람이 되어서 빨리 포월침두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사이 냉장고가 사망하신 것이다.

 

놀자고 오는 건지, 먹자고 오는 건지 친구들은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사 들고 온다. 왜 이렇게 많이 사 왔느냐고 핀잔을 주면 “냉장고 있는데 뭔 걱정이야. 두고두고 먹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꼭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러 나가 며칠 먹어도 못 먹을 분량의 음식을 잔뜩 사고는 “못 먹으면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지 뭐.” 또 텃밭에서 딱 한 끼 분만 따오면 되는데, 끼니때마다 가는 게 귀찮아 며칠 분의 채소를 따다 냉장고에 맡긴다.

 

일주일만의 컴백을 죽어버린 냉장고가 반갑게 맞는다. 차가워야 마땅할 따뜻한 냉장고 속의 음식들이 멀쩡할 리 없다. 장류를 제외한 속에 있던 거의 모든 음식이 다 썩었다. 썩은 음식 내다 버리고, 냄새 밴 냉장고를 청소하는 데 무려 네 시간이 걸렸다.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냄새 밴 냉장고를 청소하는 건 고역이다. [중앙포토]

처음엔 입에서 욕이 나왔다. 요량도 없이 잉여의 음식을 싸 들고 왔던 친구들에게, 고픈 배를 핑계로 먹거리 사냥에 몰두했던 스스로에게, 냉장고 만든 회사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두 시간쯤 지나자 욕은 차츰 반성으로 바뀌고 결국 마지막 설거짓감을 끝냈을 때 내 마음은 냉장고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찼다. 썩은 내 나는 네 시간 동안, 나는 고행을 한 게 아니라 향기로운 수행을 한 것이다.

 

냉장고는 나를 위해 죽었다. 냉장고에 넣어두어서 신선한 것이 아니라, 신선한 재료를 사거나 따서 바로 먹는 게 신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죽었다. 그냥 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깨우치니까 이 지독한 썩은 내로 깨우치라고 제 속을 다 썩혀버리며 죽은 것이다.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올 봄에 산에 들에 핀 나물들로 밥상을 차렸다. 땃두릅, 가죽나무순, 엄나무순, 두릅. 냉장고 들르지 않고 밥상에 바로 놓인 건강한 먹거리다. [사진 조민호]

홀가분해진 냉장고 없는 내 하루

냉장고가 없으면 내 하루는 어떻게 바뀔까? 쌓아둘 수 없으니 그날 그날 먹을 것들만 사겠지. 자연스럽게 싱싱한 재료를 먹으니, 냉장고 뒤져 오래된 재료들로 편하게 한 끼 해결하고 난 다음의 불편한 뱃속은 사라지겠지. 버리는 음식도 줄어들 거야. 많이 사는 버릇도 고쳐질 거야. 매일 장 보러 나가고, 텃밭에 들러야 되니까 덤으로 몸도 건강해지겠지.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있나.

 

“땡큐, 냉장고야. 죽어줘서 고마워!”

 

냉장고가 숨이 넘어가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간다. 너 살리자고 나는 가니, 부디 잘 먹고 잘 살아라~ 꼴까닥!” 숨이 넘어간 냉장고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 놔~ 어차피 버릴 건데 괜히 4시간 동안 닦았잖아.”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