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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성인용품에 도전한 스타트업, 가로수길에 일을 내다

by중앙일보

소프트뱅크 투자한 미디어사 블랭크TV

가로수길에 대형 성인용품 매장 N.19 내

어둡고 숨기는 뒷골목의 성이 아닌

대로변으로 나온 어른들의 놀이터

성인용품에 도전한 스타트업, 가로수길

양지로 나온 성인용품점.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13길 37번지 일명 가로수길에 매장을 낸 'N19'은 감각적인 편집숍 형태로 만들었다. N.19의 2층 매장 모습. N .19는 2~5층까지 성인숍이다. 1층에서 신분증 검사하고 올라가면 2층부터 갤러리처럼 꾸며놓고 성인용품 판매점이 펼쳐진다. 지난 11월 개점해 입소문을 타고 하루 300명, 주말엔 1000명 정도 방문한다. 현장 판매보다는 자사 사이트에서 구매할 것을 권유하며 포장도 티 안나게 ‘잡화’ 등으로 표시해준다. 신인섭 기자

대한민국 트렌드를 리드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두 달 전 이곳에 아무런 설명 없이 외벽에 ‘N.19’라는 표식으로 벽면을 장식한 5층 규모의 매장(404㎡·약 120평)이 등장했다. 모양새로만 봐서는 새로운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만 했다. 그러나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 들어선 이 매장이 파는 것은 ‘성인용 토이’, 즉 성인용품이다.

 

성인용품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자유로’나 으슥한 뒷골목이 아닌 서울 시내에서도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상권 대로변에 이런 규모의 가게가 등장한 것은 그 자체로 바로 화제가 됐다. 지난해 12월 초 감각적인 매장 인테리어 소개 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노출되자 방문객이 200% 이상 급증했다.

성인용품에 도전한 스타트업, 가로수길

양지로 나온 성인용품점,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13길 37번지 일명 가로수길에 매장을 낸 N.19는 감각적인 편집숍 형태다. 'N.19'의 4층 매장은 남성용 성인기구들을 모아놓았다. 매장 모습과 전시된 제품들. N .19는 2~5층까지 성인숍이다. 1층에서 신분증 검사하고 올라가면 2층부터 갤러리처럼 꾸며놓고 성인용품 판매점이 펼쳐진다. 신인섭 기자

N.19를 기획하고 선보인 곳은 국내 미디어 커머스(V커머스라고도 불린다)의 선두주자인 '블랭크 TV'다. 이 업체는 2016년 사업을 시작해 창업 첫해 매출 100억원을 올린 유력 미디어 스타트업이다. 지난해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그룹의 한국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벤처스가 100억원 투자를 결정하면서 주목받은 곳이기도 하다.

 

미디어 커머스는 제품을 기획하고 주문형 제작으로 만든 뒤 제품 띄우기는 전적으로 소셜미디어에 의존하는 형태의 유통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무심코 열어 본 제품 체험 동영상이 즉각적인 구매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존의 홈쇼핑방송을 위협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진입이 쉬운 편이라 유사 업체도 많이 생겨 치열한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프트뱅크 투자로 날개를 단 블랭크 TV는 차세대 먹거리로 성인용품을 골라, 오프라인 매장에 과감한 투자를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27일 찾은 N.19 매장엔 손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층에서 성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입장하면 2층은 이 편집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내하는 층으로 꾸며져 있다. 성인용품이라는 이미지와 거리가 먼 산뜻한 제품이 깔끔하게 진열돼 있다. 벽면엔 콘돔 박스가 설치미술품처럼 진열돼 있다. 연말연시를 맞아 각종 토이를 넣은 '럭키 박스'를 할인해 판매하고 있었다. 1만원에서 5만 원대 상당의 특가 제품을 모아두고 ‘픽 미’와 같은 발랄한 안내문을 부착했다. 럭키 박스는 안에 내용물을 모르는 상태로 구매하는 박스로, 통상 지불하는 가격보다 더 많거나 좋은 제품들이 담겨 있다.

 

화~일 정오부터 오후 9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주중에는 약 300명, 주말에는 1000명 넘게 방문한다. 사진 찍으러 들어왔다가 현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많다. 매장 방문객의 90%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커플들이다. 온·오프라인 실구매자의 약 60%는 여성이다.

성인용품에 도전한 스타트업, 가로수길

양지로 나온 성인용품점,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13길 37번지 일명 가로수길에 매장을 낸 N.19의 출입구. 성인만 출입 가능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개점해 인스타그램 등에서 데이트 명소로 입소문 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신인섭 기자

매장을 찾는 소비자는 장난감이나 인테리어 소품을 구경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들어보고 손등에 발라보기도 한다. 층마다 배치된 직원은 남녀 모두 ‘스태프’라고 찍힌 흰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다.

 

매장 직원은 “초심자가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제품 위주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3층은 남성을 위한 제품을 모아두었다. 낡은 헬스클럽 느낌을 주기 위해 샌드백을 걸어 놓았고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남성용 ‘토이’가 가격대별로 분류돼 있다. 온라인 구매에서 알 수 없는 촉감이나 포장 형태, 사용법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특정 성을 대상화하거나 노골적인 제품,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제품은 배제했다는 설명이다.

 

4층은 여성을 위한 층이다. 미국 유명 그래픽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으로 장식한 여성용 기구 보관함,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립스틱을 본떠 만들어 이미 ‘명품’ 반열에 들어섰다는 여성용 토이가 화장품처럼 진열돼 있다. 그냥 봐서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뜻한 모양새와 색감을 자랑한다. 5층은 낡은 지방 공항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코스튬 플레이 의상과 거울, 포토존, 벤치 등이 마련돼 있다. 쉬어가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다.

 

블랭크 TV의 목표는 N.19를 생활용품전문점인 다이소, 무지처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격식 없는 성인숍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업체는 일본 생활용품 전문점인 '돈키호테'에 성인용품 판매대가 따로 마련돼 있는 것을 보고 '19세 이상만 출입할 수 있는 편의점이라는 콘셉트'로 매장을 기획했다. 대형 매장을 꾸미기로 결정한 것은 ‘성인숍은 어두운 곳에 은밀히 가야 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다.

 

지금까지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N.19 프로젝트를 이끄는 블랭크 TV의 이고운 프로는 “사람들이 ‘재밌는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워서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매장을 내기 전 ‘시험 삼아’ 준비해 지난해 9월 선보인 콘돔브랜드(커먼데이즈)는 3개월 만에 준비한 물량을 모두 팔고 손익분기점을 넘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따라 같은 라인으로 마사지 젤 같은 제품을 추가해 N.19 대표 상품으로 키우는 중이다.

 

국내 성인용품 산업 규모는 약 2000억 원대로 추산된다. 이는 피임기구와 약품 같은 ‘양성화된 성인용품’만을 따진 규모다. 완구류나 각종 이벤트에 쓰이는 행사 용품을 더하면 규모는 그보다 두 배 이상으로 뛴다. 이 프로는 “이 산업 규모가 얼마나 더 커질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망이 좋다”며 “콘셉트를 달리하는 다양한 편집숍이 앞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는 온라인 판매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실제 촉감이나 안전함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오프라인으로 나온 매장도 많다. 지난해 홍대와 이태원 일대 상권에 새로 문을 연 캐주얼 성인용품 편집숍만 해도 10여곳이 넘는다.

 

성인숍이 대로변으로 나오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성윤리 의식을 지닌 소비자의 등장과 유통업계 전문점 개점 추세가 혼합된 것으로 본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유통학회장)는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한 전문점이 하나 더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들에게 이런 형태의 성인숍은 (신발전문점인) ABC나 하이마트에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또 “온라인과 오프라인 채널을 동시에 갖춰야 살아남는 시대인만큼 성인산업에서도 오프라인에서 과감한 투자를 하는 전문점이 더 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