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민경원의 심스틸러

"욕도 상냥하게"
유병재의 블랙코미디

by중앙일보

촌철살인 '웃픈' 풍자와 해학 담아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부활 알려

넷플릭스서 방영, 농담집도 인기

'전지적참견시점' 수줍은 반전 매력도

"욕도 상냥하게" 유병재의 블랙코미디

매니저의 시선으로 스타의 일상을 관찰하는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한 유병재. 매니저인 유규선과 함께 있을 때는 지칠 줄 모르고 떠드는 수다쟁이지만 스타일리스트나 MC들에게도 낯을 가린다. [사진 MBC]

“책 잘 읽었어요.”

“아, 네.”

 

이달 시작된 MBC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MC 송은이가 지난해 출간된 유병재 농담집 『블랙코미디』(비채)에 대한 칭찬을 건네자 게스트로 출연한 유병재가 겨우 짜낸 답변이다. ‘마음속으로는 꽹과리 치고 난리 나고 너무 감사하고 기쁜데’ 표현이 잘 안 되는 탓이다. 겉보기엔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마구 분출하다 못해 발이라도 동동 구를 것 같지만, 작가 겸 코미디언인 유병재(30)가 실은 ‘극한 내성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처럼 ‘전지적 참견 시점’은 사람이 잘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각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이 된 ‘나 혼자 산다’나 ‘미운 우리 새끼’가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혼자 있을 때 모습을 관찰한다면, ‘전참시’는 스타와 매니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스타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사람의 시선으로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함과 동시에 애초에 포장 따위는 불가능한 민낯을 까발리게 하는 것이다.

"욕도 상냥하게" 유병재의 블랙코미디

'전지적 참견 시점'은 보통 매니저 출퇴근 시간에 맞춰 촬영이 진행된다. 유병재는 군대 선임으로 만난 매니저와 10년째 동거 중으로 집안에서도 관찰이 계속된다. [사진 MBC]

그중에서도 유병재와 유규선과의 관계는 단연 눈에 띈다. 군대 선임으로 만나 10년 넘게 함께 사는 동거인이자 매니저 겸 전직 스타일리스트로서 유규선은 유병재와 현실 부부를 뛰어넘는 케미를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참시’에서 개그우먼 이영자와 31번째 매니저가 보여주는 대리 먹방, 개그맨 김생민과 신참 매니저가 선사하는 사회생활 적응기도 흥미롭지만 ‘유유커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낯선 이와 함께 있는 상황을 극도로 힘들어하는 유병재에게 '규선이 형'은 그야말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막이 같은 존재다. 그가 팬들에게 낯을 가리는 동안 유규선은 팬들과 인증샷을 찍어주고 심지어 인스타그램 라이브까지 대신해줄 정도다.

 

유병재는 정제된 지상파 방송에서 수줍은 매력을 뽐내는 것과 달리 ‘낯익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온라인 콘텐트에서는 마구 날아다닌다. 역시 함께 일하는 형 유규선과 ‘동생’ 문상훈까지 셋이서 다소곳하게 앉아 진행하는 ‘N행시 교실’이나 ‘칭찬하기 선수권 대회’ 등 유튜브 유병재 채널에서 진행하고 있는 ‘문학의 밤’ 시리즈는 그가 작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라져가는 칭찬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시적 허용과 대치법을 운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제법 그럴듯한 논리에 저도 모르게 설득된다.

"욕도 상냥하게" 유병재의 블랙코미디

유병재 농담집『블랙코미디』출간 기념으로 유튜브에서 진행한 낭독의 발견. [사진 유병재 라이브]

농담집 『블랙코미디』는 이 같은 매력의 정수를 담고 있다. 비단 유규선이 대표작으로 꼽은 ‘ 넌 배에 뇌가 있을 것 같다/ 똥은 대가리에 있으니까’(‘뇌’)가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촌철살인의 미학을 만나볼 수 있다. ‘(…)적폐, 차별, 꼰대, 자기혐오를 내 통장에 넣어두고 싶다. 거기는 뭐 넣기만 하면 씨X 다 없어지던데’(‘통장’)이나 ‘대한민국에서 아들딸로 살기 힘든 이유: 딸 같아서 성희롱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함’(‘아들딸’) 같은 문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학이다.

 

항상 당하고만 사는 ‘더 불쌍한’ 청춘이라면 알바천국과 함께 만든 ‘진상손님에게 하는 말’을 추천한다. 나의 슬픔에 더 격하게 공감하며 내가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한 욕을 시원하게 대신해준다. 비록 활자로 옮겨 적을 수 없는 육두문자가 넘실대지만 속은 뻥 뚫린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는 코미디를 하고 싶다”는 그의 지론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한순간 현실 웃음이 터지는 데 그치지 않고 자꾸만 꺼내어 곱씹게 되는, 일회용이 아닌 다회용 코미디.

"욕도 상냥하게" 유병재의 블랙코미디

지난해 8월 스탠드업 코미디 쇼 '블랙코미디'에서 상냥하게 욕하는 법을 설파하고 있는 유병재.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위치를 바꿔주면 훨씬 부드럽게 들린다며 예시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 YG 스튜디오 코미디]

덕분에 같은 콘셉트의 공연도 순항 중이다. 지난해 8월 180석 규모의 서울 홍대 부근 소극장 롤링홀에서 이틀간 진행된 스탠드업 코미디쇼 ‘블랙코미디’는 지난 16일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됐다. 한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쇼로, 1시간 동안 정직하게 서서 이야기만 하는 데도 빵빵 터진다. 이 같은 흥행에 힘입어 다음 달 27~29일에는 1300석 규모의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B의 농담’을 진행한다. 불과 반년 만에 10배 가까이 판을 키운 것이다.

 

유병재의 공연에 대해 넷플릭스 관계자는 “영미권에선 스탠드업 코미디 수요가 많아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판단했다”며 “두 번째 쇼 역시 190여개 회원국에 동시 공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YG 스튜디오 코미디’ 채널을 개설해 함께 제작하고 있는 유병재 소속사 YG 측은 “국내에서는 90년대 김형곤씨 이후 명맥이 끊긴 장르인데 다양한 소재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K팝이 세계 시장으로 영역을 넓힌 것처럼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역시 충분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 눈 마주치기도 힘든데 1회 1300명의 관객과 마주하면 얼마나 긴장되겠는가. 더구나 그의 코미디는 19세 이상 관람가로 성적인 농담도 곧잘 나온다. 자위행위를 ‘회의’에 비유하거나 절정의 순간에 규선이 형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을 ‘파블로프의 개’에 비유하는 식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불편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지만, 굳이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가 대변하는 청춘의 이야기나 신랄한 정치 풍자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는 ‘유병재 XX 마음대로 나대면 어떻함?’이라는 네티즌의 악플에 대해 “이렇게 쓰면 ‘어떡함’이 아니라 ‘어떠함’이라는 청유문이 된다”고 지적했다. 하여 ‘다른 데 에너지를 더 쓰면 어떠함?’이라는 제안을 조심스레 건네고 싶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