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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소매 4개 셔츠, 42만 원 고무장갑…튀어야 산다

by중앙일보

SNS 중심시대의 패션 성공 방정식

논란거리 만들고 유머 코드 넣고

매출 증대보다 화제몰이가 우선

 

요즘 인기 TV 프로그램을 결정하는 주요 지표는 시청률보다 화제성이다. SNS·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 지가 더 중요해졌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매출도 중요하지만 화제성 또한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소매 4개 셔츠, 42만 원 고무장갑

발렌시아가의 2018 FW 남성 컬렉션 중 '더블 셔츠'는 티셔츠 앞에 또 다른 셔츠가 붙어 있는 기괴한 모습으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사진 발렌시아가]

“이런 옷을 입으라고 만든 거야?”

 

난감한 패션 아이템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던 생각이다. 지난 5월 30일 뉴욕타임스는 ‘1290달러의 발렌시아가 셔츠가 인터넷을 어지럽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2018년 가을 시즌을 위해 만들어진 발렌시아가의 한 특이한 셔츠가 주인공이었다. 티셔츠 앞에 또 하나의 셔츠가 붙어있는, 그러니까 소매가 4개인 이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셔츠는 인스타그램과 트위터를 타고 수천 번씩 리포스트·리트윗 됐다. 반응은 1290달러(약 140만 원)의 높은 가격, 모델의 진지한 얼굴, 우스꽝스러운 셔츠에 대한 조롱을 담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소매 4개 셔츠, 42만 원 고무장갑

발렌시아가의 '더블 셔츠'에 대한 트위터 반응. '실제로 만들어봤다'는 사람부터, '할로윈 의상을 위한 옷'이라는 반응까지 다양하다.

발렌시아가는 1년 전에도 이케아의 1000원짜리 장바구니 백과 똑같이 닮은 200만원대 파란색 가죽 가방으로 논란의 중심이 됐다. 지난 4월 화제가 된 캘빈 클라인의 분홍색 고무장갑도 마찬가지다. 무려 42만 원에 발매된 분홍색 고무장갑은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고무장갑과 차이점을 느낄 수 없는 소재와 디자인으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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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클라인의 핑크색 고무 장갑. 무려 42만원에 발매되어 '워스트 패션'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사진 핀터레스트]

패션계의 ‘놀라게 하기’는 예술계의 ‘낯설게 하기’와 닮았다. 색다른 시도로 흥미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경향은 인스타그램·트위터 등 SNS 채널이 활발해지면서 한층 심해졌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이미지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한순간이라도 눈에 띌 수 있는 독특한 패션 콘텐트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일단 눈에 띄고 이슈가 되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노력이 쌓여야 비로소 '매출'로 연결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치열한 레드오션의 세계에서 패션계가 선택한 나름의 생존전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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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장보기 가방과 똑같은 모양으로 200만원대의 블루 토트백을 선보여 논란이 됐던 발렌시아가. [사진 트위터]

국내 브랜드 ‘더 스튜디오 케이’의 홍혜진 디자이너는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구상할 때 ‘아이 캐칭 피스(eye-catching piece·눈에 띄는 옷)’를 전략적으로 배치한다”고 말했다. 이는 판매가 잘 되는 옷과는 다른 개념이다. 입기 쉽지 않은 독특한 옷이지만, 주목을 받기 위한 옷이라는 점에서 ‘마케팅용 피스(piece)’ 혹은 ‘SNS용 피스(piece)’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독특한 협업을 택하는 브랜드도 많다. 패션과 상관없는 식음료 브랜드 심지어 제약 회사까지 협업의 대상이 된다. 지난 5월 1일 출시된 캐주얼 브랜드 게스와 동화약품 까스활명수의 협업이 대표적이다. 일명 ‘게스활명수’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 티셔츠는 까스활명수를 연상시키는 타이포그래피와 부채표 로고 등으로 눈길을 끌었고 출시 3일 만에 공식 온라인 몰에서 완판됐다. 게스의 오연주 마케팅팀장은 “재미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한 소비자들이 자신의 SNS에 업로드하면서 간접 광고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했다. 이 외에도 헤드와 던킨 도너츠, TNGT와 삼양라면 등 식음료 업체와 패션 브랜드의 활발한 만남은 최근 패션계의 가장 뚜렷한 트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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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주얼 브랜드 게스와 제약회사의 의외의 협업으로 즐거움을 선사한 '게스활명수' 컬렉션. [사진 게스]

사실 이런 협업 제품은 매출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이슈를 일으켜 완판은 되지만 소량만 생산하기 때문에 브랜드 전체 매출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즉, 판매와 상관없이 화제를 일으키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주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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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만 슬립 드레스를 레이어드를 한 것 같은 독특한 셔츠가 등장한 알렉산더 왕 2018 SS 컬렉션. 도저히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난해한 패션을 소화한 가수 강민경에 의해 화제가 됐다. [사진 알렉산더왕, 강민경 인스타그램]

밀레니얼 세대는 말도 안 되는 옷일지라도 웃음을 주거나 즐길 거리가 된다면 기꺼이 소비한다. 이전처럼 근사하고 멋진 방식으로 진지하게 패션을 이야기하기보다 가볍고 유머러스한 패션, 이를 넘어 논란이 되는 패션이 환영받는 이유다. 온라인 편집숍 W컨셉의 지호신 마케팅 본부장은 “고객과 브랜드가 만날 수 있는 수단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극대화되면서 시각적 각인 효과를 주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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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가의 '더블 셔츠'를 실제로 입어 화제가된 샤이니의 키. [사진 중앙포토]

과거에는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들면 패션 전문가 혹은 소수의 선별된 매체를 통해 한 번 걸러져 대중에 소개됐다. 또 바이어가 제품을 선택해 매장에 가져다 놓아야 비로소 소비자가 옷을 구매할 수 있었다. 반면 요즘은 대중과 브랜드가 온라인을 통해 직접 소통한다. 손으로 만져지는 옷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보는 옷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이 쉽게 즐길 수 있는 패션 콘텐트가 환영받는다. ‘비욘드 클로젯’의 고태용 디자이너는 "이제 좋은 옷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좋은 패션 콘텐트로 대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중요한 덕목이 됐다“고 말했다. 루이비통의 버질아볼로, 발렌시아가의 뎀나바잘리아처럼 스스로 대중과 소통하고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 디자이너의 입지가 한층 넓어졌음은 물론이다.

소매 4개 셔츠, 42만 원 고무장갑

264만의 팔로워를 거느린 디자이너 '버질 아볼로'의 인스타그램 계정. 자신의 최신 컬렉션을 직접 선보이는 등 소비자들과의 직접 소통에 익숙하다. [사진 인스타그램]

우려의 시선도 있다. 신세계백화점 편집숍 분더샵 성명수 바이어는 “옷 자체의 본질을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화제가 될까 방법을 더 고민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새로운 패턴과 소재, 디자인으로 승부하기보다 화제성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알리는 데 더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