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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남자의 1인 기술창업 이야기

by중앙일보

호빔천문대 황인준(53) 대표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황인준씨가 적도의 부품 앞에서 천체망원경의 원리와 구조를 설명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10평 남짓한 공간에 구경 40㎝ 안팎의 대형 굴절 천체 망원경과 반사 망원경 7대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하늘이 맑고 달빛이 없는 어느 날 밤, ‘스르르’삼각형 조립식 건물 지붕이 열린다.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긴 한 남자는 아이보리색 천체망원경을 타고 10억 광년 너머의 이름 없는 은하의 우주로 빠져든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바로 옆 방. 딱 그만큼의 공간은 사무실과 공장이 뒤섞인 풍경이다. 한쪽에는 20인치 모니터 여러 대와 컴퓨터가, 가운데는 원통과 육면체 모양을 한 검은색의 크고 작은 금속 부품들이 쌓여있다. 끝쪽에는 둔탁한 모양의 드릴 세 대가 모여 있다. 이곳도 남자의 공간이다. 그는 이곳에서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쌓여있는 부품들을 조립한다. 그가 만드는 건 천체망원경의 핵심부품‘적도의(赤道儀ㆍequatorial mounting)’다. 별의 움직임을 동시에 따라가면서 관측할 수 있게 해주는 천문 관측용 자동추적 장비다.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그의 호빔천문대는 겉에서 보면 그냥 삼각형 조립식 건물이지만 지붕이 슬라이딩 방식으로 열리면 천문대로 변신한다. 프리랜서 김성태

‘별 보기’에 미쳤다가 그 취미가 업(業)이 된 50대 남자의 ‘반퇴 창업’ 얘기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광덕산 자락의 호빔천문대 주인 황인준(53)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창업은 취미를 갓 벗어난 수준의 중년 일자리가 아니다. 정부 지원 한 푼 받지 않지만, 요즘 뜨는 혁신 기술형 스타트업의 전형이다. 1인 창업이지만, 일본ㆍ이탈리아ㆍ프랑스ㆍ영국ㆍ홍콩ㆍ미국 등 세계 6개국으로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국내에서 황 씨처럼 천체망원경용 적도의를 생산해 수출까지 하는 곳은 인간형 로봇으로 유명한 휴보의‘아버지’ 오준호 KAIST 교수가 세운 레인보우로보틱스 밖에 없다.

 

그는 지난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피자가게 사장님이었다. 그 전에 대기업과 벤처기업을 전전하다, 2005년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내려갔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인‘별 보기’를 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 대학생이던 1984년 한국아마추어천문협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86년엔 국내 최초로 헬리 혜성을 촬영할 정도의 마니아였다. 그는 고향 산기슭에 자신만의 천문대를 만들고, 낮엔 피자가게 사장, 밤에는 별 보기의 이중생활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취미에 황 씨는 점점 더 빠져들었다.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오준호 교수와 협업해 천체망원경도 만들고, 국산 적도의 생산에 최초로 성공하기도 했다.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천체사진 전문가 황인준씨는 이제 소형 천체망원경을 하모닉 적도의를 세계 최초로 생산하는 기업가가 됐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해 초 황 씨는 ‘별 보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피자가게 두 곳을 모두 점장에게 넘겼다. 천문대 이름을 딴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본격 창업에 나섰다.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1인 창업이지만 지난해 적도의 40대를 팔아 1억6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배 이상의 매출이 예상된다. 전체 매출의 70%가 수출이다. 비결이 뭘까.

 

기술형 창업

취미로 닦아온 기술이 국내 최고 수준이다. 천체 관측과 촬영에는 적도의가 필수다. 적도의는 전기모터로 작동하는데, 감속기어를 이용해 모터의 빠른 회전 속도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황 씨는 2016년 말 대형 천체 망원경에나 들어가는 하모닉 적도의를 세계 최초로 소형화ㆍ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수술 로봇에 들어가는 정밀기어를 사용하는 하모닉 적도의는 비싼 데다, 회전 오차까지 있어 소형 천체망원경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황 씨는 제작비용은 물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회전 오차까지 줄이는 방법으로 하모닉 적도의의 단점을 개선했다.

 

협업

적도의는 듀랄루민 소재의 본체와 전기모터 등 총 30여 개의 부품으로 이뤄진다. 개인용으로 쓰려면 시중에 나와있는 제품을 조립하는 정도로 할 수 있지만, 같은 규격의 제품을 판매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황 씨는 직접 설계한 적도의 본체 도면을 가공공장에 제작ㆍ의뢰하는 방식으로 부품을 생산한다. 그와 협업하고 있는 기업만 총 6개사다. 이렇게 모인 부품을 조립하는 것은 또 황 씨의 몫이다. 1인 창업이지만, 연간 60대 규모의 적도의를 생산하고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비결이다.

네트워크

그래도 어떻게 창업 2년째인 스타트업이 세계 6개국으로 제품을 수출할 수 있을까. 황 씨는 아마추어이지만 국내 최고의 천체사진 전문가이면서, 일본 등 외국에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세계 행성 관측가 모임 정회원이면서,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 이사를 지냈다. 2015년에는 한국 최초 심우주 천체사진집 『별빛방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외 천문관측ㆍ촬영 활동을 해오면서 쌓은 천체사진 전문가들과 인맥이 자연스럽게 판매 네크워크로 이어졌다. 그 덕에 현재 일본과 영국ㆍ이탈리아ㆍ프랑스ㆍ홍콩 5개국에 판매 대행사까지 두고 있다.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2016년 8월 칠레에서 촬영한 사진. 삼각대에 캐논6D 카메라로 은하수가 배경인 고목을 찍었다. [사진 호빔천문대]

열정

기술과 네트워크가 있다 하더라도 50이 넘은 나이에 1인 기술창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계와 조립에서부터 재무ㆍ홍보ㆍ판매까지 혼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황 씨는‘문과’출신이다. 하지만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한 도전에는 나이가 없었다. 그는 적도의 설계를 위해 컴퓨터지원설계(CAD)를 독학으로 배웠고, 홍보를 위해 홈페이지 제작 기술도 직접 배웠다.

취미에 미쳤다가 평생 業이 된 50대

시리우스 근처의 갈매기 성운. 황인준씨가 직접 만든 적도의를 이용해 올 1월 서호주 퍼스 인근에서 촬영했다. 구경 250mm 반사망원경인 FDK250을 사용했다. 총노출 70분. [사진 호빔천문대]

황 대표는“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어쩌다가 취미가 직업이 됐다”며“지금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지만, 최소 80살까지 평생의 업으로 삼을 것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아산=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