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매질한 남편 선처했다가…난 결국 살해 당했다

[이슈]by 중앙일보

처벌 거부해 경찰도 개입 못해

“아동학대처럼 보호법 만들어

가해자와 격리, 심리치료해야”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편의 폭력이 시작된 것은 결혼 후 15년이 지나면서였습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이성을 잃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렸고, 종종 저의 외도를 의심하며 저를 발가벗겨 놓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5월에는 남편의 알코올 중독 증세와 손찌검이 심해지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가정폭력 경고 안내문을 보내오자 남편의 폭력과 협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저는 결국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신체적·정신적으로 폭행을 당한 적 없다”는 의견서를 써서 경찰에 제출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죽음을 막을 첫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9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저는 다시 남편의 무차별적인 폭력에 응급실까지 실려 갔습니다. 이때에도 저는 남편을 선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처벌을 핑계로 자식들 직장에 찾아가 행패를 부릴 것이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가 놓쳤던 두 번째 삶의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퇴원 뒤 저는 처벌 대신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남편은 합의 이혼의 조건으로 한 달에 한 번 자기 집을 방문해 청소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둘러 이혼을 했고, 저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혼 한 달 후 청소를 위해 남편의 집에 방문한 그 날, 저는 남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재결합과 성관계를 강요하는 남편에게 저항하자 다시 폭행이 이어진 것입니다. 23년을 이어져 온 가정폭력이었고 벗어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지막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지난 3월 가정폭력 끝에 남편에 의해 살해된 김선희(가명·58)씨의 상황을 법원 판결문을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다.


김씨의 선처로 처벌을 면했던 남편 A씨는 결국 지난달 12일 살인 혐의로 1심 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오랜 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렸으며, 갈비뼈 12대가 부러졌고 우심방과 간이 파열되는 등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가정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도움을 거부하면 경찰이 개입할 방도가 없다”며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전문기관에 피해자의 정보를 전달해 상담과 심리치료를 받게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극도의 ‘스톡홀름 신드롬(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 등 심리적 불안을 동반하는 가정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적극적 개입과 심리치료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의사를 우선시하는 법적 한계로 인해 사후 조치에 제한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을 때 전문기관에 피해자 연락처를 제공해 상담을 받도록 하는 것도, 피해자와 가해자와 격리하는 것도 모두 현행 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법에선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가정폭력 사건에서 제때 피해자 지원이 이뤄지지 못해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나온다.


지난 5월 서울 관악구에서 발생한 동거녀 살인 사건도 비슷한 경우다. 박희수(가명·35)씨는 지난해 7월부터 사실혼 관계에 있던 동거남에게 폭행을 당해 4개월 동안 5번이나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때마다 상담연계와 보호 조치를 설득했으나 박씨는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동거남이 박씨를 때리고 집에 불을 지르려 한 혐의로 구속될 위기를 맞자 “동거남이 구속되면 나는 자살하겠다”며 탄원까지 했다. 그러나 박씨는 두 달 뒤 자신이 선처를 호소했던 동거남에 의해 살해됐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격리하고 상담기관과 연계해 심리치료와 함께 처벌을 설득했다면 피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일 한국여성상담센터에 따르면, 경찰 조사에서 상담을 원했던 피해자라도 실제 끝까지 상담과 심리치료를 받고 가해자 처벌을 원하는 경우는 10% 미만이다.

장주희 한국여성상담센터 상담사는 “경찰 조사에서 상담을 원하는 가정폭력 피해자도 적지만, 가까스로 연결을 받은 뒤에도 지속적인 상담과 심리치료를 원하는 사람은 10명 중 1명이 안 된다”며 “가정폭력은 극심한 무기력감을 유발해 피해자가 자발적인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법이 이런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이어 “상담연계 과정에서 피해자가 경험한 상황과 수사 진행 상황 등이 공유되는 것이 깊이있는 상담 진행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긴급임시조치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격리된 비율은 2013년 19.5%에서 지난해 10.3%로 감소했다. 구속률 또한 1.4%에서 0.8%로 낮아졌다. 이는 결국 가정폭력 사범에 대한 관대한 처벌로 이어진다. 2017년 가정폭력 사범에 대한 검거 인원 대비 기소율은 25.9%에 그쳤다.


이에 따라 가정폭력 사건도 아동 및 노인학대 사건과 같이 수사기관 및 관련 기관이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아동복지법과 노인복지법에서는 피해자 사후관리 전담기관을 두고, 피해자 보호 및 상담을 위해 경찰이 피해자의 민감정보를 유관기관과 공유할 수 있게 돼 있다.


반면 가정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성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피해자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용욱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여성계장은 “수사 과정에서 유관기관에 피해자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제한적이고, 17개의 여성긴급전화 및 200여개의 가정폭력상담소가 제각각 운영되면서 체계적인 피해자 보호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행법상 가정폭력 가해자가 경찰의 긴급임시조치를 어겨도 체포하지 못한다”며 "과태료만 내면 법을 맘대로 어길 수 있어 엄중한 법집행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