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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아빠 일하고, 엄마는 수영장에?…‘핑크퐁’의 엄마 폄하

by중앙일보

아빠 일하고, 엄마는 수영장에?…‘핑

핑크퐁 동요 '자동차 가족'. 아빠는 머리에 서류 가방을, 엄마는 수영모와 튜브를 끼고 있다. [이미지 핑크퐁 유튜브]

‘핑크퐁’은 아이 가진 집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이자 캐릭터다. 중독성 강한 핑크퐁의 ‘아기 상어’ 동요는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아기 상어’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에게 사랑받는 핑크퐁 노래 중에는 ‘자동차 가족’이 있다. 1분 정도의 이 노래는 다섯 자동차를 각각 아빠, 엄마, 언니, 형, 아기 자동차로 그리고 한 가족으로 재미나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사를 살펴보자.


“아빠, 엄마, 형아, 언니, 난 아기, 우리는 자동차 가족, 아빠 자동차 회사에 간다 붕붕치치 붕붕치치, 엄마 자동차 수영장 간다 붕붕다이빙, 붕붕다이빙” 이 가사에 맞춰 영상에는 머리에 서류 가방을 이고 회사로 향하는 보라색 아빠 자동차와 수영모에 선글라스를 끼고 튜브를 낀 채 수영장에 가는 하늘색 엄마 자동차가 등장한다. 아빠는 일하는 존재로 그리는 대신, 엄마는 아빠가 일하는 동안 그저 수영장에 가 여유를 즐기는 모습으로 그렸다.

엄마는 그저 놀고먹는 존재가 아니다

아빠 일하고, 엄마는 수영장에?…‘핑

핑크퐁 동요 '자동차 가족' [이미지 핑크퐁 유튜브]

통계청(2016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가구는 전체 가구의 44.9%다. 이 통계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육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경단(경력단절) 엄마가 주위에 숱하다. 이들이 회사에 가지 않는다고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엄마’를 대표하는 그림이, 선글라스를 낀 채 수영장 가는 장면이 되는 건 엄마와 전업주부에 대한 폄하가 전제된 기존 편견과 고정관념이 작용한 결과다. 핑크퐁의 또 다른 동요 '상어가족의 하루'에서도 아빠 상어는 바쁘게 청소하는 데 반해 엄마 상어는 그저 화장하며 겉을 치장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콘텐트에서 성 편견을 조장하는 일은 적지 않다. 매주 수요일 EBS에서 방영 중인 ‘꼬마버스 타요’의 캐릭터 소개를 보자. 캐릭터 그림을 가리고 캐릭터 소개 글만 봐도 성별을 알아맞힐 만큼 기존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고 있다. 여성 캐릭터의 소개 글에는 하나같이 ‘상냥하다’라거나 ‘섬세하다’는 표현이 들어간다. 남성 캐릭터에 대해서도 ‘용감하다’라거나 ‘책임감이 강하다’, ‘우직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성은 무조건 섬세하고 상냥해야?

예를 들어 여성캐릭터 라니는 ‘상냥하고 귀엽지만 겁이 많은 애교 만점 꼬마 숙녀 버스’, 하나는 ‘버스들을 돌봐주는 쾌활하고 상냥한 정비사’, 앨리스는 ‘사람들이 다쳤을 때 도와주는 섬세하고 다정한 구급차’, 하트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귀엽고 상냥한 꼬마 숙녀 자동차’라고 설명하고 있다. 애교 만점이나 다정하고 상냥하다는 특성은 순종적인 여성을 최고의 여성상을 여겼던 옛 유교적 여성상과 맞닿는다.

아빠 일하고, 엄마는 수영장에?…‘핑

'꼬마버스 타요'의 여성 캐릭터 설명. 섬세하다거나 상냥하다는 설명이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이미지 EBS]

어디 ‘핑크퐁’과 ‘꼬마버스 타요’ 뿐일까. 과거 고정적 성 역할을 반복해서 보여주거나(‘엄마 까투리’, ‘와글와글 꼬꼬맘’), 주도적 역할을 하는 능동적 캐릭터를 주로 남성으로 그리는 콘텐트(‘뽀롱뽀롱 뽀로로’, ‘로보카 폴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통상 18개월에서 3세 사이 성에 대해 인지하며 성 역할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접하는 콘텐트가 잘못된 성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면 이는 치명적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편견이 고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이 표현도 맞지 않지만)을 동시에 가질 경우 전통적 성 역할을 고수하는 이보다 환경의 다양한 요구에 대한 대처력이 높고 더욱 유연하다는 연구도 있다(Shaffer, 2005). 굳이 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콘텐트를 현실인 양 보여주는 건 그 자체로 구시대적이다.


“젊은 세대의 감수성은 성 평등뿐 아니라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아지고 있는데 콘텐트를 만드는 기성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어린이 콘텐트를 만드는 이들은 어린이가 가져야 할 가치관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더욱 세심하고 공부하고 반영해야 한다.”(이나영 중앙대 사회학 교수) 그저 동요·만화의 가사 한 줄, 에피소드 한 장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 장면이 쌓이고 쌓여 평생의 편견을 만들 수 있다. 아이들 콘텐트라고 가볍게 보면 안 되는 이유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