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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애기씨도 시청률도 내가 지킨다 … 마성의 함블리

by중앙일보

‘미스터 션샤인’‘아는 와이프’ 이정은

함안댁으로 차진 감정 연기 선보여

김태리·한지민과 찰떡 모녀 호흡

데뷔 28년차 연극·뮤지컬 실력파

“러브 넘어 다양한 관계 보여줄 것”

애기씨도 시청률도 내가 지킨다 … 마

이정은은 ’작품 속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 알아볼까 싶어 평소에도 그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오랜만에 꾸며봤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이정은(48)은 몰라도 ‘함블리’는 안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극본 김은숙, 연출 이응복)에서 ‘애기씨’를 보좌하는 함안댁 역할을 사랑스럽게 소화한 덕분이다. 지금 함블리의 인기는 로맨틱 코미디 퀸 ‘공블리’(공효진)나 근육질에 귀여움을 장착한 ‘마블리’(마동석)를 넘어설 정도다. 8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난 이정은은 “전남 보성에서 촬영 도중 급하게 주민등록증을 다시 만드는 바람에 사진도 함블리인데 이참에 이름도 바꿀까 싶다”며 농담을 건넸다.


암울한 구한말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분연히 일어나는 드라마에서 함안댁은 숨구멍을 터주는 캐릭터였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고애신(김태리 분)을 살뜰히 보살펴온 유모이자 가장 든든한 오른팔로 유머를 담당하는 동시에 왼팔인 행랑아범(신정근 분)과 함께 러브라인까지 차지게 소화한 덕분이다. 그는 “김병철(추노꾼)씨가 제 배역이 제일 탐난다고 했을 만큼 워낙 입체적인 역할이었다”며 “마침 경남 진주 출신 보조작가가 있어서 사투리도 연령대 맞춤형으로 구사하게 돼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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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에서 함블리가 탄생한 장면. [사진 tvN]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가 꼭 맞는 옷을 입기 위해 들인 노력은 상당하다. 서울 출신으로 사투리를 배우기 위해 개인 교사와 함께 공부한 것은 물론 역사적 사건이 기록된 사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개화기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거든요. 주종의 관계가 뒤집어질 때 일어나는 변화를 탐닉할 정도로 좋아해서 공부가 많이 됐죠. 몰랐던 역사도 많이 알게 되고.”


그의 몰입연기 덕분에 고애신의 품에서 함안댁이 눈을 감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4일에 걸쳐 찍었는데 저도 많이 울었어요. 처음엔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을 떠 유언하는 게 어색했는데. ‘살아가라’고 한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모두 다 죽잖아요. 고애신만 남겨놓고. 그게 젊은이의 표상이자 네가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당부 아닐까요.”


행랑아범의 애틋한 눈빛에도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러브라인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을까. 철학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러브가 연애에 국한된 건 아니잖아요. 저는 남과 여, 여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나, 노인과 나 등 누구와 만나도 케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한창 사는 게 지루하고 피곤했을 때 댄스스포츠 동호회에 2~3년 나갔었는데 다들 외롭더라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적당한 순간에 손 내밀고 잡아줄 수 있는 다양한 관계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함께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과도 사이가 각별하다. 지난달 종영한 ‘아는 와이프’(극본 양희승, 연출 이상엽)에서 모녀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한지민, 2015년 ‘오 나의 귀신님’에서 서빙고 보살 역할을 맡아 발바닥에 땀 나도록 쫓아다니던 처녀 귀신 김슬기, 귀신에 빙의된 박보영까지 모두 “우리 딸”이란다. 미혼인 그는 “이렇게 예쁜 딸들을 언제 낳아서 어느 세월에 키우겠냐”며 “하나같이 결이 고운 딸들 덕에 ‘더불어’ 전성기를 맞은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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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와이프’에서도 귀여움을 뽐냈다. [사진 tvN]

“아직 철이 안 들어 젊게 사는 것 같다”는 그는 “하루 4시간만 여태껏 관심 없었던 일에 도전해 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지론을 펼쳤다. “‘오 나의 귀신님’ 팀은 지금도 1년에 한두 번은 함께 캠핑을 가요. 그 매력에 빠져서 텐트며 의자며 하나둘 사들였는데 차에 가지고 다니니까 유용하더라고요. ‘미스터 션샤인’ 대기 시간에도 애기씨랑 누워서 별도 보고 커피도 끓여 먹고.” 함블리의 소녀 감성은 답변 곳곳에서 묻어났다.


그렇다면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재미’를 첫 번째로 꼽았다. “제가 1991년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했는데 2013년 영화 ‘변호인’을 보고 많이 찾아주시더라고요. 재밌어서 그런 거잖아요. ‘아는 와이프’도 치매에 걸린 엄마 역할을 무겁지 않게 그리고 싶다는 말에 하게 됐어요. 과거가 변하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해 다단계 판매하는 것도 재밌었지만요.”


당분간 쉬면서 숨을 고를 법도 한데 바로 차기작을 정했다. 영화 ‘카트’(2014)를 연출한 부지영 감독의 단편 ‘여보세요’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50대 근로자 역할이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도 한지민과 다시 호흡을 맞춘다. 그는 “하나는 통일, 또 하나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며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생겨나는 케미에 관심이 많다 보니 계속 독특한 이야기에 끌린다”고 귀띔했다.


그는 “연기를 못해서 28년 동안 계속할 수 있었다”고 했다. 게임 같으면 한 판 깨면 끝날 것을, 연기는 깨도 깨도 깰 게 너무 많으니까 어깨가 으쓱하다가도 내려오고 앞이 막막하다가도 고개 숙여 보물을 찾을 수 있단 얘기다.


“‘옥자’(2017)에서 옥자 목소리 역할을 맡았을 때 봉준호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목소리가 좋아요, 라고. 근데 거기서 목소리‘만’ 좋은가? 그래서 얼굴은 안 나오나? 하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죠. 설경구, 안내상 등 극단(한양레퍼토리) 선배들이 하나둘 방송하고 영화할 때 저도 하고 싶었는데 못했거든요. 배우 같은 외모가 아니라고 지레 겁먹어서. 근데 감독님도 절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하다못해 돼지랑 비슷하다든가, 돼지처럼 영양가 있는 무언가를 내놓는다든가. 그래야 불순물 없이 역할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더 해보려고요. 김혜자 선생님처럼 좋은 에너지와 영향력이 작품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