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원림 송광사 선재길…이 가을 최고의 단풍놀이

[여행]by 중앙일보

여행작가 3명의 가을 선택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올가을에도 산과 들은 알록달록 물들 터이다. 지난여름이 유난히 모질었으므로, 이번 가을엔 조금 왁자하게 단풍을 즐겨도 좋을 듯싶다. 어디가 좋을까. 내로라하는 여행작가 3명에게 ‘내 생애 최고의 단풍 명소’를 물었다. 여행작가들이 꼽은 3곳 모두 사계절 아름다운 명승이지만, 가을이 가장 황홀하다는 건 가본 사람은 다 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래전 늦가을에 들렀던 전남 담양에서 가을의 평온과 아름다운 쇠락을 봤다. 늦은 오후 햇볕 비껴든 메타세쿼이아길이 아름다웠다. 줄지어 선 거목 사이로 깊숙하게 든 볕에 길도, 메타세쿼이아 잎도, 사람도 물들었다.

2㎞ 남짓한 메타세쿼이아길 끝에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있었다. 청춘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도 그 길에서는 평온하게 들렸다. 멀리서 나란히 걸어오는 남녀는 간혹 서로 얼굴을 바라봤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깊은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는지 남녀는 천천히 걸었다. 나무 밑동을 감싼 푸른 풀이 반짝였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담양 남쪽에는 조선시대 정자와 자연이 어우러진 원림(園林)이 많다. 먼저 식영정(息影亭). 석천 임억령(1496~1568)의 사위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지은 정자다. 석천은 주옥같은 시편 ‘식영정 20영’을 남겼는데 김성원·고경명·정철 등 제자들이 운을 빌려 다른 시를 짓기도 했다. 이들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단다. 식영정 뒤에는 정철(1536~93)의 성산별곡 시비도 있다. 사실 이런 이야기보다 ‘그림자가 쉬는 곳’이라는 뜻의 식영정 이름 자체가 마음에 와 닿는다.

낮은 언덕에 있는 식영정으로 오르기 전, 떨어져 쌓인 단풍잎을 밟으며 경내를 거닐었다. 물기 마르지 않은 단풍잎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도 간혹 보였다. 낙엽이 그 잎의 그림자 같았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쇄(瀟灑),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조선 문인 양산보(1503~57)는 스승이 정치 싸움에서 밀려나 죽은 뒤 모든 걸 버리고 담양으로 내려와 계곡에 집 한 채 짓고 살았다. 그 집이 소쇄원이고,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이다. 소쇄원의 건물 이름도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비 갠 하늘의 달이란 뜻의 제월당(霽月堂), 비 그치고 해가 뜨며 부는 바람이란 뜻의 광풍각(光風閣).

대나무로 만든 물길도 근사하다. 떨어진 단풍잎은, 흐르는 물은 흐르게 하고 넘치는 물은 계곡으로 떨어지게 둔다. 단풍잎 지는 소쇄원은 쇠락이 아름답다는 걸 알려줬다.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소쇄, 소쇄.”




장태동 여행작가 jjcokr89@naver.com

가을에 전남 순천 송광사를 가본 적 있으신지. 재작년인가. 담양 금성산성에서 늦게 내려오는 바람에 버스가 끊겼다. 정류장에 서 있던 한 사내와 길동무가 되어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그는 “송광사에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을에 송광사를 찾은 건 이런 까닭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봄에는 선암사가 좋고, 가을에는 송광사가 눈부시다는 걸. 그해 가을 송광사 여행은 법정스님(1932~2010)이 잠든 불일암의 고요, 굴목이재 보리밥집에서 만난 인연이 어우러져 더욱 소중하게 기억된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송광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오는 암자가 탑전(오도암)이다. 여기서 편백 숲으로 이어진 길이 ‘무소유의 길’이다. 낙엽 수북한 오솔길이 한동안 이어지다 불쑥 대숲이 나타난다. 잠시 컴컴한 대나무 터널을 지나면, 환한 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불일암 경내로 들어선다. 법정스님은 1975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낮에는 채소밭 일구고, 밤이면 글을 썼다. 잘생긴 후박나무 아래에 스님이 잠들어 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불일암을 나와 산비탈을 타고 돌면 감로암을 지난 뒤 송광사 경내로 들어선다. 송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보조국사 지눌의 부도인 감로탑이다. 관음전 뒤편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나온다. 감로탑 앞은 송광사 최고의 전망대다. 빽빽하게 들어찬 전각이 가을 산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송광사를 둘러봤으면 굴목이재로 향하자. 단풍 곱게 물든 옛길이 매혹적이다. 굴목이재를 넘으면 허름한 보리밥집이 보인다. 식당 앞을 서성거리는 중년의 영국인 사내와 늦은 점심을 함께했다. 막걸리를 따라주니 그가 웃는다. 미소가 낯익다. 어쩌면 우리는 전생에 선암사와 송광사에서 중노릇을 했을지 모른다. 굴목이재에서 만나 선암사가 좋다, 송광사가 좋다 티격태격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작별을 고한다. 그의 출발점이 나의 종착점이고, 나의 출발점이 그의 종착점이다. 선암사에 도착하자 어둑어둑 땅거미가 번진다. 버스정류장 가는 길, 문득 나에게 송광사로 가라 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누구였을까.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하늘은 높고 바람은 부드러운 가을이다. 북쪽 산꼭대기부터 내려오는 단풍 소식에 마음이 들뜬다. 좋은 사람들과 가을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본격적인 등산은 부담스럽고, 적당히 걸으면서 단풍 구경을 할 만한 곳이 없을까? 이럴 때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곳이 강원도 평창의 오대천 계곡이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대산(1563m) 자락 이름 없는 작은 샘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물맛이 빼어났고, 다른 물과 섞이지 않아 맑은 빛깔을 간직한 채 수만 년을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이 물에 우통수(于筒水)라는 이름을 붙였고, 오랫동안 한강의 발원지로 여겼다.

산 깊고 물길 그윽한 우통수 계곡에는 절집도 둘이나 들어앉았다. 부처의 가피(加被)를 구하는 중생은 물길을 따라 부처님 앞에 엎드렸고 조카(단종)를 사지로 내몰고 왕위에 오른 세조(1417~68)도 부처의 자비를 바라며 물길을 거슬러 올랐다. 이 길이 월정사 전나무 숲부터 상원사까지 11.1㎞ 이어지는 ‘오대산 선재길’이다. 천천히 걸으면 편도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푹신한 흙 밟는 조붓한 오솔길이고, 물길 넘나들며 부드럽게 이어지는 계곡길이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재길 걷기는 반드시 월정사 일주문부터라야 한다. 그래야 한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전나무 숲길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워낙 그림 같은 숲길이어서 드라마 ‘도깨비’ 영화 ‘산책’ 등 많은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선재길은 오대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우통수 물길 오대천과 동행한다. 물길을 따라가는 길은 봄부터 겨울까지 사철 다른 얼굴로 길손을 맞는다. 이른 봄 길가의 작은 들꽃, 여름의 짙은 녹음, 차분하고 곱게 익어가는 가을 단풍, 그리고 겨울날의 하얀 눈꽃까지. 언제라도 나그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중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계절은 누가 뭐래도 가을이다. 돌돌 거리며 흐르는 물에 주홍빛 단풍이 살포시 내리고, 길섶에 수줍게 핀 구절초가 반겨준다. 가족이나 연인, 혹은 어떤 길동무라도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눠보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중앙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록 여행작가 ma-210@hanmail.net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