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그림 30년 민정기 “산길 물길 바람길 모두 역사다”

[컬처]by 중앙일보

칠순의 풍경화가가 본 우리 땅

인왕산·양평 등 굽이굽이 다녀

전통 수묵화 닮은 현대적 화풍

실제인 듯 아닌 듯 묘한 긴장감

남북정상회담 ‘북한산’ 화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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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안리 장수대’ ‘금사면 이포나루’ ‘수입리(양평)’ ‘청풍계’ ‘사직단이 보이는 길’ ‘세검정’ ‘인왕산’…. 그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동네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가 틈만 나면 찾아 걷고 또 걸었던 곳이다. 산길, 골목길, 계단길, 찻길, 물길, 그리고 바람길….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두 발로 걷고, 멀리서 바라본 아스라한 길까지, 길이란 길은 다 모아서 자신의 큰 화폭에 담았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 안의 모세혈관처럼 그의 그림 속엔 길들이 얽혀 흐르고 굽이치고 있다. 우리 시대 작가 중에 이토록 길에 모든 것을 다 바친 이가 있었을까. 이쯤 되면 그를 ‘장소 수집가’ 혹은 ‘맵헤드(maphead·지리 정보 분류와 지도에 열광하는 사람)’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민정기 전’)을 열고 있는 민정기(70) 작가 얘기다.

산세, 물세 등 지리 형상과 배치에 무게를 실은 그의 풍경화는 친근해 보이면서도 막상 다가가 보면 새롭고 독특해 보인다. 서울 사직단 인근의 주상복합빌딩과 가로수, 산 정상의 손톱 만한 막사까지 놓치지 않고 그릴 정도로 디테일 묘사가 치밀한가 하면, 마치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점으로 묘사한 산세는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실의 경관을 담은 고지도 같고, 또 전통 산수화나 민화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어떤 작품들은 아예 반추상화처럼 현대적인 느낌이 강렬하다.


◆풍경의 재구성= 구작 21점과 신작 14점 등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작 중 그가 유난히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 있다. 6개의 화폭으로 구성된 ‘인왕산’이다. 큰 화면에 풍경 하나를 담는 대신 위에 배치한 세 폭엔 산자락을, 아래 세 폭엔 주차장과 공사터, 기와집과 빌딩 등 복잡하고 친근한 도심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작가는 “도시와 산자락을 함께 담고 싶었다”며 “이것은 내 시선으로 풍경을 정리한 콜라주”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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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이 몸으로 익힌 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다양한 고지도와 겸재가 그린 ‘창의문’ 등의 그림을 “인용”했다. 다양한 공간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 것 같지만, 그가 화면에 구축한 세계는 마치 판타지처럼 과거와 현재, 사실과 상상력이 혼재된 공간이다. 이를테면 ‘유 몽유도원’(2016)은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현재의 부암동 풍경을 얹었다. 언뜻 보면 신비하고 몽환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눈에 익숙한 현실 풍경이 점점이 박혀 있다. 작가가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화면에선 겹쳐진 시간의 결이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 작으로 뽑힌 ‘수입리(양평)’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듯한 부감법을 차용해 이 지역의 현 상황을 민화적으로 풀어내 눈길을 끈다.

작가는 1972년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0년에 손장섭·임옥상·오윤 등과 함께 민중미술운동 그룹인 ‘현실과 발언’을 창립했다. 1987년 작업실을 양평으로 옮기며 풍경화 그리기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는 지리학자인 최종현(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와 함께 전국 곳곳을 답사하며 지형과 건축, 역사 문헌 자료를 탐구했다. 풍경화를 그리되 뻔하지 않은 그림,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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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역사를 담은 옛 문헌과 고지도가 제 그림의 기초가 되지 않을까 했어요. ‘묵안리 장수대’ 같은 그림에 담은 마을 위치와 구도는 그런 고민과 최 선생님과의 토론에서 나온 것이었죠. 그러니까 제 풍경화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들어 있어요.”

◆답사와 연구로 빚은 그림= 그에 따르면 30년 넘게 풍경화를 그리는 일은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장 로비에 걸린 그의 산수화 ‘북한산’(2007·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 그림을 보고 “이것은 어떤 기법으로 그린 그림입니까?”라고 물으며 관심을 표해 화제를 모았다.


북한산 응봉에서 보고 그린 이 그림 역시 과거와 현재, 여러 시점에서 본 풍경이 한 화면에서 겹쳐 있다. “풍경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역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것은 회고 취미가 아니라 역사와 물길, 사람 길을 통해 지금 현재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유화인데도 옅은 수채 물감을 겹쳐 바른 듯 투명한 빛의 질감으로 가득 차 있다.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시 외곽 풍경, 역사로 얼룩진 흔적 등을 그려도 차갑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대신 작가는 자신이 역사를 끌어와 재구성한 풍경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만히 응시하게 이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는 민정기처럼 철저히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관객들은 그렇게 객체로 고정된 풍경을 바라봄으로써 왠지 모르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 이유다. 그는 또 저서 『안목』에서 “민정기는 화폭에 땅의 원형질과 역사를 담아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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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민정기 작가의 작품 세계를 ‘빛, 공간, 길’로 요약한 최민 평론가는 “그는 일반적인 풍경화라는 형식적 틀 속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고자 꿈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평론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작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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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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