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 쓰고 헌 집만 찾아 중개해서 대박 난 부동산

[비즈]by 중앙일보

온라인 부동산 편집숍 '도쿄 R부동산'

요시자토 히로야 대표 인터뷰

공간과 사람 연결, 쇠락 지역 부흥 열쇠


2003년 도쿄에 빈 건물이 늘어나던 시기에 낡고 오래된 공간을 좋아하는 5명의 건축가가 블로그에 자신들 취향의 빈 건물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리노베이션(renovation·개보수) 기획을 하고 싶어 시작했던 블로그에 월 30만의 방문객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재미있는 부동산 중개소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신축, 역세권, 풀옵션이 아니라 빈티지(오래된 곳), 개조 OK, 창고 느낌, 반려동물, 천장 높아요 등 부동산을 보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내세웠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만 흘러갔던 기존 부동산 시장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분위기와 정서를 부각하고 사용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에 균열을 냈다. 도쿄R부동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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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R부동산은 현재 게재 물건만 수백 건에 이르는 대형 중개 사이트로 성장했다. 사이트 방문객은 월평균 500만을 상회한다. 계약 성사는 연평균 500건 정도로 2003년부터 누적 성사 건수는 1만 건. 현재 R부동산은 도쿄를 포함해 일본 전역 10개 지역을 추가했고, 빈 학교 건물이나 공공시설을 취급하는 ‘공공R부동산’, 건축 자재 쇼핑몰 ‘툴 박스(too box)’ 등으로 확장됐다. 2019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도쿄R부동산의 요시자토 히로야(吉里裕也) 공동대표를 지난 3일 단독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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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건축가가 건축이 아니라 부동산을 중개한다.



-부동산 개발 회사에 다니면서 오래된 가옥이나 개조가 가능한 공간을 원하는 지인들에게 상담을 해주곤 했다. 처음에는 우리 주변 사람들만 가진 독특한 취향인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이런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Q : R부동산은 기존 부동산 시장이 무시했던 ‘헌 물건’에 주목했다.



-개성 있는 물건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오래된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70년 전 지어진 낡은 가옥, 수리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목조 주택 등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매력적인 공간들이다. 새로운 것이 무조건 좋다고 여겼던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오래된 공간만이 가진 특별한 정취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아주 독특한 취향의 사람이 아닌, 일반적으로도 받아들여지는 정도의 수준까지 온 것 같다.


Q : 구역 안의 모든 매물을 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동산 편집숍 같다. 편집숍의 성패는 물건을 고르는 눈에 달려있다. 매물을 보는 노하우가 있을까.



-좋은 매물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R부동산의 영업 담당들의 취향도 각자 달라서 자기 취향에 맞는 매물을 찾아 알아서 소개하도록 한다. 다만 ‘이런 매물은 나쁘다’는 것만 공유한다. 우리와 가장 맞지 않은 매물은 역 앞에 있는 원룸이나 1인 거주 아파트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는 그런 매물은 취급하지 않는다.


Q : R부동산의 홈페이지는 일반 부동산과는 다르다. 마치 잡지 기사처럼 매물을 묘사한다.

-매물이 나열돼 있고 이것이 핵심 콘텐트인 것은 기존 부동산과 매한가지다. 다만 매물을 소개할 때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보(역세권, 신축, 면적 등)보다 공간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는 어떤지, 주변에는 강이나 산이 있는지, 창은 얼마나 큰지, 천장은 높은지 등을 설명한다. 사진도 공간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기보다 중요한 정보 값이 있는 사진만을 게재한다. 화장실이 중요한 공간이라면 화장실을 메인으로, 별로 중요치 않다면 아예 뺀다. 잡지를 편집하고 있는 느낌으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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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매물 자체도 독특하지만 ‘푸르름에 둘러싸여’‘나이테가 새겨진 상가 건물’‘바이커를 위한 아파트’ 등 매력적인 광고 문구도 재미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가자’라고 딱히 규칙을 정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올린 소개 글이 좋은 반향을 일으키면 그것을 참고하면서 자연스럽게 방향이 갖춰진 것 같다.


Q : 한국에서 부동산은 투자 대상이면서 자산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고려해 좋은 물건을 찾아주는 것이 부동산 중개의 원칙이다. 시세나 면적도 중요하지만, 삶의 우선순위, 가장 추구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고려해야 한다. 거실은 넓지만, 방은 작고, 화장실은 더럽지만 창밖 풍경이 좋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물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좋을 수 있다. 공급자 중심이 아니라 사용자 중심에서 공간을 소개하고 싶다.


Q : 일종의 틈새시장이다.

-일본에서도 주류와 비주류로 따진다면 오래된 건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주류다. 그런데 비주류의 비중이 조금씩 늘고 있다. 15년 전에 신축만 좋아하는 사람이 10명 중 8명이라면, 지금은 6~7명 정도다. 인구는 줄고 빈집은 늘고 있다. 소유 개념도 옅어지고 있다. 누구와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를 중시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의 수요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포인트이기도 하다. 우리가 파는 것은 단 한 개의 건물이고, 한 명만 설득하면 된다. 지금은 사실 건물이 부족한 상황이다. 항상 매력적인 매물을 찾아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최근에는 좋은 물건을 찾기보다 개발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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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부동산은 부동산 중개로 한 거리를 살려내기도 했다. 도쿄 동쪽 지요다 구의 ‘아트 이스트(art east)’라는 지역이다. 유령 건물처럼 비어있던 ‘아가타 다케자와’ 빌딩을 중개하면서 ‘갤러리 르네상스’라는 매물 광고를 냈고, 갤러리와 공방, 출판사 등이 차례로 들어오면서 지역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건물이 살아나자 주변 거리에도 예쁜 카페와 공방들이 들어왔다. 부동산을 중개했을 뿐인데 거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Q : ‘아트 이스트’ 사례가 인상적이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건물은 그 거리나 도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에선 건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임팩트가 크다. 도쿄 동쪽에 재미있는 사람들을 모았으면 해서 갤러리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이 좋게 갤러리가 계약되면서 분위기가 좋아졌다. 공실률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지역에 활기가 생겼다.


Q : 한국에도 쇠락한 지역에 핫한 카페 등이 생기면 그 주변이 반짝 살아난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일명 둥지 내몰림)’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도쿄는 그렇지 않은가.

-사실 도쿄 동쪽 지역은 역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려고 한 사례다. 아트 이스트 쪽은 오르긴 올랐지만 떠나야 할 정도 대단하진 않은 상태다. 과하게 임대료를 올리면 굳이 그 돈으로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을 건물주들이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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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관심은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 현재 R부동산은 전국 10개 지역으로 확대 전개하고 있다. 일본의 빈집은 1000만 세대에 가까울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각 지역 R부동산을 기반으로 ‘지역 재생’ 사업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지방의 빈집을 개조해 도심 거주자들의 세컨드 하우스(별장)로 임대를 놓은 ‘트라이얼 스테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부자들만 갖는 호화로운 세컨드 하우스가 아니라, 힐링하기 위해 가끔 갈 수 있는 작은 면적의 세컨드 하우스 개념이다.




Q : 지역 재생을 위해 ‘세컨드 하우스’를 떠올렸다.

-도쿄 도심부에서 약 1시간 떨어진 해안가인 보소 지역에 놀러 갔다가 이런 곳에서 서핑하면서 잠시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각 지역에 놀고 있는 빈집을 활용해 그 지역을 활성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더했다. 인구 감소 지역의 인구를 늘리려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정기적으로 가는 인구를 늘리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최근 일본에선 이런 ‘관계 인구’에 관심이 높다. 관광객 이상 정주자 미만 인구다. ‘눌러살 마음 없으면 오지 마’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지역에 계속 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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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앞으로는 어떤 그림을 그리나



-사람들의 공간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패션이나 음악을 즐기는 것처럼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공간의 편집권이 생산자에게 있었다면, 앞으로는 사용자로 넘어가지 않을까. 명품 브랜드와 SPA 브랜드를 적절히 편집해 나만의 패션 스타일을 만들 듯, 공간도 자신이 원하는 조명·천장·바닥재 등을 골라 편집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건축 자재 쇼핑몰인 ‘툴 박스’를 시작한 이유다. 툴 박스에서는 단순한 자재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천장 부분 시공, 벽 만들기 같은 가벼운 리노베이션 서비스도 진행한다. 궁극적으로는 신축도 편집하도록 만들고 싶다. 사람들이 너무 비슷한 평면 구조에 사는데, 무의식적으로 라이프스타일도 규격화되는 것 같다. 내가 사는 공간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을 만들고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역할이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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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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