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아내 이전에 여성운동가 이희호···첫 캠페인 "혼인신고 합시다"

[트렌드]by 중앙일보

"여성 인권운동의 중심에 이희호 여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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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생경하던 1940년대, 이희호 여사는 당시의 현실에 분개한 1세대 여성운동가였다. 그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려(伴侶, 동반자)이기 이전에 후대로부터 “이 나라 여성인권 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 여사가 있었다”(『이희호 평전』, 고명섭)는 존경을 받는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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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범대 재학시절, 그의 별명은 독일어 중성 관사인 ‘다스’(das)였다. 당시 기준으로 따졌을 때 이 여사의 행동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일화 중 하나.

한 모임에서 남학생들은 서양 문물이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데, 동석했던 여학생들은 마냥 수줍어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를 본 이 여사는 후배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라”고 하는 동시에, 가게 사장에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는 음료수도 따로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는 1940년대 중반, 일제로부터 갓 독립했을 무렵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의 교리가 아직 남아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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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사가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나선 것은 1951년이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전쟁이라는 폭력적 상황에 노출된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선 ‘대한여자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 그는 전쟁에 희생된 군인과 경찰의 유가족을 돕는 일을 주로 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이 여사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한 뒤 남녀차별 문제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기 시작했다. 1954년부터 58년까지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1959년 귀국해선 대한YWCA연합회 총무를 맡았다. 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 운동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가 제안한 첫 캠페인이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뒤에 첩으로 들어온 여자 때문에 본처가 쫓겨나는 일도 허다했다. ‘축첩 자(첩을 둔 남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는 캠페인도 벌였다.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 같은 문구를 써 거리 행진을 하기도 했다. 일부일처제가 여성의 인권 신장에 도움이 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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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부터는 그가 창립한 여성문제연구원의 2대 회장을 맡아 남녀차별 법 조항 철폐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시작한 운동은 1989년 모계ㆍ부계 혈족을 모두 8촌까지 인정하도록 하는 등의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때 국회에서 법 개정을 이끈 이가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였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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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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