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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여섯 평 매장 빌려드립니다, 와서 실험하세요

by중앙일보

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③

‘프로젝트 렌트’ 최원석 대표


“여기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서울 뚝섬역 근처 한가로운 길을 걷다 보면 약 6평 남짓의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날은 가죽 제품을 판매하는 공방이, 어떤 날은 반려동물용품을 판매하는 브랜드가 들어와 있다. 또 가끔은 토종 볍씨가 매장을 가득 메우는 독특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또 한 번은 미래의 평양에 생길법한 슈퍼마켓이라는 희한한 콘셉트의 팝업 스토어가 열린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프로젝트 렌트.’ 브랜드컨설팅 전문 기업 ‘필라멘트앤코’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임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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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작은 상자 같은 프로젝트 렌트 매장. 주 단위로 공간을 빌려 브랜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 마케팅 플랫폼이다. [사진 필라멘트앤코]

월 단위도 아닌, 주 단위로 공간을 빌려주고 브랜드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가끔은 필라멘트앤코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담는다. 이를테면 뜬금없이 ‘맛있는 밥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최원석 대표가 토종 벼를 주제로 토종 볍씨부터 우리 쌀 브랜드, 짚으로 만든 물건 등을 전시한다. 최 대표는 이곳을 “작은 브랜드의 의미 있는 이야기를 알리는 공간”이라고 정의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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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1일 성수동 사무실에서 최원석 필라멘트앤코 대표를 만났다. 최정동 기자

최원석 대표는 LG 전자에서 이동 통신 디자인을, 현대카드에서 브랜드 개발을 했다. 디자인과 상품기획, 마케팅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컨설팅 전문가다. 5년 전 브랜드컨설팅 회사 필라멘트앤코를 만들고 ‘모던눌랑’‘카페뎀셀브즈’‘쉐프찬’ 등 외식 브랜드 컨설팅부터 입 병 치료제 ‘아프니벤큐’, 숙취해소제 ‘레디큐’ 전략 개발 및 브랜드 개발 등을 담당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

최 대표가 ‘프로젝트 렌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지난해 초,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50여 평의 비어있는 건물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공사가 예정되어 있어 그야말로 ‘공실’ 이었던 이곳에 22일간 한남동 ‘아러바우트 커피’와 부천 독립출판서점 ‘5키로북스’가 입점한 복합문화 공간을 운영했다. 가치 있는 브랜드와 콘텐트를 선별해 보여준다는 오프라인 매거진을 콘셉트로, 마치 잡지처럼 좋은 브랜드를 선별해 그들의 이야기를 공간에 풀어놓았다. 노출된 콘크리트를 그대로 살리고 나무판자로 간이 테이블로 만들었지만 22일간 무려 1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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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렌트의 첫번째 프로젝트, 22days. 아러바우트 커피와 오키로북스의 책들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사진 필라멘트앤코]

소규모 브랜드라면 이곳을 테스트 매장으로 활용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브랜드를 알리는 마케팅 플랫폼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비어 있는 기간을 활용하기에 건물주로서도 손해 볼 일은 없다. 오히려 좋은 공간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상권이 활성화되고, 이는 건물 가치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오프라인 공간을 판매가 아니라, 마케팅 플랫폼으로 활용한다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최 대표는 “사람들이 실제로 좋아하는 콘텐츠는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 냄새가 안 나는, 소위 말해 돈 냄새가 안 나는 콘텐트”라며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등 서울의 이름값 높은 거리가 요즘 들어 재미없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 매장만 즐비한 거리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긴 어렵다는 얘기다. 프로젝트 렌트는 사람들이 실제로 좋아할 만한 볼거리 있는 콘텐트를 오프라인 공간에 풀어 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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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테이블로 만든 간이 테이블과 드럼통으로 꾸민 실내. 22일 간 무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사진 필라멘트앤코]

본래 프로젝트 렌트의 취지는 임대와 임대 사이 2~3개월 정도 비는 건물을 단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건물과 적당한 임대 시기 등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아예 프로젝트 렌트만의 공간을 내기로 결심한 이유다. 성수동 뚝섬역 작은 매장이 바로 프로젝트 렌트 1호점이다.

작은 브랜드를 위한 실험실을 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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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 브랜드 '프렐류드 스튜디오'가 프로젝트 렌트에 꾸린 팝업 매장. [사진 필라멘트앤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좋은 콘텐트나 마케팅 파워를 지닌 여러 소규모 브랜드가 렌트 프로젝트의 문을 두드렸다. 반려동물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호라이즌앤코’, 업사이클 가방 브랜드 ‘씨랜드’, 문구 브랜드 ‘프렐류드스튜디오’ 등이다. 현재 성수 1호점은 2~3주 정도 주기로 벌써 10월까지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황이다. 성수동에 또 다른 프로젝트 렌트 2호점 공간을 준비하는 이유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도 프로젝트 렌트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 들어서는 복합문화공간 ‘B4291’을 필라멘트앤코가 컨설팅하면서 같은 건물에 프로젝트 렌트 매장을 하나 더 낸다. 앞으로 부산의 재미있는 브랜드를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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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자갈치 시장에 들어서는 복합문화공간 'B4291'의 오프닝 행사를 알리는 오징어 초대장. [사진 필라멘트앤코]

최원석 대표의 필라멘트앤코의 자체 기획도 이어진다. 지난해 5월 열린 ‘평양 슈퍼마케트’ 팝업 스토어가 대표적이다. 통일 후 북한에 생길 수 있는 슈퍼마켓을 모티브로 만든, 2016년 5월 27일 열렸던 ‘통일문화박람회’에서 통일부와 함께 만들었던 ‘평양커피’의 확대판이다. 당시 통일에 대해 어렵고, 무섭게 생각하던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보고자 남북이 공통으로 즐길 수 있는 ‘커피’를 테마로 광화문 광장에서 팝업 스토어를 꾸며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성수동 프로젝트 렌트에서 열린 ‘평양 슈퍼마케트’에서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등장할 법한 파스텔톤 색감의 북한 슈퍼마켓 물건들을 전시 판매했다. 진짜 북한 슈퍼마켓에서 파는 물건이 아닌, 새터민이 직접 만든 북한식 수제 과자 ‘손가락 과자’, 수제 사탕 ‘불알캔디, 딱친구캔디’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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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평양의 슈퍼마켓'이라는 참신한 주제를 담은 팝업 매장, '평양 슈퍼마케트.' [사진 필라멘트앤코]

기획 좋은 오프라인 매장은 보석

지금 같은 온라인 시대에 왜 오프라인 매장일까. 최원석 대표는 “지금은 오프라인이 신기한 시대”라고 말한다. 온라인이 워낙 활성화되어 있어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신기한 걸 하면 더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 대표는 “온라인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유통의 측면에서는 온라인 전략이 필요하지만, 브랜드를 알리고 그 브랜드만의 콘텐트를 보여줄 때는 오프라인이 훨씬 유리하고 무엇보다 쉽다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공간은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가서 소문을 내준다. 게다가 여전히 사람들은 직접 만져보고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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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토종 벼를 알릴 목적으로 만든 팝업 매장. 직접 만져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필라멘트앤코]

온라인을 호령하는 ‘아마존’이 ‘아마존북스’라는 오프라인 매장을, 국내 온라인 패션 쇼핑몰 ‘무신사’는 ‘무신사 테라스’라는 오프라인 공간을 냈다. 최원석 대표는 “앞으로 오프라인 매장이 마케팅 도구로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만 본질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그저 근사한 공간, 멋진 인테리어가 아닌 공간을 채우는 좋은 콘텐트가 필요하다. 그 콘텐트로 사람들에게 어떤 핵심 가치를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 이왕이면 그 가치를 즐겁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프로젝트 렌트는 인테리어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근사한 마블 패턴 대리석 상판도 없고, 비싼 디자이너 조명도 없다. 빈 상자 같은 매장을 최소한으로 꾸미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콘텐트로 꽉꽉 채운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만으로 테스트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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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프로젝트 렌트에서 5월 열린 '평양 슈퍼마케트' 팝업 전경. [사진 필라멘트앤코]

최원석 대표는 “어떤 프로젝트를 앞두고 ‘그걸 왜 하지?’라는 질문을 단계마다 최소 3번을 해보고 답이 나와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며 “목적이 합의되면 이에 맞는 디자인이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만큼 해당 공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가치와 서비스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몰두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정해지고 합의되면 그다음은 쉽다. 공간은 콘텐트를 담기 위해 존재한다. 프로젝트 렌트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