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발견] 여왕은 왜 드레스를 벗어던졌나···레깅스 입은 겨울왕국 엘사

[컬처]by 중앙일보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일하는 여자는 바지가 필요해, 여왕이라도


국내서만 600만 관객을 넘어서며 강력한 마법으로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겨울왕국 2’. 한층 성숙한 엘사와 안나 자매가 아렌델 왕국의 ‘비밀’까지 파헤치는 모험과 성장 이야기다. 5년 전 1편보다 업그레이드된 컴퓨터그래픽(CG)과 상상력의 스케일이 103분간 눈과 귀를 홀려놓는다. 영화가 끝난 뒤엔 다채롭고 현란해진 굿즈(goods‧기획상품)들이 ‘엄빠’의 지갑을 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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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엘사는 의상까지 새로 선보였다. 1편에서 ‘렛 잇 고’를 부를 땐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로열 웨딩 베일을 연상시키는 길다란 은빛 망토로 신비한 여왕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번엔 푸르스름한 은빛은 그대로지만 발목 위로 짤막해진 방한용 망토를 둘렀다. 특히 ‘사소한 발견’에겐 북쪽 탐험에 나선 엘사가 집채만한 파도에 뛰어들기 직전 망토를 벗었을 때 화면 포커스가 흥미로왔다. 살랑거리는 원피스 아래 발목까지 덮는 ‘레깅스’를 또렷이 보여준다. 엘사는 그 차림으로 절벽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물의 말(water horse)’도 탄다. 한마디로 ‘일’을 한다.



"엘사가 위험에 맞설 실용적인 옷"


“마법의 숲은 엘사‧안나 자매에게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바닥까지 닿는 드레스보단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의상이 필요했다. 실용적인 옷이어야 했고 바지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겨울왕국 2’ 홍보를 위해 내한했던 크리스 벅, 제니퍼 리 감독 등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비주얼 아티스트 브리트니 리 역시 외신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인을 할 땐 모두 (캐릭터 작업과) 함께 이뤄졌다. ‘이걸 입을까 말까’ 질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때 이 순간 소녀라면 어떤 게 맞지?’ 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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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가 겨울왕국에 은둔해 있는 게 아니라 모험을 떠나기에 그에 맞는 옷차림이 필요했단 얘기다. 그 모험이란 예전의 백설공주나 라푼젤이라면 하지 않았을 하이킹, 클라이밍, 승마를 포함한다. 모두 ‘바지’가 필요한 활동들이다. 아랍풍 판탈롱을 선보인 ‘알라딘’(1992)의 자스민이나 전장에 나섰던 ‘뮬란’(1998)이 그랬듯이. 공주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그런 건 ‘속임수’란 건 겨울왕국 1편이 보여줬다) 자신의 일을 할 땐 바지가 필요하다.



1993년에야 미 상원 '여성 바지' 허용


“실험적인 1960‧70년대가 되어서야 여성 패션의 분수령이 찾아왔다. 이브 생로랑은 여성들이 어디에서나 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길을 닦은 데 대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드레스를 입을 자리에 턱시도를 입고 간다거나, 여성들이 사파리 수트를 입는다거나 등의 선례를 만들었다.”


최근 허핑턴포스트가 인용한 뉴욕 패션기술대학교의 박물관 코스튬 큐레이터 엠마 매클렌던의 말이다. 요즘 여성 바지 정장의 선구자였던 ‘파워 슈트’가 이즈음 등장했다. 불과 50~60년 전까지 '바지 입은 여자'가 서구에서도 일상적이지 않았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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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여성 바지 정장 패션의 원형을 보여준 파워 슈트. [사진 네이버백과사전]

심지어 미국 연방 상원 회의 때 여성 의원은 스커트 차림이어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다. 이를 깨뜨린 게 1987년부터 30년간 여성으로서 최장 의원을 지낸 바버라 미컬스키(민주당)다. 그는 은퇴 전 미국 언론과 인터뷰 때 “1993년 어느날 나와 또 다른 여성 의원이 작심하고 바지 차림으로 상원에 나갔다. 남자들이 아무 말도 못 했고 그 뒤로 모든 게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현란한 바지 패션도 이 덕에 가능해졌다.


여자 바지의 시작은 1850년대 ‘블루머’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블루머(bloomers)란 무릎 위나 아래 길이의 품이 넓은 바지에 고무줄을 넣어 잡아매도록 한, 요즘의 ‘몸빼 바지’ 비슷한 모양새다. 1851년 엘리자베스 스미스 밀러라는 여성이 ‘터키 드레스’ 즉 통 넓은 하렘 팬츠를 본떠 제안했다. 같은 해 여성인권 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이 제안대로 바지를 만든 뒤 이를 본인이 발행하는 잡지를 통해 널리 알렸다. ‘블루머’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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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미국에 여성복의 일종으로 등장한 블루머.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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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디자이너 폴 푸아레가 제안한 하렘 팬츠. '블루머'를 일상화시키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코르셋' 벗고 스포츠용 바지 입기 시작


처음부터 블루머가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당시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속에 틀을 잡아 열기구처럼 부풀린 드레스를 입었다. 당연히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그러던 중 남북전쟁(1861~65년)이 발발하고 전장의 간호사들에게 편한 차림이 요구되면서 블루머가 퍼져갔다. 이후 여성들이 자전거‧승마‧수영 등 ‘스포츠’를 할 때 블루머를 입기 시작했다. 이 블루머가 좀 더 짧아지고 요즘 식의 바지 모양이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탈코르셋' 운동의 시작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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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는 영화 시사회에 당시로선 용감하게 바지 정장을 입고 갔던 혁신적 여성이었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만들어 주었다. 사진은 디트리히가 미군들을 위문 방문했을 때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옷은 처음에 기능미로 출발했다가 장식미로 진화한다. 예전엔 여자의 바지란 게 특별한 직업을 가졌을 때, 예컨대 경찰관 제복 같은 개념이었다면 요즘은 퍼스트레이디도 치마 대신 바지를 즐겨 입는다. 패션 아이템으로서 치마‧바지 구분보다 어떤 게 그 활동과 멋에 맞는가를 따질 뿐이다.”


패션디자이너 간호섭 홍익대 교수가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 말이다. 그 자신도 요즘 패션 비즈니스 때 “치마는 전혀 안 팔리고 바지만 팔린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예전엔 치마 밑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 개념이었던 레깅스가 이젠 버젓이 바지처럼 ‘일상 룩’이 돼간다. 운동복과 일상복의 경계를 허문 애슬레저룩에서 레깅스는 대표주자로 꼽힌다. 미국의 2017년 레깅스 수입량은 2억 장을 넘겨 사상 처음으로 청바지 수입량을 제쳤다고 한다. '레깅스 시구'로 삽시간에 스타가 되는 일도 "옛날엔 별일이 다 있었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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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엘사처럼 입고 싶어!” '겨울왕국2'를 보고 난 딸아이가 이렇게 조를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게 이번엔 엘사가 드레스 밑에 레깅스를 입었다. 한층 안전하고 편안하게 구르고 뛸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알려주자. 현대의 공주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일’을 한다.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고 지키고, 때로는 적들과 싸우고 협력하기 위해 엘사도 바지 차림으로 뛰고 달린다. 지난해 미국 여성복 상점 앤 테일러는 '바지는 힘(권력)이다(Pants Are Power)'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엘사처럼, 딸들아 힘내라.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 사소한 발견(사발)


문화 콘텐츠에서 사소한 발견을 통해 흥미로운 유래와 역사, 관련 정보를 캐고 담는 '사발'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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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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