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빵』 백희나 “트라우마 깊어서 큰상 받고도 겁만 났다”

[컬처]by 중앙일보

아동문학 노벨상 린드그렌상 수상

심사위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

백 작가, 저작권 소송 대법에 상고

“스웨덴 세금서 준 상금 좋은데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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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좋은 일이 별로 없었다. 바닥까지 갔구나 싶었는데 더 깊은 바닥이 나왔고, 다시 일어나도 끝없이 주저앉혀졌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ALMA)’을 받은 『구름빵』 작가 백희나(49)씨가 1일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ALMA을 받고도 백 작가는 “기쁜 일인데 기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스웨덴 정부가 2002년 제정한 ALMA는 아동문학계에서 최고 권위의 상 중 하나로, 상금이 500만 크로나(약 6억원)다.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타계한 해에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백 작가는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이 상을 받았다. ALMA 선정 위원회는 “언어, 출판 국가, 수상 실적, 판매 부수 등은 상관이 없다. 린드그렌의 아이들을 위한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밝히고 있다. 올해는 67개국에서 240명이 후보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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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삐삐’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기리는 문학상의 홈페이지. [홈페이지 캡처]

ALMA 심사위원회는 “백 작가는 소재, 생김새, 몸동작에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쓸쓸함과 화합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고 찬사를 보냈다. 또 “그의 기분좋은 미니어처 세계에선 구름빵과 달 샤베트, 동물들, 목욕탕 요정과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그의 작품은 경이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이며, 감각적이고 아찔하며 예리하다”고 했다. 백 작가가 종이 인형과 종이 장난감을 소재로 활용하는 점도 강조했다. “백 작가의 기법은 팝업북뿐 아니라 종이라는 오랜 전통과도 연결된다. 고도로 독창적인 기법과 예술적인 해법으로 이 장르를 개발하고 재탄생시켰다.”


백 작가가 출판한 13권의 그림책 가운데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구름빵』(2004)은 엄마가 구름을 넣어 구워준 구름빵을 고양이 남매가 먹고 두둥실 떠올라 아침을 거른 아빠를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이후 TV 시리즈와 뮤지컬로 제작되고 굿즈도 나오면서 문화상품으로 발전했다. 『구름빵』으로 200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선정됐다.


하지만 백 작가는 당시 한솔교육과의 계약에서 저작재산권 일체를 양도하기로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는 이유로 구름빵으로 인해 저작권료와 지원금 총 1850만원을 받았다. 구름빵 콘텐트의 부가가치는 4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됐지만 한솔 측은 “실제 매출은 약 20억원이며 무명작가였던 백 작가를 발굴해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를 했다”고 항변했다. 백작가는 출판사와 애니메이션 등 2차 콘텐트 생산자들을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10월 1심, 올 1월 2심에서 패소했다. 서울고등법원은 판결문에서 “작가가 계약에서 저작재산권 일체를 양도했으며 계약이 체결된 2003년 당시 백 작가가 신인 작가였던 점을 고려하면 저작물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위험을 적절히 분담하려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작가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백 작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보겠다”라며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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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이후 한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 하던 백 작가는 1인 출판사를 차리고 2011년에야 새로운 책 『달 샤베트』를 냈다. 하지만 곧 ‘달 샤벳’이라는 이름으로 걸그룹을 데뷔시킨 기획사와 싸워야 했다. 몇번의 조정이 오갔지만 결렬되고 걸그룹은 그대로 활동 중이다. “법과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위한 문학인데 그걸 이용하고 법으로 처리하자는 데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동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엄청난 좌절과 실망을 겪었다.”


백 작가가 “ALMA 수상 소식을 듣고도 기쁠 수 없었다”고 한 이유다. 그는 “돈보다 중요했던 것은 작가의 권리다”라고 했다. “데뷔작이었던 구름빵이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2차 콘텐트로 찢겨나가는 것을 봐야 했다. 지금 구름빵을 동남아에서 쓰려면 중국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계약이 복잡해졌는데 나는 데뷔 이래로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는 “이번 수상도 작가에게 주는 것이지만, ‘구름빵이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나에게 또다시 상처가 되는 쪽으로 작동하지 않을지 겁부터 났다”며 “작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상금은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말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큰돈을 줄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스웨덴 국민의 세금으로 상금을 조성한 것이라고 했다. 스웨덴 국민이 세상에 주는 상이라고 한다.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문학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백 작가는 “대한민국에서는 작가로서 권리가 보잘것없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세금으로 상금을 받은 일의 상징성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상의 의미를 정말 잘 보고 싶다면 스웨덴과 우리나라에서 아동과 아동 문학을 보는 시각의 차이부터 봐야 한다.”


앞서 스웨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백 작가는 “믿어지지 않는다. 매우 놀랍고 행복하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이라 생각하며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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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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