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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병자호란 때 끌려간
10살 소녀 살린 ‘윤 씨 가문 족보’

by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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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자란 남매. 오빠 남이(박해일 분)는 유일한 피붙이인 여동생 자인(문채원 분)의 행복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우여곡절 끝에 누이동생이 멋진 신랑감 서군(김무열 분)과 백년가약을 맺게 된 날. 그 행복이 넘치는 순간을 무참히 깨버린 청나라 군대의 습격. 잔칫집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고, 신랑 신부는 포로로 붙잡혀가고 말죠. 영화《최종병기 활》(2011) 이야기입니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치욕과 상처를 남기죠. 수많은 죄 없는 백성이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가 청나라에 군대에 잡혀 포로로 끌려갑니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납치한 조선의 백성은 '돈'이 되는 전리품이었습니다.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죠. 이 몸값을 속가(贖價)라고 했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해 종실이나 양반가의 부녀를 앞다퉈 잡아가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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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영화 ‘최종병기 활’(2011)의 한 장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그렇게 끌려가던 백성들이 의주 땅에 이르러 이제는 다시 못 보게 될지도 모를 고향 산천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무이~" "우리 아부지 제사는 누가 지내노…" 그 두려움, 그 고통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지쳐 쓰러져 숨이 끊어진 시신이 들판에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누구 하나 수습해서 묻어줄 수조차 없었던 가볍고도 덧없는 죽음들. 영화는 그 쓰라린 역사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9살 소년 윤증의 가문에 닥친 비극

조선 후기의 대학자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에게도 한 살 위인 누이가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당시 8살이었던 윤증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갑니다. 이때 윤증의 집안에 변고가 생깁니다. 청나라 군대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증의 아버지가 가족과 벗들 몰래 도망쳐서 혼자 목숨을 부지한 겁니다. 급기야 윤증의 어머니는 적에게 붙잡혀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스스로 목을 매고 맙니다. 9살 아들과 10살짜리 딸을 남겨둔 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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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윤증의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난리통에 윤증의 누이가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간 겁니다. 당시 청나라 군사들은 특히 여자들을 보이는 족족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함락된 강화도를 탈출하지 못하고 있던 윤증의 누이도 결국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고 말죠. 영화에서 가슴 아프게 묘사한 것처럼 고작 10살밖에 안 된 윤증의 누이도 그렇게 청나라로 돌아가는 군사들에 의해 의주 땅으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의주에서 노비 생활을 하던 윤증의 누이 앞에 암행어사가 나타난 겁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1639년 인조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합니다. 이때 의주 지역으로 파견된 사람은 이시매(李時楳, 1603~1667)라는 인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습니다. 윤증의 누이는 암행어사를 찾아가 품안에 고이 간직했던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보여줍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네가 실로 윤 씨 가문의 여식이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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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찬 ‘보물탐뎡’ (김영사, 2019)

땟물이 줄줄 흐르는 노비가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이의 딸자식이란 사실을 확인한 이시매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보다 더 기구하고 극적인 사연이 또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최근에 출간된 《보물탐뎡》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고문헌 수집가의 흥미진진한 보물 추적기를 읽다가 '한국인도 몰랐던 족보의 진실을 파헤치다'라는 장에서 이 이야기를 만나게 된 거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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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년에 6권 3책으로 간행된 ‘명재연보 明齋年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 이 극적인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윤증의 일생을 연도별로 정리한 《명재연보 明齋年譜》라는 책이었습니다. 문인들이 정리한 초본(草本)을 후손이 가다듬고 보완해서 1732년(영조 8)에 6권 3책으로 펴내죠. 이 연보를 포함해서 윤증의 시문을 모아 전집으로 간행한 《명재유고》를 한국고전번역원이 2008년에 번역해서 《국역 명재유고》12권을 간행합니다. 이 전집의 제12권에 연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럼 원문을 읽어볼까요.

어지러운 군중(軍中)에 들어가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족보를 기록한 소첩(小帖)을 꺼내 자씨에게 주며 말하기를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시오."하였다. 오랑캐 진영으로 나가게 되면서 마침내 서로 헤어졌는데, 누이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첩을 펼쳐 보이며 하소연하니,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알아보고 속환(贖還)하였다. 선생이 어린 나이였는데도 긴급한 상황에 처하여 변고를 우려한 것이 이토록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한 9살 소년 윤증이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족보를 기록한 작은 책자를 꺼내 누이에게 건넵니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라"고 말하죠. 그 시절에 10살 여자아이가 난리통에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족보' 말고 또 있을까요. 그래서 윤증은 자기가 갖고 있던 걸 굳이 누이에게 준 겁니다. 그리고 그 휴대용 족보가 미아 신세가 된 누이를 구하게 되죠.

환향녀의 역사에 담긴 시대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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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족보가 뭉텅이로 폐지상에게 팔려나가는 시대가 됐지만, 조선시대에 지체 있는 가문에선 족보를 외우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는 족보 외우기가 실제로 10살 소녀를 살려낸 것이고요.《보물탐뎡》의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명재연보》를 찾아 읽으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남의 나라 군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돌아온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조국과 가족은 그들을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아버지의 배신과 어머니의 자결, 누이의 실종으로 점철된 윤증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기록한《명재연보》의 행간에서 저는 한 시대의 비극을 읽었습니다. 그런 아픔과 부끄러움이 깃든 역사까지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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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연보’가 수록된 ‘국역 명재유고’ (한국고전번역원, 2008)

김석 기자 (stone21@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