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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시대의 잔혹동화

by경향신문

“사린아. 오늘 제사래, 내가 빨리 가서 도와줄게. 먼저 하고 있어. 응?”

 

“구영아. 나는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내가 너를 돕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니?”

 

“어? 어… 그런가?”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민사린’이라는 여성의 결혼 생활을 다룬 웹툰 <며느라기>가 인기다. 지난 5월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페북)과 인스타그램(인스타)을 통해 연재됐으며, 현재 팔로워는 각각 20만, 10만 정도다.

‘82년생 김지영’의 또 다른 얼굴…민사린

제목만 보면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자극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웹툰은 의외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펼쳐간다. 작가 특유의 그림체는 귀엽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시부모님의 생신을 챙기고, 시댁의 제사를 준비하는 주인공의 ‘착하고 예의 바르며 평범한’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든다. 특히 1980년대생 여성들의 공감이 크다는 점에서 화제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 30대 중후반에서 20대 후반에 걸쳐있는 1980년대생 여성들은 전체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교적 기존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전통적인 가족의 영역에 발을 들인 뒤엔 ‘여자니까’ 참아야 하는 갖가지 일에 현실적으로 당면한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여자’라서 겪는 불평등은 빈번했지만, 가족 안에서의 불평등은 손 아랫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예의바름, 착함이라는 덕목과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결합한다는 점에서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된다.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독자들은 웹툰 <며느라기>가 평범한 여자들이 느끼는 미묘하고 불합리한 문제를 담담한 그림체와 스토리로 담아낸다고 평가했다.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소소한 차별들은 이제 갓 시집온 며느리가 ‘무례’하게 지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민사린이 느끼는 답답함에 공감했다.

 

결혼 2년 차 직장인 박은정(30·가명)씨는 <며느라기>의 열혈 독자다. 그는 “웹툰엔 아주 평범한 남자와 여자, 크게 나쁘지 않은 시댁 식구들이 나오는데 그 일상들 사이에 수많은 불합리와 불평등이 있다. 윗세대가 보기에 ‘우리 땐 그거보다 더했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으나 1980년대에 태어나서 자란 여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평등’이 아주 잘 묘사돼있어 좋다”고 말했다.

 

웹툰은 무언가를 주장하고 바꾸려 한다기보다 흘러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던져준다. 박씨는 특히 시어머니가 무의식중에 며느리에게 하는 행동들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웹툰 중 한 장면에 아침 일찍 일어난 민사린이 시어머니 생일상을 차린 뒤 후식으로 사과를 내오는 장면이 나온다. 며느리가 과일을 깎고 남은 일을 하는 동안 시부모님과 시동생, 남편은 식탁에 앉아 과일을 먹어버리고 사과는 몇쪽만이 남는다. 뒤늦게 식탁에 앉은 사린에게 시어머니는 음식 남기면 안되니 ‘너랑 나랑 먹어치우자’라고 말한다.

 

박씨는 “가족들에게 귀한 걸 다 내어주고 잔반처리를 하던 자신의 옛 경험들을 생각하고, 무의식중에 며느리에게도 그 역할을 전수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주변에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시어머니가 ‘옆집 누구는 며느리가 의사라서 뭐 해줬다’, ‘누구는 며느리가 공무원이다’ 등등 며느리 경제력을 자랑한다. 변화된 시대를 따라서 며느리가 돈도 벌어주길 바라면서도 가정 내에서의 역할은 무의식중에 본인(시어머니)과 비슷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시부모가 많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좋은사람이고 싶은 욕망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며느라기’라는 시기가 있대. 시댁 식구한테 예쁨 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그런 시기. 보통 1~2년이면 끝나는데 사람에 따라 10년 넘게 걸리기도, 안 끝나기도 한다더라고.”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이상하게도 학교나 직장에선 할 말을 다 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라도 시댁과 관련된 일엔 쉽게 입을 열 수 없다. 결혼 1년 차 정지은(가명·29)씨는 <며느라기>를 보며 당당했던 민사린이 시댁에 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답답하면서도 공감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문제제기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시댁에 가면 먼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할 게 없는지 찾아보게 된다. 친정집에서는 전혀 안 하는 행동이라 어색하지만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고 말했다.

 

정씨는 “사실 이런 마음이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보통 젊은 여자들에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싹싹함이랄까. 그런 이미지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자 신입’과 ‘며느리’ 등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몇몇 이미지들이 있는데 이걸 거부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런 강박이 내 잘못일까라는 생각을 하면 억울하다는 느낌이다. 이미 사회에서 갖춰진 이미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질타하는 게 사회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며느라기>엔 기존의 가족 질서에서 기대하는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해 독자들에게 ‘사이다’로 불리는 민사린의 ‘큰 형님’이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은 민사린과 달리 시댁의 제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에게도 하지 않는 과도한 효도를 시부모에게 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그래서일까. 무구영의 동생이며 민사린의 시누이는 그를 ‘가족들도 포기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민사린은 실제 인물?

‘며느라기(@min4rin)’라는 계정으로 운영되는 SNS에서 연재되는 만화는 종종 실제 인물이 자신을 극화해서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줘 독자들에게 “이거 실화 아니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그러나 <며느라기>의 페북에 달린 ‘이 만화가 실화이든 아니든 더욱 충격받을 것 없이 이미 우리나라의 수많은 가정에서 ‘실화’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냥 대한민국의 며느리로서의 삶이 충격적인 거죠’라는 댓글은 실화 논쟁이 이야기의 진정성에 미치는 요인은 크지 않음을 알려준다.

 

일부 독자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며 주인공이 남편 무구영을 만나서는 안됐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똑똑했던 민사린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제대로 말도 못하는 ‘며느라기’가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웹툰에 등장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는 보통의 사람들일 뿐이다.

 

남편은 민사린을 이해하면서도 부모님께 차마 그동안의 습관을 고치라고 할 용기가 없다. 어쩌면 그런 필요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지나면 아내의 화가 풀릴 것이라 낙관할지도 모른다. 시어머니는 굳이 며느리를 부려먹을 생각이 없다. 다만, 집안의 제사 땐 여자가 일하는 게 맞고 본인도 평생 그렇게 살았다. 그들의 하루는 물 흐르듯 조용히 흘러간다.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생일날의 아침’, ‘제사 준비’에 고민에 빠지는 것은 민사린과 그녀를 지켜보는 여성들이다.

웹툰 ‘며느라기’, 여성이 겪는 이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