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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여행 음식과 ‘어른의 맛’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행의 맛이 아닌 ‘일상의 맛’

by경향신문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

음식을 통해 여행지와 그곳에서의 추억을 기억한다. 누구와 만났고, 함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여행 중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사진은 태국에서 맛본 팟타이(볶음쌀국수), 라이스샐러드, 레드 카레다. 김남희 제공

요리책 수집이 취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습관처럼 마지막 도시의 서점에서 요리책을 사고 만다. 음식을 만들기보다 요리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즐겁다. 음식에 관한 만화나 소설, 에세이도 가리지 않는다. <맛의 달인>이나 <고독한 미식가> 같은 고전부터 <어제 뭐 먹었어?>나 <노부나가의 셰프> 같은 비교적 최신작까지. 그러다보니 부작용도 따라온다. <심야식당>을 만화책으로 섭렵하고 드라마로 보던 무렵이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한 편을 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나는 부엌에 서 있었다.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새벽 두 시에 계란말이를 부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조금 섬뜩했다. 버터간장밥을 만들겠다고 밥을 안치지를 않나, 편의점에서 비엔나 소시지를 사와 문어 모양으로 자르지를 않나(그 무렵 나는 채식을 하고 있었다)새벽마다 기행을 일삼았다. 분야별로 신이 있다면 내 신전의 절대강자는 음식의 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음식의 신은 패배한 적이 없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밥을 퍼먹게 만드는 그 신을 나는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

 

모순적이게도 그런 내가 여행 중 가장 쉽게 포기하는 것은 음식이다. 늘 빠듯한 예산으로 다니다 보니 먹는 건 대충 때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도 녹초가 되어 지쳐 떨어진 날이나 집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한 그릇의 음식에 구원을 받기도 한다. 바닥을 모르는 탐욕에 빠지게도 만들고, 그토록 쉽게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신이라니. 음식의 신의 기묘함은 그뿐이 아니다.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

파키스탄 훈자 지역의 가정집 부엌. 가족들이 소박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언젠가 인도의 델리에서였다. 긴 여행을 막 시작한 터라 긴장과 외로움에 짓눌리고 있었다. 숙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려던 찰나, 키가 훌쩍 크고 눈이 동그란 친구가 다가오더니 앞자리에 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식사 하시는 동안 제가 앞에 있어 드릴게요.”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눈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그날따라 혼자 밥 먹는 일이 형벌 같았다는 걸 그 어린 친구는 어떻게 알아챘을까. 결국 우리는 밥을 먹다 말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음식의 신은 이렇게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매쟁이의 역할을 하면서도 제 존재는 슬쩍 뒤로 감추어버리는 배려를 보이기도 한다.

 

여행 중에 맛있게 먹은 음식을 떠올려보면 공통점이 있다. 음식 자체보다 누군가와 함께 먹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고, 자리의 분위기가 좋았다면 무엇을 먹었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부탄의 마을 여성들과 호숫가로 피크닉을 갔을 때 나뭇잎 접시에 손으로 슥슥 비벼가며 먹었던 고추치즈조림의 풍미도, 몽골에서 캠핑을 하다가 야생 부추를 뽑아와 장작불에 지져먹던 부추전의 그 진한 향도, 아이슬란드의 바닷가에서 벌벌 떨며 물개를 관찰하다가 찾아간 식당의 생선 수프 맛도 다정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다면적인 성격을 지닌 음식의 신이 궁금했던 것일까. 여행 중에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는 과카몰레를, 태국에서 팟타이와 쏨땀을, 스리랑카에서 코코넛 카레를, 모로코에서 쿠스쿠스와 타진을, 발리에서 나시고렝을, 크레타섬에서는 치즈튀김 같은 것을 배웠다. 음식의 신이 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낼 때면 그렇게 요리도 배우고, 요리책도 사 모으며 경배를 바쳤다.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불충한 신도로 돌변하기도 한다. 수십권의 요리책이 책장에 완벽한 보존상태로 꽂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

시리아에서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모습이 정겹다.

음식의 신을 위한 신전이 요즘만큼 광신도들로 가득 찼던 적이 있을까. 어디에나 만들고, 먹고, 평가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잘생긴 셰프들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화려한 음식을 만들어 바친다. 정성을 담아 만드는 음식을 이야기하다가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음식을 광고하는 모습에 어지럽기도 하다. 음식이나 요리를 다루는 프로가 많아질수록 허기가 진다. 자다가 깬 새벽의 공복감처럼 당혹스럽다.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의 첫 장을 읽는 순간 눈치챘다. 내 헛헛함을 채워줄 귀인을 만났음을. 빨리 다음 장을 읽고 싶다는 궁금증과 천천히 아껴가며 읽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삶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비싸고 귀한 음식을 찾아다닌 부자의 미식 탐색기도 아니고, 타인은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요리하지 않으면서 음식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는 평론가의 글도 아니다. 철과 때에 맞춰 소박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먹는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오랫동안 가족과 자신을 위해 요리해온 사람의 글이다. 긴 세월과 경험을 통해 발효되고 숙성된, 음식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긴 글. 땅에 발을 딱 붙인, 생활에 완전히 밀착된 글이었다. 그녀의 글은 격정적이면서 우아하고, 강렬하면서도 섬세하다. 위트도 넘친다. 예컨대 이런 부분. “절임 음식은 시시각각 변한다. 변덕이 심하다고도 볼 수 있다. 혹은 매일같이 새로운 길을 위해 매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제 자신을 꾸미고 있지만 사실은 감정 기복이 심하다. 그런 음식 중에서도 특히 격정을 머금고 있는 것이 김치다. … 고추, 마늘, 생강, 거기에다 멸치젓과 새우젓 등의 단백질까지…. 격정파가 한 데 모였으니 그 후에 극적 전개가 이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

그녀의 책 네 권을 연달아 읽은 한 주 동안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콩비지찌개와 여주볶음, 유부를 넣은 된장찌개와 와인에 조린 바지락찜 같은 것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절로 부엌에 서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다. 내가 건너가 보지 못한 강 저편은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가족을 위해 매일 밥을 지어야 하는 세계다. 아이를 낳은 후 그녀는 고백한다. “먹고 싶을 때 먹는 게 아니다. 매일 만드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에 전율했다. … 바로 지금 내가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작은 인간이 눈앞에 있다.” 그렇게 그녀의 세계는 달라진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음식에 대한 편견이 없다. 모든 음식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격렬한 호기심이 있을 뿐이다. 그 맹렬함으로 용맹정진한다. 홍탁 삼합을 먹겠다고 덤벼들다 막걸리의 변주에 매혹되고, 사냥꾼이 갓 잡아온 멧돼지의 간과 허파와 염통까지 탐닉하고, 물의 맛을 알아보겠다고 경수와 연수로 같은 음식을 만들어본다. 여성들끼리 스테이크 800g을 먹어치우는 내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선 경쟁자이긴 해도 그 먹는 모습에 실로 눈이 부시더라고 천연덕스레 말한다. 지구의 환경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고기를 먹는 횟수를 최소화하려는 나는 식재료에 대한 탐미의 위험성도 안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선입견 없는 열정이 부러울 뿐이다.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건 결국, 여

스리랑카의 시장에서 주민들이 채소를 살펴보고 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냄비 앞에 선 자만이 알 수 있는 흥분’을 느낀다. 서툰 솜씨로 지은 내 소박한 밥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손맛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챙겨야 할 식구가 없는 나에게 요리는 ‘내키면 한다’ 정도로 다가오는, 의무나 책임이 아닌 유희에 가깝다. 마음이 움직일 때 천천히 만들면 되니 즐거울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엄마와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물었다. “집에서 밥 먹는 날이 많아지니 뭐 해 먹지가 큰 고민인데 엄마는 어떻게 매일 삼남매의 도시락을 대여섯 개씩 쌌어?” 엄마는 북엇국에 밥을 말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는데 뭐.” 주부로서의, 엄마로서의, 아내로서의 고단함을 결코 내색하지 않던, 가난한 엄마의 의연함. 그 담담함이야말로 엄마의 맛일 것이다. 내킬 때나 호들갑을 떨며 이 나라 저 나라의 이국적인 요리를 찔러보는 내 음식의 맛이 어딘가 붕 떠서 가볍게 출렁이는 맛이라면 엄마의 맛은 깊이 가라앉은 잔잔한 맛일 것이다. 도망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길고 반복적인 이타적 노동이 강제해온 덤덤한 맛.

 

결국 ‘어른의 맛’은 일상의 맛이 아닐까. 잔뜩 힘을 준 사치스러운 음식이 아니라 소박하나 끈질긴 일상의 음식을 만들어가는 일이 ‘어른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겨울 아침, 된장국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소고기감자조림. 몇 번이나 다시 끓여 귀퉁이가 으스러지기 시작한 가지조림. 또는 날짜를 거듭할수록 시큼함이 두드러지는 배추절임…. 내 몸 밑바닥에 돌비늘처럼 퇴적해 있는 것은 오히려 딱히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일상에 묻혀 있는 맛들이 아닐까. 나날이 반복되는 맛은 고집이 세서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일의 본질은 생명을 취해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타인의 생명이든 자신의 생명이든. 죽는 날까지 반복될 그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고집 센 나만의 맛이 생겨날 것이다.

 

김남희 | 도보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