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전 국민이 보는 드라마,
사회적 역할이 중요”

by경향신문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누나’ 안판석 감독

긴 호흡의 드라마 사라지고 예능화 …제작 환경은 되레 척박해져

사랑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사회를 그린 것 …평범한 얘기에 관심

“전 국민이 보는 드라마, 사회적 역

“전 국민이 유일하게 향유하는 거의 유일한 예술이 드라마다. 대중에게 친근한 장르다. 드라마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사랑은 무엇인지 얘기하고 싶다. 드라마를 좀 더 소중히 다뤄주면 좋겠다.”

 

지난달 열린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기자회견에서 안판석 감독(57)이 한 말이다. 한 해에 만들어지는 드라마만도 수백편에 이른다. 여러 기자회견을 다녀봐도 이처럼 간절한 말로 ‘드라마’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연출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얀거탑> <밀회>의 감독이라는 이력을 넘어서 그가 생각하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드라마 종영 3일째인 지난 22일 휴식기에 들어선 안 감독을 서울 상암동 드라마하우스에서 만났다.

“예능처럼 변한 드라마, 척박해진 환경 안타까워”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 <죄와 벌>을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종로서적’이나 ‘동화서적’에서 책을 읽었다. 폐점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한 시간 더 영업하는 ‘양우당’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또 책을 읽다 집으로 갔다. 꽤 피곤한 일과였을 것이다. 전날 독서 때문에 학교에 가면 엎드려 자다 보니 고등학교 내내 별명이 ‘잠판석’이었다. 1987년 방송국에 입사했다. 이후 30년 넘는 세월 드라마를 만들었다. <베스트극장 - 사랑의 인사>로 ‘입봉’해 <짝> <아줌마> <아내의 자격> 등을 연출했다. 문학 소년의 변절일까? 안 감독은 문학처럼, 드라마도 인간의 고통을 보듬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외로워할 때, 문학만이 유일하게 말을 걸어준다. 영화와 드라마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일 년에 몇 번이나 극장에 가고, 소설책을 사겠나. 드라마는 대중에 가장 가까이 있다. 사람들의 감정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소중한 장르다. 드라마가 사회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안 감독은 인간의 삶과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을 여러 드라마에 차분히 녹여냈다. 교수 남편으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허례허식과 평범한 주부의 홀로서기를 보여준 드라마 <아줌마>(2000~2001)가 대표적이다. ‘불륜’을 소재로 끌어들였지만 주인공 오삼숙(원미경)의 성장을 더 부각했다. 오삼숙은 남편 장진구(강석우)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라 ‘호주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독립적인 인간으로 변모한다. 코믹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밀회> <아내의 자격>도 단순한 불륜물이라 취급할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줬다.

 

긴 호흡으로 삶과 사회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이 꽤 복잡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센 자극을 주는 콘텐츠가 인기다. 16부 혹은 50부작 드라마가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계된 드라마 구성 문법은 이제 변했다. 각 회차는 단편화되고 드라마 인물들도 예능처럼 캐릭터화한다. 안 감독은 “제작 환경이 오히려 척박해졌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놀 게 없으니까 두꺼운 소설책을 앉아서 다 읽었다. 지금 사람들은 서사의 긴 흐름을 참지 못한다. 문제를 호쾌하게 해결해주는 캐릭터가 1회, 2회에 계속 등장하는 건 예능이다. ” 

하루 12시간 안 넘는 촬영…배우들 “인권 있는 현장”

안 감독은 제작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작업시간은 하루 12시간을 넘기지 않고,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으면 촬영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는 “작품을 위해 인권이 희생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현장을 만들기까지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놀랐다. 손예진은 드라마 방영 전 촬영장을 “인권이 있는 현장”으로 표현했다. 정해인 역시 종영 후 “휴식을 취하면서 미니시리즈를 찍을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고 말했다. “못해도 하루 7~8시간 잤다. 스태프들도 하루 평균 9시간 정도 일했다”고 전했다. “감독님이 필요하지 않은 컷은 찍지 않으신다.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하시기 때문에 현장에서 시간을 절약하는 것 같다.”

 

안 감독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종영을 두고 “정든 학교를 떠난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두 주인공의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잘 그려낸 드라마는 초반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후반 들어 윤진아(손예진)의 갈팡질팡하는 태도는 일부 시청자의 불만을 샀다. 여주인공을 ‘민폐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러브 스토리는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해야 하고 기승전결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윤진아라는 인물의 성장기를 그리려”고 했던 점에서 필요했다고 한다.

 

사랑을 통해 인간을, 인간을 통해 사회를 말하고 싶다고 한다. “‘한 인간의 병증은 한 사회의 병증’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생활한 지 10년 정도가 된 서른 중반의 여성은 단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고민이 많을 것 같았다. 그릇이 큰 인물이라 생각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생각이 깊을 것 같았다.” 그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마이너성이 추가될 때마다 관점이 넓어진다고 본다. 인간의 관점이 기본이라면,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의 관점이 추가될 때마다 인물이 가지는 생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고 말했다.

 

손예진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는 “긍정적인 힘이 느껴지는 배우가 필요했다. 손예진은 그냥 의자에 앉는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도 인물에 눈을 못 떼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배우”라고 말했다.

 

드라마를 끝낸 안 감독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요 며칠 신문과 책을 보며 “멍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엔 “‘불치병, 부모의 원수’ 같은 소재 없이 평범한 이야기로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연출자로서 일생의 포부”라 밝혔다. 차기작 예정은 없다지만,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다”며 밝은 표정을 보였다. 휴식기가 그리 길지는 않을 듯하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