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책과 함께 놀다, 졸다…
강화도 시골 책방

by경향신문

‘국자와 주걱’에서 느리게 보낸 하룻밤 ‘북스테이’

책과 함께 놀다, 졸다… 강화도 시골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동네책방 ‘국자와 주걱’에 가면 온종일 서가에 파묻혀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숲길을 걷고 집 뒷마당 텃밭에서 자란 자연밥상을 마주하는 것은 덤이다.

강화도 시골 책방에서 느리게 하룻밤을 보내보자. ‘북스테이(book stay)’는 책 속에 파묻혀 하루든 이틀이든 머무는 것이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없다. 그저 책과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번잡한 일상을 잠시 접고 호젓한 시골 동네책방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왔다.

국자와 주걱

강화도에 있는 책방 이름이 ‘국자와 주걱’이라니? 이름부터 궁금증이 들게 했다. 운이 좋으면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고 한다.

 

‘국자와 주걱’이 있는 인천 강화군 양도면에 들어섰다. 마을 어귀에도 책방 안내표지판은 찾을 수 없었다. 1970~1980년대 농촌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비좁은 시골길을 따라 구불구불 300m를 더 들어갔다. 목적지는 강화남로 428번길 46-27번지. ‘국자와 주걱’은 ㅁ자형 허름한 농가주택이었다.

 

시골 책방에서의 하루는 시작부터 흥미로웠다. 미리 예약했는데 주인은 없다. 고양이가 열린 대문으로 나왔다. 자물쇠가 걸린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앞마당에 놓인 중고 베스트셀러 시집, 평론, 소설 등 100여권은 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가면 된다. “어서오세요. 들어가셔서 책 보고 계셔요.” 마당 칠판에 적힌 하얀 분필의 손글씨를 확인하면 입실 완료다.

 

고양이를 따라 뒷마당으로 갔다. 새하얀 이불이 빨랫줄에서 팔랑거렸고 따사로운 햇살이 장독대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텃밭에서 자라는 상추, 고추, 부추, 가지, 아욱, 겨자채, 참나물, 미나리는 싱싱했다. 온전히 1시간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 보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 함민복 시인이 책방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숟가락과 젓가락은 각자 쓰지만 ‘국자와 주걱’은 나눔의 의미가 있습니다. 책이 지식 창고라면 책방은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겠지요.”

 

24시간 문을 열어두고 산다는 주인 김현숙씨(61)는 “처음에는 사는 집이 옹색했지만 지금은 2000여권을 소장한 어엿한 책방이 됐다”며 “방이 2개인데 숙박 손님은 하루 한 팀만 받는다”고 말했다.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책이 켜켜이 쌓인 거실 마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은 혼자 묵기에 딱 알맞았다. 짐을 풀고 책장을 둘러봤다. <명상록> <듣도 보도 못한 정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 <하늘을 나는 사자> <천개의 바람> <축적의 시간> <보스의 정신>…. 제목조차 매력적인 서적들은 누구나 쉽게 뽑아 볼 수 있도록 헐렁하게 꽂혀 있었다. 요즘 잘 나가는 책도 간혹 보였지만 이 집에서는 두껍고 무거운 인문학이나 과학, 생태환경 책이 많이 팔린다고 했다. 자꾸 책에 손이 갔다. 과학책을 읽다가 재미없으면 그림책을 펴들었다. 자, 오늘 밤 어떤 책을 통독할까.

책과 함께 놀다, 졸다… 강화도 시골

옛 농가주택 그대로인 책방 ‘국자와 주걱’.

달빛 아래 별이 쏟아지다

오후 6시,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진강산 자락 아래 너른 들판을 따라 소나무와 참나무, 오디나무가 내주는 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옥수수와 파밭 사이로 찔레꽃, 붓꽃, 제비꽃, 금낭화, 엉겅퀴가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모내기를 끝낸 논두렁을 걸을 때는 저 멀리서 고라니가 튀어나왔다.

 

오래된 숲길로 들어섰다. 아파트 3층 높이만 한 나무들이 진초록 잎사귀를 흔들며 도시인을 반겼다. 마치 그림동화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솔잎과 아카시아 향이 그윽한 숲은 두 눈을 감고 귀를 세우게 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맑게 빛났다. 걷고 싶을 만큼만 걷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도 상관없는 나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책방으로 돌아오는 길 개구리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나브로 컴컴해진 대문 앞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반달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집 앞 자그마한 저수지에 박힌 별빛은 총총했다. 달과 별과 바람과 도란도란 속삭이다보니 답답했던 마음에 평온이 몰려왔다. 내 집처럼 방바닥에 엎드려 눈꺼풀이 스르륵 감길 때까지 책과 놀았다.

 

아무도 깨우지 않아 늦잠을 자고만 다음날 오전 9시.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아침식사로 압력솥에 갓 지은 잡곡밥과 모시조개국, 텃밭 야채에 토마토와 아카시아꽃을 올린 샐러드, 알싸한 총각김치와 짠지가 나왔다. 소박한 상차림이었지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산책도 할 겸 책방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캠프힐’을 찾았다. 캠프힐은 장애인들이 만든 마을기업 형태의 카페다. 아이스커피 한 잔을 주문하자 어눌하게 외지인에게 인사를 건네던 제빵사 청년이 피아노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연주했다. 고마운 마음에 무화과 빵을 포장 주문했다.

 

“편한 시간에 오시고 가시면 돼요. 설거지는 직접 하시고 이불은 잘 개키고 떠나세요. 책 한 권은 반드시 사야 합니다.” ‘국자와 주걱’은 할인도 없고 포인트 적립도 없는 100% 정가 책방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등 마음에 드는 책 3권을 골라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엄마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인심이 넘치는 집. 시골 책방에서의 하루는 심심하지 않았다. 비어 있는 마음 구석에 글과 문장, 지식이 채워진 시간이었다.

 

글·사진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