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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마이크 하나면 OK,
스탠드업 코미디 부활한다

by경향신문

마이크 하나면 OK, 스탠드업 코미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쇼. 왼쪽부터 유병재, 앨리 웡, 제리 사인펠드 /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많이 기다리셨죠. 여러분. 처음에 나오는 것보다 뒤에 무대 나오는 게 분위기는 더 좋은데 단점이 있어요. 마이크에서 진짜 이상한 냄새가 많이 나요.”

 

30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엔 폭소가 터졌다. 서울 논현동 스탠드업 코미디 전용클럽 코미디헤이븐. 무대에 홀로 선 코미디언은 입담만으로 좌중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날 차례로 무대에 오른 코미디언들은 모두 10명. 저마다 5~15분간 말의 성찬을 펼쳤다. 일상의 재미있는 경험담부터 ‘29금’쯤은 될 법한 성적 농담, 기발한 화장실 유머에 국제 정세를 꼬집는 촌철살인 논평까지 쏟아져 나왔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서울 강남과 홍대 일대 공연장에서 열리는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TV 코미디가 주지 못하는 색다른 재미와 매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장르는 미국 등 서구에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류로 자리잡은 지 오래지만 국내에서는 생소하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말 그대로 코미디언이 무대에 혼자 올라 마이크 하나만 들고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 형식이다. 분장도 도구도 없이 오로지 코미디언 개인의 언변과 역량에 그 성패가 좌우된다. 이주일, 배삼룡 등 한국 코미디의 초기 역사를 다졌던 코미디언들이 활약하던 시절에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가 선보이기는 했다. 또 마흔여섯 살에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김형곤 역시 마지막까지 스탠드업 코미디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코미디의 주도권이 TV로 옮겨간 뒤로 그 명맥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그동안 국내 코미디의 주류를 차지한 것은 스튜디오 코미디, 공개 코미디, 그리고 각종 버라이어티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대중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방송작가 겸 코미디언 유병재가 지난해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선보이면서부터다. 그는 지난해 <블랙 코미디>, 올해 <B의 농담>이라는 타이틀로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 쇼에서 “코미디언이 혼자 나와 쇼를 이끌어가는 스탠드업 코미디는 인생 마지막에 놓았던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는 코미디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장르로 받아들여진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TV 코미디의 쇠락으로 무대를 잃은 기존 코미디언들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무대를 찾으면서다. 처음에는 홍대 일대에서 음악 클럽을 빌려 공연을 했다. 그러다 올 6월에는 서울 강남 논현동에 국내 최초의 라이브 스탠드업 코미디 전용 클럽이 문을 열었다. <개그콘서트> <웃찾사> 등 기존의 공개 코미디에서 인기를 얻었던 유명 코미디언들 역시 가세했다. 김대희, 김준호, 유민상 등은 오는 7월 6~8일 서교동 JDB스퀘어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연다.

 

코미디헤이븐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스탠드업 코미디 쇼가 열린다. 하루에 10~12명씩, 일주일간 40여명이 무대에 오른다. 이곳은 현재 한국형 스탠드업의 ‘본진’이나 마찬가지다. 매주 화·수요일 이틀간은 ‘오픈 마이크’ 무대를 열어 코미디언 지망생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한다.

 

2016년부터 서비스된 동영상 스트리밍 채널 넷플릭스는 스탠드업 코미디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을 위한 젖줄이 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 앨리 웡, 레이첼 파인스타인 등이 코미디 쇼를 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유병재의 <블랙 코미디>도 서비스된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엔터테인먼트 지형의 변화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TV의 권력이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산되면서 대중들이 추구하는 콘텐츠의 영역과 장르도 급속히 세분화되고 있는 추세다.

마이크 하나면 OK, 스탠드업 코미디

정재형(30) / 본인제공

KBS 29기 공채 개그맨 정재형은 현재 국내 스탠드업의 중심에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기획사 ‘스탠바이 스튜디오’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개그콘서트>에 내놓을 새 코너를 짰는데 ‘까여서’ 쉬고 있던 참이었어요. SBS <웃찾사>도 폐지되는 바람에 당장 밥벌이가 없어진 용주형(이용주)이 우리도 스탠드업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고 했지요. 스탠드업을 좋아하긴 했지만 1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뿌리 내린 미국과는 다르잖아요. 의구심도 있었지만 사회가 다원화되고 다양성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봤지요.”

 

몇 달간의 준비 끝에 지난해 11월 말 서교동의 클럽 ‘공간 비틀즈’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이내 이용주의 동료 개그맨 김민수,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발굴한 코미디언 지망생 박철현까지 가세해 4명이 ‘스탠바이 스튜디오’를 차렸다. 티켓을 판매하는 본격 공연을 시작한 것은 올해 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지에서 활약하던 스탠드업 코미디 지망생들이 몰려들었고, 신예를 발굴하고 검증하는 ‘오픈 마이크’도 활기를 띠었다. 터키 출신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 자신의 장애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하는 장애인 연극배우 한기명 등도 고정적으로 공연하는 멤버다.

 

“코미디계 선배들도 무대에 서며 격려해줬고, 코미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를 찾아주셨어요. 그 중 재미교포 사업가 한 분이 한국에도 스탠드업 코미디가 자리잡고 뿌리내리면 좋겠다면서, 공간을 마련할테니 함께 키워보자고 하셨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코미디헤이븐’이에요. 이곳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토양이 됐으면 좋겠어요.”

마이크 하나면 OK, 스탠드업 코미디

최정윤(33) / 본인제공

최정윤(33)씨는 자신을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이라고 소개했다. 주 4~5회씩 무대에 서는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수위 높은 성적 농담들을 구사한다. 얼마 전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역사와 특징, 방법론과 스타 코미디언들의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쓴 <스탠드업 나우>(왓어북)도 펴냈다.

 

그는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20대에는 <LA타임스>와 AP통신 서울 주재 기자로 일했으며, 서른이 되던 해에는 친구와 여성전용 성인용품 사업을 시작해 제법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스탠드업 공연을 시작한 것은 지난 2월 ‘오픈 마이크’ 무대에 올랐을 때부터다. “드디어 내 인생의 중심에 내가 들어왔다”고 말하는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전 출신인 그는 몸개그와 성대모사에 능한, 유쾌발랄한 여고생이었다. 영어를 좋아했던 그는 고 2때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게 됐지만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시애틀의 대학으로 진학한 뒤에는 증세가 더 심해졌고 일종의 사회공포증에도 시달렸다.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거나 접할 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릴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한국계 스탠드업 코미디언 마가렛 조의 공연 영상은 희망의 빛과 같았다. “미국에 간 뒤에 말수가 급격히 줄었어요. 내 말에 무게나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자괴감에 짓눌려 있었죠. 그런 제게 속 시원하게 막말하면서 떠들어대는 그 영상이 그렇게 시원하고 통쾌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는 다 섭렵하며 찾아봤어요.”

 

학창시절 내내 짓눌렸던 자신을 되찾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사람들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음에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그렇게 깊이 뿌리 내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번역작가, 외신기자로 일했다. 현실과의 불가피한 타협이었다. 성인용품 사업을 했던 것은 성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꿔보고 싶다는 평소의 생각을 실천했던 것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난 무엇을 이야기할 건지 매일 고민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자라면서 느끼고 겪었던 많은 부분들을 다른 사람들과 창조적으로 나누면서 계속 많은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정말 예리하고, 격렬하고, 웃기게 말이죠.”

마이크 하나면 OK, 스탠드업 코미디

대니 조(36) / 본인제공

대니 조(36)는 미국에서 18년째 활동하고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한국계 배우 켄 정과 함께 스탠드업 무대에 서 왔으며 몇 년 전엔 할리우드 독립영화 <케이타운 카우보이스>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TV용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말레이시아 방송사의 초청을 계기로 아시아권 스탠드업 코미디 시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싱가포르, 홍콩, 태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기획하고 활동 영역을 확장해 보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말 한국에 왔다. 아시아권의 여러 나라를 편하게 다니기에는 서울이 적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서울에 주로 ‘잡혀’ 있다. 그가 귀국하던 시점을 전후해 스탠드업 코미디가 퍼지기 시작하면서다.

 

처음에는 YG엔터테인먼트의 요청으로 유병재의 <블랙 코미디> 영문 자막을 감수하면서 국내 코미디계에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현재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노하우와 기본기를 전수해 주고 있으며, 직접 무대에도 오른다. 미국에서 겪었던 인종차별, 콩글리시를 소재로 조크를 하는 그의 무대는 내공이나 웃음의 파워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제 한국 스탠드업은 발걸음을 떼는 셈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건 세계 어디서나 통하고 진정으로 소통하며 웃음을 줄 수 있는 거거든요. 물론 저 역시 한국식 유머 코드에 익숙하지 않다는 어려움은 있어요. 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한국 코미디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죠.”

 

매주 코미디헤이븐에서 공연을 하는 그는 오는 7월 JDB스퀘어 무대에도 국내 코미디언들과 함께 오른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