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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현직 판사들이 본 ‘미스 함무라비’, “부장님 가디건까지 똑같아”

by경향신문

현직 판사들이 본 ‘미스 함무라비’,

JTBC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사진·방송 캡처

드라마 시장에서 법조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선악 구조를 뚜렷하게 세우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립적 위치에 있는 판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거의 없었다. 판사는 검사나 변호사를 뒷바치는 조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11월 판사가 주인공인 SBS 수목드라마 <이판사판>이 나왔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지난 5월 방송을 시작한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다르다. <미스 함무라비>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4부에 소속된 열혈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냉정한 엘리트 판사 임바른(김명수), 할 말 다하는 ‘출세를 포기한’ 부장판사 한세상(성동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방송 시작과 함께 법조계 현실을 잘 반영한 사실감 넘치는 드라마로 주목받고 있다. 현직 판사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볼까.

“예전 법조 드라마를 보면 비현실적이고, 법원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아 ‘한번쯤 판사나 법조인 감수를 받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드라마는 다르다. 지금까지 판사들이 나온 영화나 드라마 중 가장 현실을 잘 반영한 것 같다”, “재판과 그 과정을 묘사하는 디테일이 실제와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판사들의 평이다. 판사들은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인물 설정이 다소 강한 면이 있지만 판사들 간의 관계, 내부 사건, 판사실 구조와 소품까지 현실이 잘 담겨있다고 말했다. 특히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직원 등 관계 묘사도 현실과 판박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ㄱ판사는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직원들 사이의 관계가 시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있는데 최신 법원 내 분위기를 담았다”며 “판사와 직원간의 대화 내용도 같아 드라마 얘기를 하며 동료들과 ‘우리 이야기’라면서 웃었다”고 말했다. ㄱ판사는 박차오름과 임바른처럼 배석 판사끼리의 애정 관계도 실제 벌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좌우 배석판사로 미혼 남녀가 될 확률이 적어 많지는 않은데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라며 “여러 얘기가 나오는데 생뚱맞은 내용은 없다. 실제 있었던 인물, 이야기를 조합해 잘 녹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직 판사들이 본 ‘미스 함무라비’,

JTBC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사진·방송 캡처

드라마 속 임바른처럼 10년차 미만 경력의 젊은 판사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에서 배석판사로 근무한 ㄴ판사는 “동기들 카톡방에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부장(판사)님이 사무실에서 카디건 입는 모습은 진짜 똑같다”며 “판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쓴 법정 드라마는 망치 두드리는 장면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장면이 많은데 이 드라마는 사무장이 써준 내용 그대로 증인신문하는 문제있는 변호사 장면처럼 현실이 반영돼 있다. 판사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ㄷ판사는 “부장판사 방 규모와 탁자·캐비닛 등 가구는 물론 직원이 앉아 있는 모습, 책상에 잔뜩 쌓여있는 기록도 실재와 흡사하다”며 “특히 결재서류 등을 넣어 전달하는 노란색 파일(폴더)이 나오는 것을 보고 디테일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가 다른 법조 드라마와 달리 작은 소품까지 현실과 닮은 것은 작가 덕분이다. 드라마 작가는 판사 경력이 20년 넘는 문유석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다. 문 부장판사는 자신이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대본을 직접 썼다. 드라마에는 소설에 살짝 내비쳤던 박차오름과 임바른의 애정관계뿐 아니라 과로로 숨진 판사, 부장판사 금품 수수, 판사회의 소집, 상고법원 설치 논란 등 최근 2~3년 사이 법조계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 등을 각색해 담았다. 정의감 넘치는 판사 박차오름은 ‘돌직구’ 발언을 한다. ㄹ판사는 “드라마에서 고아라(박차오름)가 법원의 개선 방향 등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판사들 중에는 문 부장판사가 현상황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고아라의 입을 통해서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긴 있다”고 말했다.

현직 판사들이 본 ‘미스 함무라비’,

JTBC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사진·방송 캡처

외부활동을 좋게 보지 않는 보수적인 사법부 내의 분위기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ㄷ판사는 “옛날에 현직 판사가 드라마 대본을 썼으면 ‘이런 것 하면 법원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문 부장판사가 개인적으로 본분을 다하면서 외부활동을 한 측면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주변 판사들도 다들 재밌게 보고 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판사들은 여타 법조 드라마와 달리 뚜렷한 선악 구조를 가진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통상 법조 드라마는 박차오름이 결국 선이고 정답이었다고 말하지만 <미스 함무라비>는 냉정한 임바른, 조율 역할을 하는 한세상 등을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한다.

 

ㄷ판사는 “판사들이 표면적으로는 기록만으로 판단하지만 그 밑에 깔린 생각은 어떻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며 “학생들이나 일반 국민 입장에서 법원, 판사들을 이해하기 좋은 교재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ㄴ판사는 “허무맹랑한 내용이 아니니 법원에서 하는 웬만한 홍보보다 법원의 실상을 알리는 데 이 드라마가 훨씬 긍정적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다만 방송 시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는 반응도 있었다.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등으로 사법부를 향한 불신 논란이 커지는 상황이라 아쉽다는 것이다. ㄹ판사는 “최근 같은 이슈가 없을 때 드라마로만 보셨으면 더 많은 분들이 봤을텐데”라며 “보시더라도 아무래도 요즘 같은 시기에는 ‘판사가 직접 대본을 썼으니, 법원 상황이나 판사들을 좋게 묘사했겠지’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그런 면에서는 아쉽다”고 말했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