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비전향 장기수 19명의 초상

[컬처]by 경향신문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비전

비전향장기수 서옥렬씨 /정지윤 기자color@kyunghyang.com

수십년간 감옥살이를 감수하면서라도 지켜야 할 정치적 신념은 어떤 것일까.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북한사회의 민낯’이 만천하에 공개된 뒤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신념이란 것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70~80년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인 그들의 얼굴을 보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지난 8월19일 김동수씨(81)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는 총 18명이 됐다. 2일부터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는 전시회 ‘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귀향(歸向)’은 이들 19명의 얼굴을 오롯이 담았다. ‘이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목 중 ‘귀향’에 ‘시골 향(鄕)’ 대신 ‘향하다 향(向)’자를 썼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수분,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이광근, 그리고 김동수. 이들의 평균 나이는 87세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37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19명의 복역기간을 모두 합치면 384년이 된다.


비전향장기수들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바꾸지 않고 버텨왔다. 이들의 공통적인 바람은 가족이 있는 고향, 즉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사상전향제도’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의 권리를 폭력적으로 억눌렀다.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가석방이 아예 불가능했다. 사상전향제도의 ‘원조’였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이를 폐지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50년 넘게 존속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1998년에야 사상전향 대신 준법서약서를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상전향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과거에 강제로 전향서를 썼던 30여명은 한국에 남아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이후 지난해까지 15명이 세상을 떠났고, 올해 또 김동수씨가 타계했다.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비전

비전향장기수 박정덕씨 /정지윤 기자color@kyunghyang.com

작가인 정지윤 사진기자는 23년째 경향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3년전 비전향장기수인 고 허영철씨의 삶을 담은 그래픽 노블 ‘어느 혁명가의 삶’을 읽은 뒤 작업을 계획했다. 지난 여름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19명을 한달여간에 걸쳐서 만났다. 이들 대부분은 오랜 수감생활을 마친 뒤에도 정착할 고향과 가족이 없어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궁핍하게 살 수 밖에 없었고, 지금도 생계급여와 노령연금에만 의존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정 기자는 어느새 한국사회에서 지워져버린 비전향 장기수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초상과 일상을 사진으로 남겼다.


서옥렬, 양원진, 최일헌,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김동수, 이광근씨는 남파공작원이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허찬형 씨는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쟁포로 출신이다. 양희철씨는 1963년 고려대 재학시절 지하당사건으로 장기수가 됐다. 28살에 감옥에 들어가 64살에 출소했다.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씨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조심스럽게 이들에게 접근해야 했다. 정 기자는 “짧은 만남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의 길었던 아픔의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며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야 할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들은 우려했던 것보다 강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폭염을 뚫고 찾아온 기자를 되레 걱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반갑게 맞아주었고 헤어짐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정 기자는 “담담하게 전해준 그들의 증언은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비전

비전향장기수 박종린씨 /정지윤 기자color@kyunghyang.com

한국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비전

비전향장기수 류기진씨 /정지윤 기자color@kyunghyang.com

비전향장기수들은 검은 막 앞에 서거나 앉은 채 초상 사진을 찍었다. 더러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또는 환자복을 입고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로 나섰다. 검은 막과 흰 머리칼, 형형한 눈빛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그들은 눈빛으로 평범한 노인이 아님을, 끝내 전향하지 않고 신념과 자존을 지킨 전사임을 뚜렷이 보여준다. 전시회는 오는 14일까지.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2018.10.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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