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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김앤장 이긴 김세은 변호사 “목숨 건 할아버지들 재판을 거래했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by경향신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

지난해 5월 대리인단 합류…상대방 로펌에는 신경 안 써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사과…배상금 지급이 치유의 시작

김앤장 이긴 김세은 변호사 “목숨 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을 대리한 김세은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쉽지 않았던 소송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구일본제철)을 상대로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과 한국 법원에서 진행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법원이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것은 2012년 예상을 뒤엎은 대법원의 파기환송심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 피해자들은 없었다. 또 패소 판결이 날 경우 피해자들이 느낄 실망감을 걱정한 주변인들이 재판 방청을 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승소 판결이 내려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혼자 남은 이춘식씨(94)뿐이었다.


“돌아가신 분들이 2012년에라도 법정에서 선고를 보셨다면 좋았을 텐데….” 피해자들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마루의 김세은 변호사(32)는 31일 경향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주로 패소하는 것을 보다가 눈을 감은 고인들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5월 대리인단에 합류해 재판을 맡았다. 재판 역사가 오래된 만큼 피해자들을 거쳐간 변호사들도 많았다. 현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장완익 변호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만큼 이번 승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이뤄낸 결과였다.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원과 규모를 공식적으로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송 초기 단계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이 강제동원자들의 미지급 임금을 기록한 공탁금 명부를 들고 한명 한명 찾아다녔다. 소송에 참여할 사람들을 직접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김 변호사는 “여러 사람들이 애써 온 재판인데 혹시 내가 부족해서 재판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며 “그래서 더 초조하게 생각하며 판결을 지켜봤는데 결과가 잘 나와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2012년 대법원 승소 판결이 파기환송심을 거쳐 다시 대법원에서 같은 결론으로 확정되기까지 6년여가 걸렸다. ‘지연된 정의’의 배경에는 ‘재판거래 의혹’이 놓여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는 강제징용 재판을 지연시키는 대가로 정부로부터 법관 파견자리 등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변호사는 재판거래 의혹을 보도로 접한 직후 참담함을 느꼈다고 한다. “목숨 걸고 소송해 온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이와 별개로 검찰은 사법농단 행위를 철저하게 수사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신일철주금의 배상금 지급은 ‘돈’이 아닌 ‘치유’에 목적이 있다고 이번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할아버지들은 사실상 신일철주금으로부터 돈이 아닌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며 “신일철주금이 대법원 판결을 수용한다는 공식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할아버지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해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신일철주금 재산을 어떻게 강제집행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는 시각을 두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일제의 불법행위 피해자들을 구제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전수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당신이 강제동원의 피해자’라는 것을 조사해 알리고, 법적인 절차를 통해 권리를 구제받도록 안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재판 상대방인 신일철주금을 대리한 로펌은 김앤장이었다. 시민사회 등을 중심으로 한국 최대 로펌인 김앤장이 일본 전범 기업을 대리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중소 로펌인 해마루가 최대 로펌을 상대로 승리했다. 김 변호사는 “상대방 대리인이 어느 로펌 소속인지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마루가 피해자를 대리하고 있는 근로정신대 사건과 다른 강제동원 사건 재판에서도 김앤장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기업을 대리하며 법적 공방 중이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