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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한 잔에 포도 한 송이, 한 잔에 사과 한아름…“이 술 다 내 거”

by경향신문

허영만 화백·홍신애 요리연구가와 영천·의성 와이너리 투어


미각 깨우는 맛·향에 취한 가을

연계 관광지·체험 코스도 훌륭


|고도리 와이너리

“백김치에 딱, 거봉 화이트와인”

청포도 와인은 ‘주류대상’ 수상


|한국와인

단맛 대신 드라이한 맛 ‘차별화’

“떡볶이처럼 매운 음식과 어울려”


|한국애플리즈

의성 사과, 옹기에서 숙성 ‘시드르’

“과하지 않은 단맛…식사자리용”

한 잔에 포도 한 송이, 한 잔에 사

한국애플리즈의 저장고에는 개당 용량이 400ℓ에 이르는 대형 옹기 수십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시드르와 사과 와인은 황토로 만든 옹기 안에서 1~3년간 숙성해야 제맛을 낸다. 대동여주도 제공

날 저물고 선선한 바람 불면 자연스레 술 한잔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작정하고 술 마시려 여행가방을 꾸렸다. 그저 마시고 먹는 게 목적이니 이렇게 넉넉하고 마음 편한 여행이 또 있을까. 주종은 와인이다. 목적지는 경북 영천·의성으로 잡았다. 영천은 ‘한국의 부르고뉴’로 불리는, 최근 떠오르는 와인 산지다. 사과 주산지인 의성엔 맛 좋은 사과 와인을 생산하는 술도가가 있다. 전통술을 소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대동여주(酒)도’를 운영하는 이지민 PR5번가 대표가 여행 코스를 짜고, 자타 공인 주당 허영만 화백과 요리연구가 홍신애씨가 동행했다. 이번에 방문한 세 와이너리는 모두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한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에 선정된 곳들이다. 술의 품질과 지역사회 연계성, 관광체험 요소 등을 검증받았다는 얘기다. 들러보니 과연 일부러 먼 길 찾아갈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청포도 한 송이를 응축한 맛

“여긴 이름이 왜 이래!” 경북 영천시 고경면에 자리 잡은 ‘고도리 와이너리’에 들어서면서 허 화백이 던진 농담에 다들 웃음부터 터졌다. ‘타짜’의 추측과는 달리 고도리는 화투패의 다섯마리 새가 아니라 지명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명품 와인을 만들겠다는 최봉학 대표(58)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최 대표는 3년 전부터 고도1리 이장도 맡고 있다.


와이너리 입구엔 실험용으로 재배하는 10여종의 외국 품종 포도가 아치형 덩굴을 이루고 있었다. 당도를 높이기 위해 수확기를 넘겨 계속 말리고 있다는 카베르네 쇼비뇽 포도알은 쭈글쭈글했다. “이게 모양은 이래도 이 속에 보석이 들어 있는 겁니다.” 설명하는 최 대표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따서 맛보니 평소 사먹는 포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달았다. 씨까지 씹어먹는데 고소한 맛이 입안에 남았다.


원래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최 대표는 아버지의 사과 과수원을 물려받으며 30대 후반부터 농부로 변신했다. 사과에서 포도로 작물을 바꾼 건 그의 선택이다. 포도 생산량이 꾸준히 늘면서 남는 포도로 술을 만들어보자 해서 양조를 시작한 게 2008년이다. 10여년 만에 고도리는 영천의 대표 와이너리가 됐다. 최 대표가 거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은 2011년 ‘우리 술 품평회’ 우수상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상을 휩쓸었다.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청포도 품종 ‘청수’로 만든 화이트와인은 올해 2월 열린 ‘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먼저 거봉 화이트와인부터 시음했다. 잔에 코를 갖다대자 복숭아향이 살짝 올라왔다. 은은한 단맛이 가볍게 마시기 좋았다. 다음으로 맛본 청수 화이트와인은 과일향이 훨씬 진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껍질을 벗긴 포도알을 한 움큼 문 것처럼 침이 솟았다. 청수 화이트와인은 10.5도로 알코올 도수가 낮아 부담도 덜했다. 최 대표는 “과당을 따로 넣지 않고 자연스러운 맛을 내려다 보니 도수가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국산 와인을 수입 와인과 바로 비교하면 완성도와 가성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국산 와인은 과일값이 폭락하며 또 다른 부가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200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역사는 일천하지만 우리 농산물로 만든 우리 술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행한 최정욱 소믈리에(광명동굴 와인연구소장)는 “국산 와인은 한국 음식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음미하면 맛이 배가된다”면서 “거봉 화이트와인은 백김치 같은 전채 음식과 어울리고 청수 화이트와인은 좀 더 기름기 있는 음식과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고도리 와이너리엔 펜션과 식당도 딸려 있다. 10만~15만원이면 10명이 하룻밤 머물며 농장을 구경하고 와인도 시음할 수 있다. 식당에선 닭볶음탕 등 고도리에서 만든 와인과 어울리는 안주도 판매한다. 직장인 엠티나 가족 단위의 여행지로도 손색없어 보였다.

한 잔에 포도 한 송이, 한 잔에 사

고도리 와이너리에서 오크통에 사인하는 허영만 화백. 감 와인을 시음하는 홍신애 요리연구가. 하형태 한국와인 대표가 와인 저장탱크에서 시음용 화이트와인을 따르고 있다. 대동여주도 제공·김형규 기자

한국 와인의 선구자

16개 와이너리가 몰려 있는 영천에서도 ‘한국와인’은 독보적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한국 와인 산업의 대부 격인 하형태 회장(64) 덕분이다. 하 회장은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했다. 1982년 OB맥주에 입사해 국내 대표 와인 브랜드 ‘마주앙’을 만들며 20여년을 보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호주 등 와인 선진국에서 오래 공부한 하 회장은 퇴직 후 2006년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한국와인을 설립했다. 비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영천이 포도밭을 일구고 와인을 만들기에 최적지라 판단해서다. 생산한 제품에는 프랑스어로 와인(vin)과 한국(coree)을 더해 ‘뱅꼬레’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국산 와인이 일반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춰 부드러운 단맛을 내는 것과 달리 한국와인은 드라이한 맛을 강조한다. 일종의 정면 승부다. 드라이한 와인은 단 와인보다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음식을 곁들였을 때 강점이 있다. 하 회장이 개업 초창기에 만들어 12년이나 숙성한 와인을 내왔다. 포도껍질을 많이 넣어 와인잔 가장자리가 갈색빛을 띨 정도로 색이 진했다. 산미가 강렬해 안주로 나온 찹쌀떡·치즈와 묘하게 잘 맞았다. 홍신애 연구가는 “떡볶이처럼 달고 매운 음식과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평했다.


하 회장은 포도 외에 다양한 과일로 와인을 만든다. 오디 와인은 코에 감기는 향과 입안에 감도는 맛이 약간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목구멍을 넘길 때 쌉쌀하면서도 신맛이 치고올라오는 게 독특한 풍미가 있었다. 일행 모두 “오디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단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따로 내준다는 오디청을 잔에 조금 부으니 그제야 오디향과 맛이 진하게 났다. 이어서 나온 감 와인은 짙은 노란색이 창밖의 단풍과 어울려 가을 빛깔이 근사했다. 감 와인은 생각과 달리 쓴맛이나 떫은맛이 거의 없고 산미가 좋아 한식과 두루 어울릴 것 같았다.


한국와인은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근사한 카페를 갖추고 있다. 오디·뽕잎 따기, 오디청·포도주스 만들기, 코르크 열쇠고리 만들기 등 각종 체험 프로그램도 연중 운영한다. 바로 옆에는 탱크와 전투기, 헬리콥터 등이 전시된 최무선과학관이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견학 코스로 인기가 좋다.

한 잔에 포도 한 송이, 한 잔에 사

의성에서 만든 진짜 사이다

버스는 마지막 목적지인 경북 의성으로 달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술을 마셔 몸이 조금 나른했지만 사과밭에서 마음껏 사과를 따라고 하자 일행 모두 번개같이 움직였다. 딴 사과를 한입씩 베어먹으며 ‘한국애플리즈’로 향했다. 애플리즈는 의성 사과로 발포성 사과주 시드르(Cidre)와 사과 와인, 사과 브랜디 등을 만드는 업체다. 한임섭 대표(66)는 원래 증류기를 만드는 엔지니어였다. 유럽 출장을 다니며 시드르를 맛보고 반해 한국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1998년 주류제조공장을 차렸다.


한국에서 과실주라고 하면 보통 과일에 설탕을 듬뿍 쳐 만든 담금주를 떠올린다. 먹고 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싸구려 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한 대표는 그런 현실을 창의적으로 극복했다. 해외 술 박람회에 제품을 출품해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2005년 미국 수출을 시작으로 일본·호주 등 시장을 넓혔다. 미국 LA·인디애나주에서 열린 주류품평회에서 상을 받으며 이름값이 높아졌다. 지금도 매출의 90%가 수출에서 나온다. 한 대표는 한국전통주수출협의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애피소드’(apisode)라는 이름을 붙인 애플리즈의 시드르는 상큼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단맛이 연거푸 마셔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시드르의 영어 이름이 사이다(cider)다. 우리가 늘 마시는 그 사이다 맞다. 물론 설탕물에 탄산을 섞은 시판 ‘사이다’와 시드르는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맛이다. 점심식사 때 곁들인 사과 와인 ‘한스 오차드’(한씨네 과수원)는 기자 혼자서 한 병을 거의 다 비울 정도로 음식과 궁합이 좋았다. 허 화백은 “술도 아니고 음료도 아닌 묘한 맛이라 밥 먹을 때 더 좋은 것 같다”고 평했다.


시드르는 사과 와인과 제조 방법이 비슷하다. 발효 과정에서 탄산이 날아가지 않도록 용기를 밀폐하는 것 정도만 다르다. 시드르와 사과 와인이 잠들어 있는 애플리즈의 저장고로 들어가봤다. 술은 일반적인 숙성용 탱크가 아니라 황토로 만든 옹기에 들어 있었다. 옹기가 숙성 효과가 더 좋고 깊은 맛이 난다고 했다. 숙성기간은 시드르가 1년, 사과 와인은 3년 정도다. 일행은 입장 전 제공받은 병에 사과 와인을 담고 직접 코르크 마개를 씌운 뒤 포장 캡슐까지 씌우는 체험을 했다. 애플리즈 직원이 찍어준 기념사진으로 라벨을 만든 뒤 병에 붙이니 나만의 와인 한 병이 완성됐다. 사인을 해달라는 청에 허 화백이 옹기에 하얀 펜으로 휘갈겨 썼다. “이 술 다 내 거!”


영천·의성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