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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내게는 차별을 거부할 특권이 없었다" 차별의 세상에 던지는 '한 방' 같은 소설

by경향신문

"내게는 차별을 거부할 특권이 없었다

<다섯 번째 계절> 을 펴낸 미국의 SF소설가 N. K. 제미신은 경향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인터넷 확산으로 독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출판계에서도 흑인 캐릭터가 주도하는 이야기를 출판하는 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고 말했다. ⓒLaura Hanifin 2015

미국의 SF작가 N K 제미신(47)의 소설 <다섯 번째 계절>(황금가지)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을 3년 연속 수상한 작가의 작품, 백인 남성 작가의 텃밭이던 SF소설 시장에서 최초로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을 거머쥔 흑인 작가의 작품, 인종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 빼어난 상상력과 허를 찌르는 이야기로 독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소설 등. 이 모든 수식들이 <다섯 번째 계절>에 해당될 것이다.


<다섯 번째 계절>은 제미신의 3부작 소설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1부작이다. 제미신은 흑인 작가로는 2016년 최초로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데 이어 같은 시리즈로 다음 두 해까지 연이어 수상했다. 60여년 역사의 휴고상 수상자는 오랫동안 백인 남성 작가가 주류를 이뤘다. 지난해 열린 휴고상 시상식에서 제미신은 “제가 이 상을 받는 이유는 무척이나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실력이 아니라 ‘정체성의 정치’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거대하고 빛나는 로켓 같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제미신은 이어 트로피를 높이 들어올렸다.


경향신문과 e메일로 인터뷰를 나눈 제미신은 “백인 남성 작가들이 SF와 판타지 소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백인, 비남성 작가들이 조금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수십년간의 차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좋은 시작”이라고 말했다.


“작품을 쓸 때 영향을 받은 사건은 2014년 여름 미주리에서 벌어진 퍼거슨 사태일 겁니다. 미국이 스스로를 잡아먹는 듯하다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어떤 이들이 끝없이 다른 이들을 먹잇감으로 여길 때,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그 의문이 작품에 반영됐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사람을 희생시키기 때문에 말 그대로 끝없는 종말에 갇혀 버린 세상 말입니다.”


퍼거슨 사태는 백인 경찰이 18세 흑인 청년을 총격으로 살해한 사건으로 촉발됐다. 흑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경찰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제미신은 “대부분 평화적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들이 작은 마을 거리에 들어서는 광경을 보고 마음이 찢어졌다. 경찰이 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딱지나 영장, 고지서를 남발했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내게는 차별을 거부할 특권이 없었다

지난해 휴고상 시상식에서 N K 제미신이 트로피를 높이 들어보이고 있다. 유튜브 캡처 영상.

<다섯 번째 계절>엔 이 같은 분위기가 반영됐다. ‘고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초대륙, 이곳엔 최소 반년, 길게는 수세대가 지나도록 지진이 일어나는 재해의 시기인 ‘다섯 번째 계절’이 있다. 인류 중에는 지진과 관련된 에너지를 조종하는 능력인 ‘조산력(造山力)’을 지닌 ‘오로진’이라는 종족이 있다. 이들은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로 여겨져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로가’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오로진이라는 것이 알려진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펄크럼이란 기관에서 교육받고 관리받는 오로진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도구화되고 착취받는다.


소설은 작은 마을에서 오로진의 능력을 숨기고 살아가다 아들을 잃고 길을 떠난 에쑨, 부모에게 버림받고 펄크럼에 가게 된 다마야, 펄크럼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선 시에나이트 등 세 여성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에쑨의 세 살배기 아들은 아들이 오로진임을 눈치챈 아버지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고, 에쑨은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쫓는다. 다마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관리하는 ‘수호자’를 따라 펄크럼으로 향한다. ‘수호자’는 다마야를 지켜주는 따뜻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다마야의 손을 부러뜨린다. 시에나이트는 펄크럼에서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것은 우수한 능력을 가진 오로진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다. 오로진이라는 종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이 더해진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온 제미신의 작품답다.


“ ‘억압’이란 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제가 백인 남성 작가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죠. 그들에게는 인종차별·성차별 같은 시스템적 결함을 무시할 특권이 있는 반면,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제가 바로 이 주제를 택한 이유입니다.”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 제미신이 내놓은 답변이다.


실제 제미신은 흑인 정체성을 내세운 작품 때문에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가 쓴 첫 장편소설 <킬링 문>은 고대 이집트를 무대로 주요 캐릭터는 거의 흑인이었다. 하지만 여러 출판사가 책 출판을 거절했다. 제미신은 “이 작품을 어떻게 팔지 모르겠고, 누가 살지도 모르겠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래서 대부분 캐릭터가 백인인 소설 <십만 왕국>을 썼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킬링 문>도 펴낼 수 있었다”며 “결과적으로 <킬링 문>은 선인세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주었고, 여러 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제미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트럼프 당선 이전에도 미국은 보수적이었고, 그래서 그가 당선된 것이다. 미국은 1800년대 일어난 남북전쟁의 사상적·정치적 여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국민, 인류 구성원으로서의 발전을 저해하는 낡은 사고란 짐을 떠안고 있다”고 말했다.

"내게는 차별을 거부할 특권이 없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지질학적 지식에 기반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제미신은 “오랫동안 화산이나 판구조론 같은 지질학에 관심이 많았다. 재미 삼아 혼자 공부하다 나사(NASA)가 후원하는 워크숍인 ‘런치패드’에 참여했다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결정적인 건 내가 꾼 꿈이었다. 한 여성이 떠오르는 산을 뒤로한 채 내게 걸어왔다. 아주아주 화가 난 상태였고, 왠지 그 여성이 산을 내게 던져 버리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에쑨, 다마야, 시에나이트 세 여성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오로진을 둘러싼 비밀이 풀리고,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한다. 그 과정에 드러나는 펄크럼의 오로진에 대한 착취는 충격적이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사회적 이슈를 근사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 이 작품은 제미신이 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거대한 산’과 같은 한 방이 있는 소설이다. <다섯 번째 계절>은 전 세계 20여개국에 판권이 팔리고,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후속작 <오벨리스크 관문>(가제)과 <돌빛 하늘>(가제)은 국내에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