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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초록빛 바람’ 부는 가파도, 자연 속을 걷는 마라도··· 제주 ‘섬 속의 섬’ 여행

by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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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에서 배로 10분이면 닿는 새끼섬 가파도에는 결 다른 제주의 매력이 있다.

섬에서 다시 섬을 찾았다. 관광지 분위기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제주 본섬과 달리 딸린 섬들에는 더 소박하고 자연적인, 그래서 마음 푸근해지는 풍경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섬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 녹아 있는 문화유산과 독특한 먹거리도 항상 눈길을 끈다.


푸른 보리밭이 가득 펼쳐진 5월의 가파도는 무르익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파도에서 조금 더 아래로 떨어진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도 신록은 이미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제주도를 더 깊이 만나기 위해 ‘섬 속의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키 작은 섬의 신성한 돌


가파도는 제주도 서남쪽 끄트머리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섬이다. 배로 불과 10분이면 닿는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매일 여객선이 오가는데 매년 4~5월 청보리 축제가 열릴 때면 배편이 늘어나 더 쉽게 갈 수 있다.


가파도는 키가 작다. 가장 높게 솟은 땅이 해발 20여m에 불과하다. 구릉 하나 없이 나지막한 섬은 산책하기에 딱 좋다. 가파도 주민들은 여객선 선착장과 가까운 북쪽의 상동마을과 남쪽 포구의 하동마을에 몰려 사는데, 두 마을을 잇는 길이 바로 제주올레 10-1 코스(4.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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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은 섬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상동과 하동 두 마을이 자리 잡은 땅을 제외하면 전부가 보리밭인 셈이다.

길은 해안가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것이냐 섬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것이냐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어느 쪽으로 가도 섬 경치를 즐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쉬엄쉬엄 걸으며 구경해도 좋고 포구 앞에서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아도 좋다. 풍경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걸음을 옮기다 보면 눈에 띄는 게 마을의 돌담이다. 제주의 집집마다 두른 돌담이 검은 현무암인 것과 달리 가파도 돌담은 색이 제각각이다. 바닷물에 깎이고 닳은 마석(磨石)을 써서 그렇다. 크기가 다른 돌을 성기게 쌓아 틈으로 바람이 잘 빠지게 했다. 허술해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돌담은 오랜 세월 섬에 적응하며 얻은 생활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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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대원사의 해수관세음보살상.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불상의 외관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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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을 온통 뒤덮은 보리밭에 서면 바람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색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파도 바닷가엔 특별한 돌이 많다. 북서쪽 해안의 보름바위는 큰 바람을 일으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높이가 4m쯤 되는 보름바위에 함부로 올라가거나 걸터앉으면 태풍이 불어 마을에 재난이 닥친다고 믿는다. 하동포구 인근의 까마귀돌 역시 같은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돌이다. 남쪽 바닷가의 고냉이(고양이의 제주말)돌은 폭풍에 생선이 떠밀려 오기를 기다리던 고양이가 굶주림에 지쳐 바위가 되었다는 설화가 깃든 돌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초록빛 바람


보리밭을 빼놓고 가파도를 묘사하긴 힘들다. 섬 면적의 3분의 2에 이르는 땅이 보리밭인데, 해마다 3월부터 5월까지 청보리 푸른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보통 보리보다 키가 두 배쯤 큰 가파도 청보리 품종 ‘향맥’을 키워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제는 씨가 끊겼고 요즘은 찰보리와 맥주보리 두 종류를 주로 심는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일어선 보릿대가 카드섹션 하듯 차례로 고개를 숙이며 일렁대기 시작한다. 햇빛을 받은 보리수염이 초록에서 연두로 다시 노랑으로 변화무쌍 반짝이는 모습은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보리밭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바람에도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녹색 바람은 파도 치는 바다 풍경만큼이나 시원하게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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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희 작가의 유화 ‘청보리와 초록바람’

마침 가파도 마을 강당에선 우선희 작가의 ‘4월의 바람’ 전시회(5월31일까지)가 열리고 있었다. 경북 상주 출신으로 2012년부터 제주에 사는 우 작가는 가파도 보리밭을 잔뜩 그렸다. “넓게 펼쳐진 보리밭. 내가 마음 놓고 그리던 벽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보리밭 한쪽에 좌판을 편 김순덕 할머니(77)에게 직접 농사지은 보리로 만든 미숫가루 한 봉지를 샀다. 김 할머니는 12살 때 안덕면 사계리에서 가파도로 시집왔다고 한다. 일흔이 되도록 물질을 하며 식구들을 먹여살렸고 몇 해 전 뇌출혈이 온 뒤론 바다농사나 조금씩 지어 관광객들에게 판다고 했다. 다음에 가파도를 찾으면 김 할머니가 직접 딴 돌미역과 가시리, 톳을 맛보겠노라 속으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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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식당의 돌문어짬뽕. 돌미역과 가시리, 뿔소라 등 섬 바다에서 난 것들이 듬뿍 담겼다.

여객선 시간에 맞춰 포구로 돌아가기 전 중국음식을 파는 식당 ‘오멍 가멍 쉬멍’에서 허기를 달랬다. 홍해삼(2만원)과 돌문어짬뽕(1만원), 뿔소라구이(1만원)를 시켰다. 섬 바다가 단숨에 입속으로 밀려들었다.


식당 벽에는 손님들이 끄적인 낙서가 가득했다. “61번째 생일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여행 와서 해물모둠 한 접시와 소주 두 병에 세상이 내 것인 것처럼 너무 좋다.” 양산에 사는 배모씨가 남긴 말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있을 건 다 있는, 국토 최남단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모슬포에서 11㎞ 떨어져 있다. 역시 운진항에서 여객선을 타는데 뱃길로 30분이 걸린다. 아침부터 서두르면 하루에 가파도와 마라도를 모두 다녀오는 것도 가능하다.


마라도는 연평균 풍속이 초속 6m다. 겨울엔 바람이 평소보다 두세 배 강해져 소형 선박은 아예 정박이 불가능할 정도다. 커다란 유람선이 뒤뚱뒤뚱 살레덕 선착장에 닿으면 섬 가장자리로 20~30m 높이의 해식애(절벽)와 커다란 해식동굴이 늠름한 자태를 먼저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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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해녀들이 제를 지내는 할망당

선착장에서 언덕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을 마치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는 장소인 ‘불턱’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칼을 사정없이 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계속 걷다 보면 바닷가 쪽으로 돌을 쌓아올린 할망당과 만난다. 애기업개당이라고도 부르는 할망당은 마라도 해녀들의 안전과 어민들의 풍어를 비는 당이다. 행여 바람에 날릴까 지폐와 과자를 돌로 꾹꾹 눌러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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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는 섬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문화재다. 백로가 노니는 언덕 너머로 바다 건너 산방산이 보인다.

바람 때문인지 마라도에서 키 큰 나무는 찾아보기 힘들다. 너른 들판엔 바닷가 모래밭에 흔히 자라는 연보랏빛 갯무와 노란 괭이밥이 작고 예쁜 꽃망울을 낮게 터뜨리고 있었다. 멀리 가파도와 제주 산방산이 내다보이는 언덕배기에선 백로 두 마리와 마주쳤다.


육지는 물론 제주 본섬과도 거리가 멀고 사람 왕래가 드물어 해양생태계가 잘 보존된 마라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423호)이다. 단 한 차례 조사에서 10종이 넘는 미기록종 동물이 발견됐을 정도로 학술적 가치가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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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최남단비 앞 장군바위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섬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는 1915년 처음 불을 밝힌 등대가 서 있다. 등대 앞에는 남아프리카 희망봉 등대, 호주 매콰리 등대, 미국 보스턴 등대 등 전 세계 유명 등대를 축소한 조각들이 전시돼 볼거리를 제공한다.


등대 아래로 전복 껍데기 모양을 한 마라도 성당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인증샷의 명소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여기도 분명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시위라도 하듯 마라도엔 교회와 성당, 절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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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튼 마라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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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부터 영토 최남단을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마라도 등대

■만리향 꽃향기 취하는 환상의 산책로


가파도와 마라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제주 본섬에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도 송악산 둘레길을 추천하는 건 길 자체가 제주에서 첫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제주 최남단 오름인 송악산은 화산으로 폭발한 분화구 안에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 봉우리가 생긴 이중화산체다. 주위에 기생화산도 많이 발달해서 99봉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른 아침 안개에 잠긴 모습도 저녁 노을 지는 모습도 하나같이 절경이라 조선시대부터 유람객이 줄을 잇던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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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을 따라 둥글게 이어진 송악산 둘레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산과 바다를 양쪽에 낀 절경이 이어진다.

지금은 오름 둘레로 나무데크 길을 설치해 노약자도 편하게 다닐 수 있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고, 무엇보다 양쪽에 산과 바다를 낀 절경이 이어져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기 바쁘다.


산책로 주변에 무성한 돈나무에는 갈라져 나온 줄기마다 새끼 손톱만 한 작고 하얀 꽃들이 수북이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이 산책 내내 코끝을 간질였다. 돈나무 꽃은 향이 만리까지 간다고 해 만리향이라고도 부른다. 꽃말은 ‘꿈속의 사랑’.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풍경과 꽃향기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걷는 내내 꿈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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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 왼쪽의 작은 섬이 마라도, 오른쪽 큰 섬이 가파도다.

송악산엔 능선을 따라 일제강점 말기 지어진 동굴진지가 60여개나 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제주를 저항기지로 삼으려 했던 흔적이다. 물론 대부분 진지는 끌려간 선조들이 만든 것이다. 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다크투어’의 장소로 알려진 송악산에 이제 ‘환상의 산책로’라는 찬사가 더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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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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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최남단 오름인 송악산은 화산 폭발로 형성된 지형을 잘 보여준다.

최근 송악산 일대에서 중국 자본이 호텔 등 유원지를 조성하는 개발사업을 추진하며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으면,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주변에 알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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