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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5)

모진 고통 꾹꾹 눌러 울음 토하듯…운명처럼 찾아와 분신이 된 ‘토지’

by경향신문

박경리


“지독한 가난, 어머니에 대한 연민, 아버지에 대한 증오…

고독은 책과 함께 공상의 세계 쌓아올려”


한국전쟁 소용돌이 속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도 작별…

쓰는 일은 그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인기나 출세에 무심했던 작가,

철저히 남성 중심인 문단의 부조리와 차별에 끝까지 맞서

25년을 굽이쳐 흐른 ‘강물’ 같은 이야기…

살아남은 ‘딸 하나’ 서희는 박경리 선생을 꼭 닮았다

경향신문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젊은 시절의 모습(왼쪽 사진)과 노년에도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모습. 그는 “소설이란 삶이 지속되는 한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말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토지> 제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 암이라는 진단에 의해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수술 첫날 병실 창가에서 동대문 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참 긴 무지개였었다. 아마 나를 데려가려나 보다, 하고 나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


사는 게 많이도 힘드셨나 보다.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다 암 선고를 받은 시점이 “<토지> 제1부를” 연재 중이었다는 사실에 시선이 머물렀다. 만약 박경리라는 위대한 작가를 일찍 잃어 버렸다면 <토지>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고, 나를 비롯한 <토지>의 독자들은 크게 슬펐을 것이다. 그러자 <토지> 서문이 다르게 읽혔다. 대하소설 <토지>로 출사표를 던진 박경리의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박경리는 자신에게 솔직했다. “나는 현재 지쳐 있습니다.” 다행히 박경리는 <토지>로 다시 돌아왔다.


“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박경리는 퇴원하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것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러운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박경리가 ‘현대문학’에 1969년 6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토지>는 각 부마다 연재 지면이 바뀌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1994년 총 5부 16권으로 완간되었다. 집필 시간만 25년, 원고지로는 3만1200장 분량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박경리는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했고, 일찍이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았다. 세월이 흘러 진주여고 졸업반이 된 박경리는 어렵게 아버지를 찾아가 대학 입학 등록금을 이야기했지만, 뺨만 맞고 돌아왔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도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극심한 가난도 어린 박경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민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 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 그래도 박경리는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다만 그 “물결”은 어김없이 거칠고도 잔인했다.


1946년 결혼한 박경리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편을 잃었고, 몇 년 후에는 어린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다. 참척의 고통은 혼자만의 몫이었다.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암흑시대>는 아이를 홍제동 화장터에 갖다 버리고 돌아온 날부터 책상에 달라붙어 쓴 것이고, <불신시대>는 아이를 잃은 후 거미줄처럼 보이지 않게 인간들을 휘감아오는 사회악과 형식화되면서 위선의 탈을 쓴 종교인과 인간 정신이 물체화되어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쓴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박경리는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하나의 어린 생명이 부당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없어졌다는 일은 도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사건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슬픔을 겪으면서도 박경리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았고, 더 큰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품위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부조리한 억압과 차별에 끝까지 맞서는 용기도 잃지 않았다. 박경리는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글쓰기로 실천했다. 살롱처럼 운영되고 있었던 남성 작가 중심의 문단을 박경리는 ‘불신’했다. 남성의 체험은 값진 문학적 소재로 평가하면서 여성의 이야기는 사소한 신변잡기로 취급하는 평단에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실전을 경험하고 전쟁 이야기만 늘 쓰는 남성 작가에게는 왜 사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는가.”


가끔 위로하듯 좋은 일도 있었지만, 기쁨은 짧았다. 박경리는 1958년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한 다음다음 날 또다시 화재라는 액운을 만나 사과궤짝의 살림살이나마 다 날려버렸다. 그때 마침 딸아이는 중학교 입시의 시기였으므로 울었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박경리는 글을 쓰고 또 써서 “영화 원작료다, 인세다, 원고료다 하며” 돈을 벌었다. 박경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구러 하는 동안 나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디다 쓴 일도 있지만 소설가란 내게 천직이었던 모양으로 나는 어떤 직장이든 붙어 있질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박경리를 걱정했다. “김말봉 선생님께서도 신문사를 그만둔 일을 꾸중하셨고 내 자신도 어쩔 참인지 다만 막막하기만 했다.” 박경리는 교사, 은행원, 기자 등의 직업을 가졌지만, “소설가”라는 “천직”만을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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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제공

박경리는 이른바 ‘인기’나 ‘출세’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학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의심과 자문자답은 나를 허황하게 흩뜨려놓고 보다 깊은 고독과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는 경향을 짙게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호열자(콜레라)로 외가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딸 하나가 살아남아 집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자신을 맴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박경리는 “딸 하나가 살아남아” 집과 땅을 어떻게 되찾는지 그 이야기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박경리의 분신이 아닐까? 읽을 때마다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어렵게 살아남은 “딸 하나”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빼앗긴 ‘토지’를 결국 되찾고야 마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토지>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 서희는 ‘토지’를 되찾는 데 만족하지 않고,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며 평사리를 정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공동체로 변모시켜 간다. 그 공간이 우리 앞에 실제로 펼쳐졌다.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앙면 평사리 “최참판댁”은 소설 속 풍경 그대로 만들어졌다.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박경리는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연 박아무개의 의도라 할 수 있겠는지,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누군가”의 실체는 무엇일까? 박경리는 평사리에서 소설의 운명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시가 나를 찾아왔어.” 파블로 네루다가 실토했듯이, 박경리도 알아차렸다. <토지>가 박경리를 찾아왔다. 그러므로 박경리에게는 쓰는 일만이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박경리의 딸은 어머니가 어떤 작가였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 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에는 한 번씩 창자가 끓어지듯 우셨어요. (…) 어머니는 마치 온몸을 부숴 버릴 듯 통곡을 하시고 난 다음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정하게 앉아, 그야말로 모질게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드시곤 했습니다.” 한평생 많이 슬프고 크게 아팠던 박경리는 그 고통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글을 써 내려가며 그 무엇에도 “눌리지는 않으리라는 독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2008년 4월 박경리는 마지막 시를 남긴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모진 세월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다. 억울하고 혹독했던 시간들과 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살기 위해서 박경리는 소설을 썼다. “소설이란 삶과 생명의 문제이며, 삶이 지속되는 한 추구해야 할 무엇이지요.” 글 쓰는 여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필자 장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