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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예쁜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낡아서 더 좋은 길은 여기에만 있다

by경향신문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푸른 초원 끝에서 만난 이 도시엔 투박하고 푸근한 정서가 풍긴다

노천식당이 늘어선 넓은 길을 지나 혈관 같은 좁다란 골목을 거닐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바가 반긴다

한때는 번성했던 왕가의 도시, 지하철은 짓다 말아 입구만 남았고 트램과 버스만 덜컹거리며 달린다

유명하지도 않고 존재감도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매력적이다

경향신문

낡은 도시지만 옅은 파스텔톤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경향신문

칠이 벗겨진 중세풍 건물과 젊은 배낭여행자, 한적한 도로를 오가는 빨간 트램은 브라티슬라바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브라티슬라바에 가기로 한 건 지금 머물고 있는 빈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직선 거리로 60㎞, 최단거리 도로로도 80㎞밖에 안되니 서울에서 춘천 가는 거리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올 법한 푸르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다 정확히 1시간10분 후 도착했다. 브라티슬라바 중앙역은 우리로 따지면 서울역인데 군청 소재지의 버스터미널처럼 작고 초라하다. 역 밖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배낭여행자들이 벤치에 앉아 싸구려 케밥에 콜라를 먹고 있었다. 슬로바키아는 물가가 싸서 유럽의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선호하는 나라라 했다.


처음 찾아간 도시니까 여행자들이 누구나 간다는 명소로 발길을 옮겼다. 구글맵으로 보니 역에서 올드타운까지는 2㎞가 채 되지 않아 걷기로 했다. 낡은 도시의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과 녹슨 철로, 뒤엉켜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 먼지가 가득 쌓인 창, 여기저기 흩어진 담배꽁초. 우중충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가는데 마법처럼 파스텔톤의 중세풍 집이 연달아 나타났다. 근사하게 돌을 깔아놓은 골목이 나오니 슬슬 여행할 기분도 올랐다. 잔디가 곱게 깔린 프랑스 정원풍의 공원도 있었다. 뜨거운 햇빛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잔디 위에서 웃통을 벗어젖히고 휴일의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일요일,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엔 새소리가 크게 들렸고 꽃향기가 묵직했다.

서울? 전혀 몰라요

슬로바키아는 대부분 고지대라 한여름에도 많이 덥지 않지만 이상하게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6월 초부터 이어졌다. 경복궁 격인 브라티슬라바성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빛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어서 카페에 들렀다. 주인 아가씨는 여기선 그런 미국적인 것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어디서 왔느냐는 말에 “서울, 코리아”라고 화답하니,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나도 아무것도 모르고 왔으니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긴 동양인이 많지 않고, 있어도 중국인이고, 게다가 동양인 여자가 혼자 다니는 경우는 별로 없는 동네다. 슬로바키아에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커피를 마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에스프레소가 아니면 카페라테나 비엔나커피같이 설탕이나 크림 등이 들어간 커피를 마셔야 한다. 민트향이 첨가된 담배를 극도로 싫어하는 애연가처럼 나 역시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본연의 커피만을 원했지만 쉽게 구하진 못했고 그렇게 열흘 하고도 하루가 지난 상태였다. 맑은 아메리카노를 갈구하는 금단 증세가 오고 있었다.


커피는 포기하고 곧바로 슬로바키아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구시가지는 프라하의 올드타운처럼 중세풍의 건물로 빼곡하지만 훨씬 규모가 작고 낡았다. ‘낡았다’는 말은 브라티슬라바와 꼭 어울린다. 낡은 도시엔 투박하고 푸근한 정서가 있다. 이건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장소를 빗대 말하기는 힘들고, 도시에서 풍겨오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올드타운의 넓은 길 좌우엔 노천식당이 늘어서 있고 잔가지처럼 연결된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가면 좀 더 아기자기하다. 테이블을 한두 개 정도 꺼내놓은 작은 카페와 바가 있어서 운치가 있었다. 적당한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전통 요리 중에서 추천해주세요” 했더니 하얀 요리와 빨간 요리가 나왔다. 하얀 요리는 감자 전분으로 수제비처럼 작게 반죽을 떠 양젖 치즈를 얹어 먹는 할루슈키. 건강식 느낌이 많이 났지만 느끼해서 다 먹긴 힘들었다. 빨간 요리는 양배추와 소시지를 걸죽하게 끓여낸 수프인 카푸스트니차였다. 부대찌개 맛이 났다. 입에도 잘 맞고 훌륭했다. 슬로바키아 맥주를 단숨에 비워냈다.


도시에 유일하게 남은 성문인 미하엘 탑문은 요정이 나와 춤을 출 것 같은 생김새로 올드타운 위에 쑥 튀어나와 있어서 나침반 역할을 한다. 색 바랜 초록 지붕은 헝가리, 체코에서 많이 보던 스타일이다. 외국에서, 특히 아름다운 곳에서 혼자 밥을 먹게되면 쓸쓸하다. 가볍게 끼니를 때울 땐 초라해서 외롭고, 작정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는 좋은 요리 앞에서 말할 상대가 없어 스마트폰만 친구 삼는 내 모습이 서글프다. 여행 중에 밥을 혼자 먹는 것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늘 어렵다.

예드노 피보, 프로심!(맥주 한 잔 주세요)

경향신문

구시가지는 워낙 작아 이정표가 있어도 거의 볼 일이 없다. 정처 없이 걸어도 웬만한 명소는 다 마주치게 된다. 맨홀에 빠진 사람을 표현한 조각 옆에선 누구나 익살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피보바(Pivovar)는 슬로바키아어로 브루펍이라는 뜻인데 양조장과 레스토랑이 공존하는 곳이어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올드타운 안에선 찾기 어려웠고 대신 현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펍을 찾아 나섰다. 혈관처럼 이어진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작고 어두운 펍은 주택 1층이나 지하에 있었다. 가라오케를 겸하는 곳도 있고 LP바, 스트립바 펍도 있었지만 들어가기엔 서먹서먹했다. 대부분 입구에선 신촌의 오래된 디스코텍에서 풍기던 곰팡내가 올라왔다. 그런 데서는 얼굴이 벌게진 서양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다가 내가 입장하면 다 같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메뉴를 고르는 척하다가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실내가 어둡기도 했고, 어깨에 맨 수백만원짜리 카메라가 매번 걱정거리였다. 그들의 말과 제스처, 눈빛은 사실 별 뜻이 없었을 텐데도 혼자 여행을 다니면 이런 감정이 자주 생긴다.


여행자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부러움에 대한 몽니 같은 건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로 때때로 외롭다. 특히 펍에서. 현지 분위기 속으로 쑥 들어가보고 싶어서 용기를 내면 자주 좌절하니까. 그렇다고 관광객이 버글거리는 데서 마시고 싶지도 않다. 어두침침한 바 너머로 써 있는 큰 글씨. ‘로컬비어 한 잔에 0.75유로.’ 1000원밖에 안 하는 맥주가 눈에 아른거리니 서글퍼졌다. 그걸 포기하고 나오다니. 나는 왜 여자이고 더 용기를 내지 못하나.


뮌헨이 생각난다.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브로이하우스에서 당당하게 학센(독일식 족발 요리)과 화이트소시지, 그리고 맥주를 혼자 먹었다. 웨이터는 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과한 친절을 베풀었다. 어깨에 손을 얹고 내 옆을 지나갈 때마다 윙크를 했고 소시지를 직접 썰어주었다. 이런 친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매번 고민한다.


“남자는 참 좋겠네. 여행 가서 아무 데서나 맥주도 마시고 밤늦게 다닐 수 있어서.” 남자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 “남자는 유럽에서 아무도 친절하게 대해주질 않아. 술 먹다가 괜히 시비도 붙어. 남자라고 딱히 좋은 건 없더라.” 그래, 누구나 여행지에서는 이방인이고 소외된 사람이지. 누군가는 여행이 워낙 피곤한 일이라 ‘주 7일 근무’라고도 했다. 여행지에선 누구나 서툴기 때문에 낯선 길 위에선 누구나 젊은이이기도 하다. 떠나고 돌아오고 떠나는 것을 반복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똑 부러지게 답할 사람이 있을까. 완벽한 여행이란 완벽한 삶이나 완벽한 사랑처럼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떠날 수밖에.

낡은 도시에서 보낸 일요일 오후

경향신문

안전하지만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세 군데서 각각 다른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상냥하고 예쁜 아가씨가 운영하는 펍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폭이 아주 좁은 노란색의 낡은 건물 1층.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왼쪽으론 슬로바키아 국기가 걸린 붉은 벽돌의 성벽이, 오른쪽으로는 다뉴브강의 남북을 잇는 SNP다리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1.9유로짜리 맥주 한 잔에 어마어마한 걸 누렸다. 헝가리 왕국 시절 왕의 대관식이 열렸다는 성 마틴 성당에선 듣기 좋은 종소리가 뎅뎅 울려 퍼졌다. 낡은 슬로바키아 정서를 잘 담은 소리였다.


올드타운은 몰락한 왕실 가문처럼 처연하기도 하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만 없다면 거리는 늦가을처럼 쓸쓸했을 것이다. 낡은 건물은 손볼 생각이 없는 건지 오랫동안 방치된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파란 성당이 있다기에 찾아가려 했지만 작은 골목의 유혹에 빠져 결국 길을 헤매다 가지 못했다. 이정표는 없지만 곳곳에 와이파이존이 있는 점은 의외였다. 프라하에서 자주 보던 마리오네트 인형이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가 하면 체코에서 수시로 먹던 길거리 빵 ‘트르들로’ 가게도 쉽게 눈에 띄었다. 헝가리 전통음식으로 알려져 있는 굴라시도 많이 팔았다. 체코와 헝가리 그리고 슬로바키아는 서로 뒤엉켜 하나의 나라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한 역사 때문에 전통음식이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렵다.


내가 권하는 브라티슬라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브라티슬라바는 서울처럼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는데, 남쪽을 보면 20세기 중반 서민을 위해 지은 아파트촌이 마치 은마아파트나 잠실5단지처럼 빽빽하게 서 있다. 서울처럼 유서 깊은 명소는 북쪽에 옹기종기 모여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다뉴브강 남쪽으로 건너갈 일은 거의 없다. 멀리서 바라본 회색톤의 아파트촌은 몰락한 사회주의를 짐작하게 하고 붉은색 지붕이 펼쳐지는 올드타운은 촌스러워서 사랑스럽다.


브라티슬라바. 지하철도 짓다 말아서 입구만 덩그러니 남은 도시. 빨간색 트램과 버스만이 전깃줄에 매달려 덜컹거리며 다닌다. 길거리 연주자의 바이올린 소리에도 보헤미안의 정서가 느껴진다. 동유럽이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중부유럽에 속하는, 한때 번성했던 왕가의 도시. 낡아서 유명해지지도 못했고 오스트리아와 체코 사이에 끼어 존재감도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점 때문에 브라티슬라바가 매력적이다. 낡은 도시의 일요일, 추억은 밀도가 높았다.


김진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