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푸드 ] 지극히 味적인 시장(12)

바다만 봐도 배 부르고…바라만 봐도 군침 도는…유월의 영덕

by경향신문

영덕군 영해 오일장

봄맛은 떠나고 여름맛은 도착하지 않았을 때, 영덕에서 만난 특별하지 않은 ‘별미’…

꽁치물회·옻닭개장·한우불고기

경향신문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영덕 석동포구 방파제. 강구항에서 대진항을 지나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약 30㎞의 해안도로 곳곳 작은 포구마다 맛을 품고 있어 영덕까지 가는 먼 길이 덜 수고스럽다.

경상북도 영덕으로 가는 길, 짙푸른 산자락 군데군데가 밤꽃으로 하얗게 물들어 있다. 밤꽃은 첫 장마가 오기 전 마지막 밀원(蜜源)이다. 민통선 안에서 따는 엄나무꿀 빼고는 밤꿀 채취로 한 해 꿀 농사가 얼추 끝난다. 밤꽃이 떨어질 즈음이면 내리는 빗방울도 굵어진다. 장마의 시작이다.


영덕으로 가는 길이 한결 편해졌다. 서울에서 거리상으로는 대구나 광주 가는 것과 비슷하지만 시간상으로는 두 배 가까이 걸렸다. 13년 전 대게 때문에 영덕을 찾아가던 멀고 멀었던 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에서 출발해 몇 시간 걸려 안동에 도착한다. 안동에서 영덕으로 가는 옛길로 몇 개의 산과 고개를 넘고 계곡을 지나는 사이 서너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가야 겨우 영덕에 도착했었다. 아니면 대구까지 간 다음 포항을 경유해서 영덕으로 올라가곤 했었다. 산길로 가는 것보다는 편하고 소요 시간은 비슷했지만, 아무튼 먼 길이었다. 영덕 가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시간상 존재했던 거리감이 사라졌다. 지금은 청주에서도 두세 시간이면 영덕에 도착한다.


2019년 시작이다 싶더니 벌써 유월이 끝나간다. 유월, 식품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시기다. 날이 더워지면 채소는 봄의 단맛이 사라지고, 여름의 맹한 맛이 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여름작물이 나오기 전이라 가격만 비싸다. 바다도 수온이 서서히 오르며 나던 생선이 들어가고 여름 생선이 나오는데 그 맛이 별로다. 계절에 따라 나는 것을 작기(作期)라고 한다. 봄 작기에서 여름 작기로 바뀔 때가 유월 즈음이다. 봄의 것은 끝물이라 맛없고, 여름 것은 첫물이라 맛이 야물지 못하다. 다양한 것이 나지만 크기나 맛은 기대만큼은 아닌 시기가 딱 지금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의 영해 오일장은 5, 10일에 장이 선다. 영덕읍은 4, 9일에 열리지만 영해 오일장 규모의 반도 안될 정도로 작다. 보통은 군청 소재지가 있는 곳에서 열리는 장이 더 크지만, 영덕은 반대다. 예전에는 부산, 대구의 도매상들이 영해장에서 살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하니 그 유산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듯싶다. 바다를 끼고 있는 오일장은 수산물을 파는 곳과 농산물을 파는 곳이 나뉘어 있다. 영해장도 마찬가지로 구분돼 있지만 조금 달랐다. 수산물을 파는 기다란 상점가의 절반이 회를 팔고 있었다. 수족관의 생선을 고르고, 흥정하고, 회를 뜨는 게 일반적이다. 영해장에서 한 바구니씩 산다. 채 썬 채소는 덤이다. 바구니에 담긴 회는 물가자미다. 초장만 따로 사서 비비면 바로 회밥이 되고, 차가운 물을 부으면 물회가 된다.


시장 곳곳에 보리비빔밥 파는 식당이 많다. 보리비빔밥집에서 일정 금액만 내면 보리밥과 함께 먹을 수도 있다. 두세 명 먹을 양이 1만원이라 부담이 적다. 그렇다고 맛까지 덜한 것은 아니다. 가자미가 다른 회에 비해 월등히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별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는 횟감이다. 흰살 생선에 아삭한 채소와 초장을 더해 비비면 모든 생선의 맛은 같아진다. 초장의 맛을 이기는 생선회는 없다. 기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라 초장에 비벼 먹는다면 저렴한 것이 낫다.


“타박이 감자가 분나는 감자인가요?” 슬쩍 감자 파는 상인에게 물었다. “모델료 줘야 하는데… 맞아요, 찌면 하얗게 분나는 수미감자. 옆에 거는 반찬용은 추백.” 겨울과 봄에도 감자는 나지만 쪄 먹는 감자는 여름이 제격이다. 여름 감자의 시작은 백두대간의 끄트머리 영덕, 청송, 봉화에서 시작한다. 기온이 올라가면 감자 산지도 백두대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유월 말과 칠월 초 가장 맛있는 감자는 경북에서 나온다. 이후로 소백산 자락의 괴산, 단양 그러고는 삼복더위에는 대관령 주변에서 나온다. 어디 감자가 가장 맛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시기에 따라 가장 맛있는 곳이 달라진다. 한 가지 더, 수미감자가 분이 난다고 하지만 두백, 남작, 하령만큼 분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먹는 감자 대부분이 수미라 특별하지도 않다. 만일 쪄 먹는 감자 중에서 맛난 것을 고른다면 두백, 남작, 하령으로 사면 좋다. 지역명에 품종까지 더해 검색하면 맛있는 감자를 고를 수 있다. 단 이들 감자는 볶는 용도는 안된다. 채 쳐서 볶으면 엉겨 붙는다. 찌거나 닭볶음탕, 감자탕 용도로는 최고다.


황도, 백도, 천도 복숭아 세 가지는 누구나 구별한다. 세 가지 큰 구분 안에 수천 가지 복숭아 품종이 있다. 일주일 단위로 복숭아는 같은 농원 안에서도 품종이 바뀐다. 이번주에 먹었던 맛있는 복숭아는 같은 생산자이더라도 다음주면 못 먹는 게 바로 복숭아다. 복사골 마을이 있을 정도로 나름 복숭아로 유명한 곳이 영덕이다. 필자도 몇 년 전 유기농 복숭아를 찾아 영덕에 오기도 했다. 복숭아는 냉장고하고는 상극이다. 냉장고에 오래 두면 단맛이 강한 과당이 포도당으로 변해 단맛이 떨어진다. 상온에 보관하다가 먹기 몇 시간 전에 냉장고에 두었다가 먹어야 오롯이 단맛을 느낄 수 있다. 오일장터를 떠나 영해면 임랑마을에 있는 농가를 찾았더니 끝물 천도복숭아를 내줬다. 천도가 끝물이 아니라 천도복숭아 품종 중 하나가 끝물이다. 천도복숭아를 베어 무니 입안을 파고드는 단맛에 여름이 있었다. 복숭아가 제철이다.

경향신문

회밥으로 먹다가 찬물 부으면 그게 바로 ‘물회’.

3년 전, 영덕 출장길에 물회 생각이 났다. 구불구불 해안도로를 다니며 마음에 드는 집이 있나 보다 보니 강구항부터 고래불해수욕장까지 해안 길을 왕복하고 있었다. ‘결정장애’로 인한 시간 낭비, 기름 낭비를 하다가 대진해수욕장 근처 어느 세월이 깃든 물회 전문 간판을 보고 결정을 했다. 그런데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우린 2인분 이상만 팔아요.” 전국을 다녔지만 물회를 2인분 이상이라며 거절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조금 지나 작은 포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배고파서 더 운전하기도 힘들어 들어갔다가 제대로 된 집을 만났다. 바로 직전 거절당한 것도 있는지라 혼자인데 가능한지부터 소심하게 타진했다.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물회를 주문했는데 살얼음 가득한 물회가 아니었다. 회와 채소가 가득 든 그릇에 고추장만 덩그러니 있었다. 비벼 먹다가 시원한 물을 붓고 먹으면 회밥이 물회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아마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물회의 탄생 설화, 뱃일하다가 잡은 물고기를 썰어 채소와 비며 먹었다는 물회가 이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물회의 재료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처음에는 횟대였고, 작년에는 가자미였고 올해는 도다리였다. 같이 나오는 찬 중에서 식해가 맛있는 집인데 이번에는 없었다. 돌고래횟집(054-732-2805)

경향신문

축산항에서는 꽁치도 물회의 주인공이 된다.

싱싱한 모든 수산물은 물회의 재료가 된다. 육수에 갖은 채소, 그리고 횟감이면 물회 한 그릇 완성이다. ‘모든’에서 빠지는 것이 붉은살 생선. 물론 산 고등어로 물회를 하기도 하지만 흰살 생선만큼 다양하지는 않다. 옥돔, 전복, 자리돔, 오징어, 가자미, 광어, 갑오징어 등이 전국 각지에서 물회의 주인공 행세를 하지만 영덕 축산항에서는 꽁치도 물회 주인공이다. 영덕에서 독도 근해까지 가서 잡은 꽁치를 선상에서 포를 떠서 급랭한 것을 사용한다. 꽁치를 넣은 물회는 왠지 비린내가 가득할 것 같지만 선입견일 뿐 비린내는 없고 고소함만 있다. 급랭한 꽁치가 해동될 때 품고 있던 고소함이 같이 풀린다. 양념과 채소를 잘 섞은 다음 잠시 시간을 두면 제대로 된 꽁치 맛을 즐길 수 있다. 천천히 먹을수록 고소함이 배가 된다. 융창수산펜션(054-733-5291)

경향신문

영덕에서 난 옻을 넣은 옻닭개장은 국물이 일품.

영덕시장에 닭집이 있다. 통닭집은 아니고 닭개장과 옻닭을 판다. 옻닭은 보통 한 마리 단위지만 여기는 한 그릇이다. 닭개장과 닭곰탕을 내면서 옻닭도 따로 판다. 옻닭의 국물은 보통의 닭 국물과 다르다. 고소함이 있다. 국물을 마시면 묘하게 당기는 맛이 있다. 옻은 영덕 주변의 산에서 채취한 것을 주로 쓴다. 닭곰탕에는 엄나무를 넉넉히 사용한다. 기사식당에서 닭곰탕을 먹으면 닭고기에서 잡내가 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집은 국물만큼 고기 맛도 깔끔하다. 닭개장(구 돈도니 054-733-9969)

경향신문

‘단짠’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아성식당 불고기.

영덕시장 근처 아성식당은 한우 불고기집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고기비빔밥 식당이기도 하다. 불고기를 주문하면 깔리는 찬이 딱 비빔밥 하기 좋은 것들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고 육수가 끓으면 간장종지 안에 든 노른자를 터트려 먹을 준비를 한다. 익은 고기를 먼저 먹어 본 뒤 소스에 찍은 고기를 먹고, 그다음으로 소스에 찍은 고기와 밥을 함께 먹어 보면 왜 불고기에 노른자가 든 간장을 따로 주는지 감이 잡힌다. 불고기 양념은 달다. ‘단’ 불고기를 ‘짠’ 소스에 찍으니 ‘단짠’이다. 노른자가 고소함으로 단짠을 받쳐준다. 불고기 양념을 처음으로 단짠단짠하게 한 것과는 다른 맛이다. 맛이 전체적으로 짜면 그 음식은 짠맛이 지배한다. 짠 소스에 고기를 찍으면 찍은 부분만 짜다. 짠맛은 단맛을 강하게 하는 조미료가 된다. 불고기를 먹다가 나온 반찬과 고추장 넣고 비비면 한우 불고기비빔밥이 된다. 불고기만 파는 식당이지만 DIY로 덮밥도, 비빔밥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다른 메뉴 없이 불고기 메뉴 하나만 판다. 맛보고 나면 다른 메뉴가 필요 없음을 안다. 아성식당(054-734-2321)


영덕 하면 대개들 대게를 떠올린다. 대게는 여름에는 대개 맛없다. 대게가 없다고 영덕이 ‘앙꼬 없는 찐빵’이 되지는 않는다. 강구항에서 대진항 지나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약 30㎞의 해안도로 그 곳곳 작은 포구마다 맛을 품고 있다. 영덕과 영해 시장도 지나치면 안될 맛집이 많다. 영덕 바다는 동해의 어떤 곳보다 푸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필자 김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