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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

⑧창조성에 고도의 스킬과 판타지 그리고 황활한 맛

by경향신문

스페인의 디스프루타르

 

전 세계적 미식문화 주도권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와


한때 세계 최고의 식당이었던

엘불리 수셰프 3인방이 차린

디스프루타르는 믿고 찾을 만해

 

미식문화를 선도하는 레스토랑

진면목이 오감으로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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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그리고 리치와 진의 애피타이저로 입가심

“미식여행으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나라는 어디인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스페인이라고 답하겠다. 왜 프랑스가 아니냐고? 프랑스는 미식의 개념과 문법을 정립하고 전 세계에 전파한 원조국의 위상을 가진 곳이기는 하다. 지금도 전 세계의 고급 식당들은 프랑스식 음식 문법을 바탕으로 지역적인 재료와 요리법을 재해석해 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적 미식문화의 주도권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영국의 가디언을 포함한 권위 있는 언론들도 프랑스인 셰프들을 포함해 수많은 음식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는 수십년째 똑같은 음식만 내고 있는 ‘낡은 유럽’이다, 이제 유럽에서 가장 창의적인 요리는 스페인에서 볼 수 있다 등등. 내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지금 스페인의 식당들이 프랑스보다 훨씬 창의적이며 이른바 가성비가 압도적으로 좋다. 여행을 하면서 음식을 즐기기에 적합한 흥미로운 요소들도 더 많다.

문 열면 바로 주방이 나오는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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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아와 민트 면의 마지막 디저트 먹고 마무리

그렇다면 스페인 미식문화의 진수를 맛보려면 어느 식당으로 가야 할까? 2011년까지만 해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나의 답은 엘불리(El Bulli)였다.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들도, 최고의 음식평론가들도 입을 모아 지구상 최고의 셰프라고 추어올린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a) 셰프가 이끌던 곳이다. 그러나 2011년에 갑자기 폐업을 해버려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엘불리에서 일했던 셰프들이 스페인 곳곳에서 그 DNA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디스프루타르(Disfrutar)는 엘불리의 수셰프 3명이 나와 차렸고, 순식간에 최고로 인정받은 곳이니 믿고 방문해도 좋다.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며 구글맵에 뜨는 근처 식당들을 눌러보다가 평점이 4.8인 곳을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그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구글맵을 이용해본 결과 5점 만점에 평점이 4.0을 넘으면 아주 맛있는 곳이며, 4.4를 넘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무려 4.8이라니! 미쉐린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1스타(2017년)였다.


미쉐린 스타를 받으면 온갖 트집을 잡으며 깎아내리는 리뷰들이 늘어나고 평점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의 리뷰들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칭찬 일색이었다. 대체 왜? 엘불리에서 일했던 3인방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가. 가보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식당 입구는 평범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바로 주방의 가운데 복도여서 깜짝 놀랐다.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쪽 주방 사이로 지나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셰프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는 구조였다. 메뉴는 클래식, 그랑 클래식, 페스타, 그랑 페스타 이렇게 테이스팅 메뉴 4가지뿐이었다. 그랑 클래식 코스를 시켰다. 프랑스에서는 테이스팅 메뉴가 4코스, 6코스 정도인 곳이 많지만, 스페인은 10코스가 넘는 곳이 많다. 그런데 가격은 더 저렴하다. 그랑 클래식 코스는 메뉴판만 보면 소박하게(!) 11코스만 나올 것 같지만, 11코스 각각이 2∼3가지 요리로 구성되어 있다. 즉, 실제로 나온 요리는 20가지가 넘는다. 덕분에 서비스가 아주 빨랐는데도 식사에 거의 4시간이 걸렸다. 이곳의 메뉴들은 한 접시 한 접시 살펴보는 재미와 충격이 클 것이므로 자세히 소개한다. 오늘날 가장 트렌디한 파인 다이닝이자 예술의 경지에 이른 분자요리를 대표하는 곳이니까.

땅에서 솟아난 요리…식탁 행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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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같은 분자요리와 상상 초월한 토끼 분자요리

디스프루타르의 요리는 대략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의 흐름을 따르긴 했지만, 전통적인 형식에서는 벗어난 것이 많다. 제일 첫 코스인 ‘패션프루트, 럼(rum), 커피와 함께 얼린 칵테일’부터 그렇다. 아이스크림처럼 얼린 칵테일 위에 패션프루트로 만든 거품을 올리고, 그 위에 커피가루와 커피 원액 한 방울을 얹은 것이었다. 디저트에나 나올 법한 재료들을 과감하게 애피타이저에 쓰되, 분자 수준에서 질감을 가볍게 바꾼 분자요리였다. 다음 코스는 ‘땅에서 솟아나온 비트’였다. 직원이 초콜릿색 모래만 가득 든 투명한 통을 들고와 갑자기 크게 돌렸더니 모래를 뚫고 빨간 덩어리가 올라왔다. 정말 땅에서 비트가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행위예술이라 할 만했다. ‘장미잎에 올린 리치와 진’은 빨간 장미잎에 올린 하얀 열대과일 리치와 이슬처럼 올려놓은 진(gin) 한 방울의 비주얼이 압도적이었다.


‘망고와 소금을 넣은 캔디, 통카 콩과 위스키’, ‘신선한 송어 알과 다양한 작은 생선 얼린 것’ 다음에는 ‘올리브를 즐겨라’가 나왔다. 초록 올리브와 검정 올리브가 하나씩 나온 것처럼 보였는데, 먹어보니 올리브처럼 보이는 분자요리였다. 씹으니까 바삭한 껍질이 깨지면서 올리브와 올리브유를 기막히게 조합한 즙이 나왔다. 직원이 단번에 먹으라고 할 만했다. 이 분자요리는 셰프들이 일했던 엘불리에서도 유명한 메뉴였다고 한다. 이어 나온 ‘이디아사발 밀푀유’는 바스크 지역 특산 치즈인 이디아사발(Idiazabal)로 만든 밀푀유(파이의 얇은 틈 사이에 크림을 넣은 케이크)를 사과와 샐러리를 간 즙과 함께 내어왔다. 직원이 시킨 대로 밀푀유를 한 입 먹고 즙을 마셨더니, 바삭한 식감 속에서 고소한 치즈맛과 상큼한 즙이 동시에 터졌다.


‘이디아사발 밀푀유’와 그 뒤에 나온 ‘버섯 젤라틴과 바삭한 계란 노른자’, ‘푸아그라와 콘 타르트’는 각각 담겨나온 바위 위 나무판, 사다리 위 통, 딤섬 찜통 등 모두 특별히 제작한 접시(!)가 돋보이는 설치미술이라 할 만했다. 다음에 나온 분자요리들은 분자 수준에서 음식을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듯했다. ‘해체한 세비체’는 페루 등 중남미 지역의 날생선 샐러드인 세비체(ceviche)의 맛을 크림과 오일이라는 전혀 다른 물질에 잘 담아냈다. 이어 나온 ‘마카로니 카르보나라’는 젤라틴으로 만든 가벼운 마카로니(작은 대롱처럼 생긴 파스타)에 카르보나라 거품을 뿌리고 치즈를 갈아 뿌려서 맛과 시각적 재미는 그대로 즐기되 배는 부르지 않게 했다. ‘토마토 폴보론(Polvoron·밀가루, 돼지기름, 설탕으로 만든 스페인 케이크)과 아르베키나(Arbequina) 오일 캐비어’는 아르베키나 지역의 올리브 오일로 만든 캐비어가 들어간 작은 빵이었고, ‘액체 샐러드’는 말 그대로 샐러드를 액체화한 것이었다.

전 세계 식재료 재해석한 고유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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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프루타르 문을 열자마자 나타나는 오픈키친.

‘성게와 다시유바, 간장 와인 페어링’은 일본 식재료의 특성을 명확히 알고, 그걸 다시 디스프루타르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을 과시하는 메뉴였다. 직원이 알려준 먹는 법이 어찌나 섬세하던지. “다시유바(두유 크림 껍질) 위에 성게알을 올려 핀셋으로 싸먹되, 그 자체로는 강한 맛이 없으니 와인잔에 담긴 3년 숙성된 일본 간장을 입술에 묻히고 드세요.” 이어 나온 가재와 생선 요리는 맛에만 집중한 듯 그나마 평범한 형식이었다. 그 후 상상도 해보지 못한 토끼 분자요리 2가지가 나왔다. ‘타라곤을 넣은 차가운 토끼 주스’는 타라곤(향신료)을 넣은 토끼 수프를 가져온 뒤 그 자리에서 오렌지 껍질, 얼음, 아르마냐크(Armagnac·브랜디의 일종)를 분무해 넣은 것이었다. ‘토끼와 푸아그라 봉봉’은 토끼 고기와 푸아그라를 봉봉(견과류, 과일, 술 등에 설탕, 초콜릿을 입힌 사탕)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락사’(Laksa)는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의 매운 국수를, ‘모로코 스타일 비둘기’는 모로코의 비둘기 요리를 변형한 요리였다. 곳곳에서 글로벌한 식재료를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디저트는 무려 5가지가 나왔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했다. ‘망고 셔벗 샌드위치’는 빵을 바스라지는 식감을 가진 물질로 대체해서 가볍고 청량했다. ‘치즈케이크 트럼펫’은 안에 술이 들었는데, 풍부한 치즈맛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초콜릿 피망과 오일, 소금’은 초콜릿으로 피망을 만들고 소금과 오일을 함께 낸 귀여운 분자요리였다. 카탈루냐의 어린이 디저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변형해서 만든 것이라 했다. 초콜릿 위에 소금을 뿌려 먹는 맛이 의외로 조화롭고, 이 식당이 자리한 카탈루냐주의 정체성까지 강조한 마무리 같아 거듭 감탄이 나왔다. ‘위스키 타르트’는 촉감까지 이용한 디저트였다. 위스키를 들고 오더니 손을 씻으란다. 그리고 유자 아이스크림을 먹고 위스키 냄새를 맡고, 액체가 쏟아져나오는 봉봉을 먹은 뒤 또 냄새를 맡으란다. 마지막은 ‘코코아와 민트 면’이었다. 면으로 만든 솜덩이들 사이로 숨어 있는 코코아와 민트를 따먹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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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프루타르 내부. 소박하고 실용적인 인테리어라 편안하다.

나는 2017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얼마 전 오픈하자마자 미쉐린 1스타를 받았다는데, 조만간 2스타에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랭킹에 올라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2018년과 2019년에 미쉐린 2스타를 받았고, 2019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에서 무려 9위로 뛰어올랐으니까. 미쉐린 가이드북도 “창조성, 고도의 테크닉 스킬, 판타지 그리고 근사한 맛”이라고 소개하는 곳이니 만큼 3스타가 되기 전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지금 전 세계의 미식문화를 선도하는 레스토랑이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감으로 전해져올 것이다.


필자 이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