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먹고 자는 동안에도…‘철로 위 호텔’은 추억 싣고 달린다

[여행]by 경향신문

국내 유일의 호텔식 관광열차 ‘해랑 레일크루즈’ 체험


객실엔 침대와 화장실 등 완비

카페칸엔 음료·다과 상시 준비

이벤트칸에선 공연 열리기도


여정 내내 승무원들 밀착 서비스

방문 지역 주요 관광지 구경과

특산음식 맛보는 호화로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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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은 무궁화호를 개조해 호텔처럼 꾸민 고급 관광열차다.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고 특산음식을 맛보는 맞춤형 여행을 할 수 있다.

기차여행은 안전하고 편리하다. 비행기나 자동차에 비해 연착이나 사고 위험성은 낮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즐길거리도 많다. 코레일은 벚꽃축제열차, 해돋이열차 같은 지역테마열차를 비롯해 전국을 잇는 철도망으로 다양한 관광열차를 운영하는데, 그중 으뜸은 단연 ‘해랑’이다.


호화유람선을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크루즈를 본떠 ‘레일크루즈’라고 부르는 해랑은 2008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국내 유일의 호텔식 관광열차다. 무궁화호를 개조해 스위트·디럭스(2인실), 패밀리(3인실), 스탠더드(4인실) 등 4가지 객실을 마련했다. 객실에는 텔레비전과 냉장고, 테이블이 있고 샤워실이 딸린 화장실도 있다. 수건 등 세면도구도 완비돼 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쉼없이 흘러가는 풍경은 기차여행의 묘미를 살린다. 열차 가운데엔 카페칸과 이벤트칸이 있다. 카페칸에는 다양한 음료와 다과가 항상 준비돼 있고 맥주와 와인 등 주류를 무제한 제공한다. 대형 모니터와 음향기기, 소파 등이 구비된 이벤트칸은 승무원들의 공연 등이 열리는 객차 안 놀이방이다.


해랑은 순천·부산·경주·정동진·동해·추전 등 전국을 한 바퀴 도는 2박3일 코스와 동부권과 서부권의 도시 3곳을 각각 돌아보는 1박2일 코스를 운영한다. 승무원들이 여정 내내 따라다니며 안내를 돕고, 방문하는 지역에선 주요 관광지 구경과 함께 특산음식을 맛보는 호화스러운 여행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1인 기준으로 1박2일 상품은 48만5000~96만5000원, 2박3일은 약 75만~145만원에 이른다. 어지간한 해외 패키지여행 상품보다 비싼데, 과연 돈값을 하는 걸까?


해랑의 주요 고객은 효도여행객과 외국인 관광객이다. 광고를 따로 하지 않는데도 평균 객실 이용률이 70%를 상회한다. 정규코스 외 여름 바캉스나 해돋이 상품 등은 3~4개월 전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재구매율도 30%나 된다. 수치로 증명된 인기를 검증해보기 위해 직접 해랑 열차에 타봤다.

추억과 향수를 담은 기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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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청색 외관에 봉황이 새겨진 해랑 열차, 해랑 승무원들의 난타 공연.

서울역에서 KTX가 아닌 다른 기차를 타려니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짙은 청색 외관에 봉황 문양을 단 기차는 오전 9시30분 서울역을 출발했다. 곧바로 이벤트칸에서 승무원들의 환영공연이 시작됐다. 가야금을 전공했다는 승무원의 전통음악 공연을 시작으로 남녀 승무원이 어울린 아카펠라 공연과 난타 공연이 이어지자 박수소리와 함께 객차 안이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창밖으로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점차 사라지고 초록빛 전원 풍경이 나타났다. 떠났다는 실감이 천천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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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맥주 등 주류와 다과가 무료로 제공되는 카페칸, 커다란 침대와 샤워시설이 딸린 해랑 객실.

이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에 해랑 열차는 KTX처럼 빠르게 달리지 않는다. 기차는 오후 1시쯤 군산역에 닿았다.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준비된 관광버스로 옮겨 탔다. 미리 나와 있던 해설사가 가는 길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첫 목적지였다. 박물관 3층의 근대생활관에는 일제 수탈의 역사와 민중의 생활상이 실감나게 재현돼 있었다. 인력거꾼들이 손님을 기다리던 차방(車房), 당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던 경성고무의 만월표 고무신을 판매하던 군산의 형제고무신방 등 재밌는 공간이 많았다.


박물관을 구경한 뒤엔 경암동 철길마을로 향했다. 길이 2.5㎞의 철길은 신문용지를 만드는 제지회사가 원료와 완제품을 실어나르기 위해 1944년 만든 것이다. 매일 오전 두 번씩 화물기차가 오갈 때마다 철로에서 1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집에선 사람들이 뛰쳐나와 널어놓은 고추, 빨래 등을 걷어 가는 진풍경이 펼쳐지던 곳이다. 2008년 기차 운행을 멈춘 뒤엔 쇠락한 옛 마을 풍경을 그대로 살려 관광지로 변모했다.


골목 곳곳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불량식품’이 즐비하고,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10곳이 넘는 교복대여업체에서 교복에 모자, 가방, 신발, 이름표, 완장 등 각종 소품까지 빌리면 7000원, 전문 사진가가 사진촬영까지 해주면 1만원이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해랑 승무원들이 “왼쪽에서 네 번째 버스”라며 버스 위치를 일일이 알려줬다. 아직은 젊은 기자도 휴게소 같은 곳에서 타야 할 버스를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하물며 효도관광을 온 승객들에게 이런 서비스가 얼마나 마음을 파고들지 쉽게 짐작이 갔다.

놀고 먹고 자면서 달리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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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군산선의 간이역이었던 임피역.

이어 들른 곳은 임피역이었다.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작은 기차역이 들어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위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임피역은 군산선의 간이역으로 1910년대 후반에 지어졌는데,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수송해 일본으로 빼내가는 통로 역할을 했던 장소다. 서양 간이역과 일본식 가옥을 결합한 역사는 건축적 가치가 높아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역사 한편에는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형상화한 조각작품이 놓여 있다. 식민 치하에서 무력한 삶을 이어가던 지식인 주인공이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는 대신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맡기는 바로 그 장면이다.


일행은 버스로 이동해 익산역에서 다시 해랑에 탑승했다. 관광지에서 기차로 돌아올 때마다 카페칸에는 새로운 간식이 준비돼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국내 최남단 기차역인 여수역에 도착했다.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여수해상케이블카를 탔다. 여수항 쪽의 탑승장에서 돌산공원 산기슭까지 약 1.5㎞를 이동하는 동안 해안선을 끼고 도는 여수 밤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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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만그루의 소나무가 울창한 장항송림산림욕장, 여수해상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바라본 여수 밤바다.

밤 늦게 여수를 떠난 기차는 다시 북으로 달렸다. 장항역에 도착해 객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객차 안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서천땅을 밟았다. 밀복 맑은탕으로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고 장항송림산림욕장으로 향했다. 바닷가 바로 옆에 60여년 전에 조성했다는 송림엔 13만여그루의 키 큰 소나무가 빼곡했다. 숲 바닥엔 연보랏빛 맥문동 꽃이 비단처럼 깔려 있어 산책길에 운치를 더했다. 솔숲 중간에 서 있는 커다란 시비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시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서천 출생인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1’이었다. ‘풀꽃 2’도 있는 줄은 시비를 보고 처음 알았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서천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인 국립생태원까지 둘러보고 기차는 다시 장항역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승무원들의 이벤트가 열렸다. 노래와 마술쇼로 분위기를 띄운 후 퀴즈가 이어졌다. 본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맞춰 부산을 출발해 평양에서 북한 응원단을 태우고 베이징까지 가는 국제열차로 개발됐던 해랑의 과거 이력 등이 문제로 출제됐다. 가장 많은 문제를 맞힌 승객에겐 와인과 기념품 등 선물이 주어졌다. 여행 동안 찍은 사진들은 USB에 담아 제공됐다. 천안역, 수원역, 영등포역 등 서울역에 닿기 전에도 몇 차례 하차할 수 있었다. 10회 이상 탑승한 고객이 여럿 있다는 얘기에 수긍이 갔다.

단풍·힐링 테마로 2박3일…해랑, 가을 특별상품 운행

해랑은 올가을 단풍과 힐링을 테마로 2박3일짜리 특별상품을 운행한다. 단풍 테마열차는 서울을 출발해 단양, 안동, 대구, 청도, 순천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다. 첫 목적지인 단양에선 만천하 스카이워크를 구경하고, 안동 하회마을에선 안동소주로 전통주 체험을 한다. 식사로는 유기농 찜갈비 정식과 한정식이 제공된다. 둘째날은 대구 동화사를 구경한 뒤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고, 청도에서는 와인터널에서 감으로 만든 와인을 맛본다. 마지막 날은 순천에서 순천만 국가정원을 관람하고 전통 한방체험을 한다. 꼬막 정식과 장어구이 정식 등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에서의 식사가 예정돼 있다. 가격은 디럭스 객실(2인) 기준 263만원. 출발일은 10월22일과 11월5·12일이다.


10월29일 딱 한 번 출발하는 힐링 테마열차는 서울을 떠나 순천, 대구, 경주, 정동진, 평창을 거쳐 서울로 귀환하는 일정이다. 순천에서 낙안읍성과 송광사 등 유명 관광지를 들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시작한다. 송광사에선 차담과 108배를 경험하고 저녁에는 광양불고기를 먹는다. 둘째날엔 대구와 경주를 차례로 들른다. 대구에선 찜갈비 정식에 이어 팔공산 케이블카와 동화사 참선을 체험한다. 경주에선 불국사·대릉원 등 시내 구경을 하고, 한정식을 맛본 뒤 신라 역사를 다룬 뮤지컬 공연을 관람한다. 마지막 날은 정동진에서 일출을 감상하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한다. 정동진 레일바이크를 타고 나서 평창으로 이동해 오대산 월정사와 전나무숲을 산책한 뒤 산채정식으로 마지막 식사를 한다. 가격은 단풍 테마열차와 동일하게 디럭스 객실(2인) 기준 263만원으로 책정됐다.


코레일은 기업 연수나 워크숍, 세미나, 손님 접대 등 단체고객의 행사 목적에 맞게 코스와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맞춤형 전세열차로도 운행한다. 문의는 코레일관광개발(1544-7755)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2019.10.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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