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성형’ 선구적 의사는 왜 이단자로 몰렸나

[컬처]by 경향신문

르네상스 성형수술


르네상스 때 매독 기승…안장코 늘어 코 성형 수요 급증


외과교수 탈리아코치, 팔에서 피부를 두 줄 절개해 한쪽 끝을 손상된 코에 이식

코에 피부가 재생되면 연결된 팔의 피부를 잘라내 어떤 흉도 생기지 않았다


재건성형 외에 미용성형도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

교회는 창조자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그의 사후 교회 묘지 매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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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코 성형 수요가 급증했다. 매독이 유행하면서 균에 감염된 태아 등 감염 환자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콧대가 내려앉는 소위 ‘안장코’ 피해자들이었다. 볼로냐대 외과 교수이던 가스파레 탈리아코치는 그들의 불행을 덜어주려 코 성형을 ‘재건성형’에 포함시키고, 팔의 피부를 이용하는 코 재건성형술(위 일러스트)을 사용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주인공은 흉측한 외모 탓에 항상 숨어 지낸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앞에 설 때면 가면을 쓴다. 그가 숨어 살면서 유령으로 오해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몰골 때문이다. 가스통 르루(1868~1927)의 원작 소설 <오페라의 유령>에 따르면 “그저 죽은 자의 해골에 박혔을 법한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 두 개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얼굴 정중앙에 위치한 코가 사라지거나 상처를 입으면 사람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그렇다. 그는 코가 없어 유령이 되었다.


코를 재건하는 성형 기술은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다. 고대 중국의 5대 형벌 중 하나인 의형으로, 서구 고대 부족에는 점령당한 후 패배의 상징으로 코를 베는 형벌이 있었다. 집행 절차도 간단한 데다 감옥에 비해 비용 절감 효과도 많았기에 이 형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코가 잘리더라도 그 떨어져나간 살점을 주워 되도록 빨리 붙이면 다시 복원되는 경우가 더러 있자 형을 집행하는 당국은 잘린 콧등을 불에 태워 버렸다. 이것은 육체보다 훨씬 더 큰 심리적 상처, 수치심과 모욕감을 심어놓았다.


이미 기원전 800년부터 인도에 이런 일이 생기자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 ‘수슈루타’라는 의사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코 재건에 성공한다. 검투 경기의 열기가 높았던 로마 제정기에도 코가 잘린 전사들이 의사에게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르네상스시대 ‘안장코’ 피해자들

웬일인지 르네상스가 되어 이탈리아에서 코 성형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다. 오래전부터 성질 급한 귀족들 간에 결투를 하거나 고약한 전쟁 탓에 코가 베인 사람들도 많았지만, 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코가 녹아내리는 감염 환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매독이 기승을 부리면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균에 감염된 태아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은 콧대가 내려앉는 일명 ‘안장코’ 피해자들이었다. 피해 증상은 무시무시했다. 보기 흉한 궤양이 생기는가 싶더니 곧 피부가 무감각해지고, 점진적인 궤사로 코 밑에 있는 연골 또는 뼈 조직이 약해지면서 코가 내려앉게 된다. 심지어 코뼈가 얼굴에 파고들어 살이 썩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대는 매독균에 의해 구멍만 남은 코를 성적 부도덕의 낙인이라 여기면서 ‘낮은 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생겼다. 도덕적 타락과 육체적 부패를 상징하는 수치스러운 이 ‘흔적’을 지우려는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정은 의사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28년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까지 매독은 불치병이었고, 매독에 걸린 환자를 돕는 방법은 성형밖에 없었다.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성형수술

그렇다면 고대에 코를 재건하는 성형은 어떤 방법이었을까? 코 성형에 대한 공식적인 첫 저작은 볼로냐대학교 외과교수이며 해부학자였던 가스파레 탈리아코치(1545~1599)가 라틴어로 쓴 <이식재건성형론>이다. 탈리아코치는 재건성형과 미용성형을 구분하고, 코 성형을 재건성형에 포함시키면서 그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다.


당시 볼로냐를 비롯한 유럽의 의과대학들에서 가르치는 교육 과정은 그리스어와 아랍어로부터 라틴어로 번역된 문헌에 바탕을 두었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나 헬레니즘시대 갈레누스의 저술들, 그리고 아랍, 특히 11세기 페르시아 아비첸나(이븐 시나)의 <의학규범>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탈리아코치의 성형은 고대의 수술을 그대로 답습만 하지 않은 독창적인 방식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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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 의사 수슈루타의 의학서 <수슈루타상히타> (왼쪽 사진)와 프랑스의 외과의사 앙브루아즈 파레(1510~l590)의 성형술 경험을 기록한 목판화(오른쪽).

이탈리아에서의 코 성형은 이미 15세기 초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시작되었다. 외과의들은 위에서 말한 고대인도 의사인 수슈루타의 책으로 알려진 <수슈루타상히타>에 소개된 방법과 유사한 기술을 사용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도에서는 이마의 피부를 사용했지만 카타니아 지역 외과의사, 특히 브랑카는 뺨의 피부를 사용했다. 뺨의 피부 일부를 잘라내고 일부는 뺨에 붙어 있게 한 채 코에 밀착한 후 일정 기간 혈액이 공급되게 하였다. 손상된 부위에 피부를 꿰매어 놓았기 때문에 코에 적합한 ‘덮개’가 재생된다. 하지만 뺨이 되었든, 이마가 되었든 얼굴에 흉터가 남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브랑카의 아들 안토니오는 얼굴 피부가 아닌 팔 피부를 사용하게 된다. 팔에서 피부를 두 줄로 절개한 후 늘어진 피부 사이에 리넨 드레싱을 넣어둔다. 약 2주 후에 늘어진 피부의 한쪽 끝을 잘랐다. 한쪽 끝이 팔에 연결된 늘어진 피부를 코 단면의 피부를 벗기고 손상된 코에 이식했다. 다시 환자의 팔은 약 2주 동안 붕대를 사용하여 고정된 채 이식된 피부는 코 모양을 형성하게 된다. 코에 피부가 제대로 재생되면 팔에서 ‘코’에 연결된 피부를 잘라낸다. 여섯 차례의 수술과 4주 이상의 기간이 걸리는 훨씬 더 복잡하고 번거로운 성형이었지만, 얼굴 피부엔 어떤 흉도 생기지 않았다. 탈리아코치도 이와 같은 코 재건 성형술을 사용했다.

성형수술 박해와 수도사들의 엉터리 수술

하지만 탈리아코치의 성형수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방 쇠퇴하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에서 코 성형이 사실상 금지되었으며, 다음 몇 세기 동안 이탈리아를 비롯한 그 밖의 유럽에서 재건성형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일찍부터 미용성형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미 14세기 프랑스 궁정의사였던 앙리 몽드빌(1260~1320)은 <외과론>(1314)을 남겼다. 원래 계획한 5부 중에서 2부만 저술하고 폐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죽은 몽드빌은 ‘남녀의 미용’에 관한 장에서 ‘젊어지는 방법’ ‘얼굴과 머리 손질’ ‘탈모 방지’ ‘가슴 성형’ 등을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미용성형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린다. 또한 프랑스의 이발 외과의 출신인 앙브루아즈 파레(1510~l590)는 베인 상처를 접합할 때 수술 자국을 남기지 않는 방법을 고안해 얼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그는 피부를 직접 꿰매지 않고, 상처 양쪽에 붙인 연고를 바른 천을 꿰매어 피부를 접합했다. 상처 부분을 직접 바늘로 꿰매는 기존 방법에 비해 흉터가 그리 흉하게 남지 않아 획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미용성형은 프랑스에서도 명성이 퍼지고 있던 탈리아코치의 재건성형을 통해 성형기술이 진일보하게 된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재건성형 기술을 미용성형에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인간의 외모를 고치는 것을 창조자에 대한 모독과 불경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무지와 미신, 시샘과 적의에서 비롯된 경쟁자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급기야 탈리아코치는 죽은 후에 이단으로 몰려 교회 묘지 매장을 거부당했다.


성형수술이 유행하기 조금 전 유럽은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 타락도 극에 달했다. 이런 모습을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년경~1516)는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살던 스헤르토헨보스시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수도사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일반 시민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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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1494년경 그린 ‘바보 치료’.

그 한 예로 1494년경 보슈가 그린 ‘바보 치료’가 수도사들의 무지와 억지스러운 주장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수도사들은 바보들 머릿속에는 돌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이들은 우의적 상징과도 같은 ‘돌머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똑똑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돌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그림 속에서 수도사로 보이는 외과의사는 남자의 머리를 날카로운 칼날로 구멍을 내고 있다. 아마도 돌을 끄집어내고자 수술하는 것 같다. 물병을 들고 있는 수도사는 뭔가 불안해 보이며, 수녀는 머리에 책을 얹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수술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보슈는 이 그림을 통해 엉터리 치료법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수도사들을 비판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엉터리 치료법이 급기야 탈리아코치의 성형수술보다 더 많이 행해진다.

미란돌라의 ‘자율적 자기 변신’

탈리아코치는 사람의 외모를 바꾼 이단자로 낙인찍혔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억울한 사정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오해를 불식시킨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탈리아코치가 저술한 책을 통해 항변했다.


우리는 자연이 선사했지만 운명에 의해 빼앗긴 부분을 복원하고, 재건하고, 그리고 온전케 합니다. 이는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입니다.(탈리아코치, <이식재건성형론>에서)


탈리아코치는 누구든 코가 없다면 반드시 불행할 것이며 이 불행은 사람을 충분히 병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굴과 성격, 몸과 마음을 연결 짓는 많은 이론을 주장했다. 그가 목표로 삼는 것은 단지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미용’이 아니라 육체의 본래 형태, 즉 이상적인 형상(forma)을 재창조하는 ‘재건’이었다. 미용성형 이전에 자신의 이상적인 형상에 대한 재건이 먼저라는 주장이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탈리아코치의 이런 사상을 그보다 한 세기 먼저 살았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에게 받은 영향으로 본다.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와 그 사상들을 익히고 수사학, 시학, 철학, 신학을 공부한 젊은 미란돌라는 ‘자율적 자기 변신’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1486년 24세 때 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담아, 우리는 네게 어떤 자리도, 고유한 얼굴도, 특별한 선물도 주지 않았으니, 네가 원하는 자리와 얼굴과 선물을 너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소유하게 함이라. (…) 그것은 제 존재를 마음껏 자발적으로 바꾸고(plastes) 구성할 수 있는 네가, 형상을 원하는 대로 온전히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미란돌라,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연설>에서)


미란돌라나 탈리아코치는 인간이란 각자 자기 몸에 대해 갖고 있는 형상으로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존재라 확신했다. 인간이 진정 자유롭다면 그 형상을 향한 자기 변신과 끊임없는 운동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탈리아코치는 친구들의 변호 덕분에 산 조반니 바티스타 수도원묘지에 이장되었다. 어쩌면 그는 땅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수많은 변신을 거치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탈리아코치가 생각한 성형은 미용 이전에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형상을 향한 수많은 변신 중 하나였다. 우리는 어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우선 “제 존재를 마음껏 자발적으로 바꾸고 구성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형상을 그려 보자. 그리고 변신에 도전해 보자.


이제 그동안 바쁘다고 후순위로 내려놓았던 운동에 나서야겠다. 숨이 벅차오를 때 상승하는 맥박과 몸의 온기를 통해 변하는 내 몸의 상태를 느껴야겠다. 그렇다. 내가 꿈꾸는 내 몸의 형상은 곧 내 자유의 시작이다.


김동훈

2020.02.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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