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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네 엉덩이에 불 붙었어. 새빨간 거짓말쟁이야”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론들

by경향신문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시사월간지 ‘애틀랜틱’의 기자들, 진보성향의 격월지 ‘마더존스’의 편집장, 공화당에 비판적인 칼럼니스트가 한 자리에 모였다. ‘트럼프 시대와 언론의 신뢰’라는 주제로 열린 언론인들의 토론장에서 사회를 맡은 ‘텍사스 트리뷴’지 사장이 누구보다 적절하고 시니컬하게 이들을 소개했다. “망해가는 신문의 기자와 사기꾼 같은 기레기, 가짜뉴스잡지의 편집장, 클린턴에 빌붙어 이야기나 지어내기 좋아하는 칼럼니스트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달 21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온라인저널리즘심포지엄(ISOJ)’에서 있던 일이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지난달 21일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에서 열린 국제온라인저널리즘심포지엄(ISOJ)에서 진보성향의 격월지 ‘마더존스’의 클라라 제프리 편집국장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패널 머리 위 화면에 “가짜 뉴스 매체들이 선거 이후 더 나빠지고 있다. 모든 기사들이 나쁘게 편향됐다. 우리는 그들이 진실을 말하게끔 해야한다”고 쓴 트럼프 트위터 화면이 띄워져 있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사회를 맡은 에반 스미스 ‘텍사스트리뷴’ 사장, 매케이 코핀스 아틀란틱 기자, 소판 뎁 뉴욕타임스 기자, 클라라 제프리 마더존스 편집장, 맷 루이스 칼럼니스트(왼쪽부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망해가는(failing)’이란 수식어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뉴욕타임스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다. 지난 2월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망해가는 뉴욕타임스 등 가짜 뉴스 미디어들은 내 적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망해가는 신문사’의 소판 뎁은 애틀랜틱지 기자 매케이 코핀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매케이는 트럼프로부터 ‘쓰레기 같은 녀석(scumbag)’, ‘사기꾼(phony guy)’이라 불린다. 매케이는 트럼프가 뉴욕시장 선거에 뛰어들겠다며 정치판을 기웃거리던 2014년 트럼프 비판 기사를 썼다가 그에게 영원히 찍혔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비판의 날을 세우는 매케이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20세기 여성노동운동가 ‘마더존스’의 이름을 딴 격월지 마더존스의 클라라 제프리 편집장과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선출한 공화당을 멍청하다고 힐난한 칼럼니스트 맷 루이스도 연단에 섰다. 청중들도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위해 중국, 필리핀, 러시아, 캐나다, 호주,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전세계에서 모인 언론인들이니 이날 텍사스 대학에는 정년 ‘미국인들의 적’만 득실댔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CNN, 뉴욕타임스, CBS 등 주류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거론하며 자신의 트위터에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뉴스 매체로 나의 적이 아니라 미국인의 적”이라고 썼다. | 도널드 트럼프 트위터 캡처

트럼프의 타블로이드

“트럼프 당선의 책임이 언론에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미 언론은 어떻게 변해야 하나요?” 사회자의 질문에 뉴욕타임스 기자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앞서 뉴욕타임스는 백악관 대변인 비공개 브리핑에서 CNN 등과 함께 퇴출되는 일도 겪었다. ‘브레이트바트’ 같은 극우 언론이 그자리를 채웠다. 소판 뎁 기자는 “언론의 책임이란 말은 좀더 정확하게 쓰여야 한다. 도대체 어떤 언론 말인가? NBC, CNN, 폭스뉴스, 뉴욕타임스 모두 다른 언론이다. 뉴욕타임스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도대체 ‘내셔널 인콰이러’ 같은 매체의 신뢰성은 어떤가?”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통상 ‘인콰이어러’로 불리는 내셔널 인콰이러는 트럼프와 친분이 있는 데이비드 펙커가 회장으로 있는 황색지다. 인콰이어러는 지난 미 대선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해 ‘트럼프의 타블로이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의 아버지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살해와 연관됐다는 기사가 실린 ‘내셔널 인콰이러’의 표지

인콰이어러는 지난해 미 공화당 경선에서 공화당 후보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의 아버지가 케네디 전 대통령 살해범과 함께 있었다는 내용의 허위 기사를 내보냈다. 트럼프는 자신이 즐겨보는 ‘폭스뉴스’의 ‘폭스앤드프렌즈’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이 끔찍한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며 크루즈를 공격했다. 트럼프는 인콰이어러가 내보낸 가짜뉴스를 또다른 친트럼프 방송매체인 폭스뉴스를 통해 확산시켰다.

 

트럼프 당선 이후 폭스뉴스의 시청률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해 1월 폭스뉴스 시청률은 1년전에 비해 26% 상승했다. 트럼프에 의해 가짜뉴스로 낙인찍힌 CNN의 시청률도 15% 올랐다. 친트럼프와 반트럼프 진영이 갈리면서 선호 매체로 집결하는 양상이다. 뉴욕타임스의 딘 베이커 편집국장은 지난 2월 CNN에 출연해 “트럼프가 트윗할 때마다 구독자가 많이 늘어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뎁은 “트럼프에 의해 가짜뉴스로 찍힌 언론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수세기 동안 견지해온 저널리즘을 그대로 해오면 된다. 트럼프 시대가 도래했다고 저널리즘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가 좋은 저널리즘과 나쁜 저널리즘을 판단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공교롭게도 ISOJ 회의 전날인 20일 뉴욕타임스는 자사 트위터에 두 장의 사진을 올렸다. 슈퍼볼 우승팀인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2015년 오바마의 백악관을 방문한 사진과 2017년 트럼프의 백악관을 방문한 사진을 서로 비교했다. 앞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선수 일부가 트럼프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백악관 방문을 거부하긴 했지만, 뉴욕타임스가 트윗한 사진에는 트럼프의 백악관을 방문한 선수단의 인원 수가 현저히 적었다. 누가 보더라도 많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선수들이 트럼프에 항의하는 것처럼 보일 법한 사진이었다.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는 급히 트위터에 “이 사진에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2015년에는 40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계단에 있었지만 올해는 잔디에 앉아있었다”고 썼다. 체면을 구긴 뉴욕타임스에 트럼프는 “‘망해가는’ 신문이 또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칼럼니스트 맷 루이스는 “주류 언론도 스스로를 돌아봐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뉴욕타임스 등의 메이저 언론들은)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해야지요. 또 왜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브레이킹 뉴스에 집중하거나 사진을 빠르게 트윗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가 벌어지는 일들 아닙니까. 저널리즘의 최우선 과제로 놓여야 할 것은 바로 ‘정확성’ 아닌가요”

언론의 주류로 등장한 ‘팩트체크’

트럼프는 비판적인 언론에 ‘가짜뉴스’라는 단어를 뒤집어씌웠지만, ISOJ의 한 패널은 “데이비드 펙커의 인콰이어러나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야말로 그 모욕적인 별명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실제 언론사는 아니지만, 자극적인 가짜뉴스로 트래픽을 늘리고 광고 수익을 얻는 사이트도 있다. 이들은 지난 미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는데, ‘데일리 커런트’, ‘내셔널 리포트’, ‘리버티 라이터스 뉴스’, ‘시빅 트리뷴’ 등 언론사를 뜻하는 단어를 조합해 가짜뉴스 사이트를 만들었다.

 

미 언론에서 ‘팩트체크’라는 보도 방식이 변방에서 중심부으로 이동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탬파베이타임스가 만든 ‘폴리티팩트’, 워싱턴포스트의 ‘팩트체커’,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운영하는 ‘팩트체크’는 미국에서 ‘3대 팩트체커’로 꼽힌다. 트럼프가 크루즈의 아버지에 대한 인콰이어러의 보도 내용을 언급할 때도 폴리티팩트는 해당 발언에 대한 사실 검증에 들어갔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폴리티팩트는 트럼프가 “크루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케네디 암살범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점을 절대 부인하지 않았다”고 발언한 데 대해 폴리티팩트는 ‘팬츠 온 파이어’ 등급을 매겼다. | 폴리티팩트 사이트 캡처

폴리티팩트는 정치인, 언론, 블로거, 소문 등에 대해 검증을 거친 뒤 진실, 일부 진실, 거짓 등의 등급을 매긴다. 트럼프가 “크루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케네디 암살범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점을 절대 부인하지 않았다”고 발언한 데 대해 폴리티팩트는 ‘팬츠 온 파이어’ 등급을 매겼다. “네 엉덩이에 불 붙었어. 이 새빨간 거짓말쟁이야”라는 말이다. ‘폴리티팩트 텍사스’의 가드너 셀비 에디터는 같은 날 ISOJ의 ‘국제적인 추세로 떠오른 팩트체킹’ 세션에서 “우리가 유행시킨 말이 바로 이겁니다. 트럼프! 네 엉덩이에 불 붙은거나 보라고”라고 말했다.

 

지난 미 대선에서 가짜뉴스의 유통채널이 됐다는 비판을 받은 페이스북은 지난해 12월 팩트체크 시스템을 마련했다. 포인터미디어연구소, ABC뉴스, 워싱턴포스트 팩트체커, 폴리티팩트 등 전세계 46개 언론사가 참여한 ‘포인터 인터내셔널 팩트체킹 네트워크’에 가짜뉴스 신고가 들어온 글에 대한 검증을 맡기고 가짜 뉴스로 판명될 경우 ‘경고’ 문구를 붙이기로 했다. 

트럼프 시대 ‘가짜뉴스’와 싸우는 언

5월 대선을 앞둔 프랑스와 한국에서도 팩트체크가 활발하다. 르몽드와 버즈피드, 구글의 뉴스랩 등은 ‘크로스체크’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프랑스 대선 기간 동안 만들어지는 가짜뉴스에 대한 검증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포털사인 네이버가 서울대, 다수의 언론사들과 함께 19대 대선 기사에 팩트체크 시스템을 도입했다. 한국에서 팩트체크는 대선 후보들이 토론에서 발언한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를 검증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팩트체크 등의 방식으로 독자들에 대한 신뢰를 다시 쌓으려 노력하고 있다. ‘버즈피드’의 미디어 에디터인 크레이그 실버맨은 “완전히 거짓말쟁이 후보자가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 시대는 미국 언론에게는 책임감만큼 기회도 있다.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저널리스트들이 힘을 합쳐 가짜뉴스와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가짜뉴스와의 전쟁이 트럼프와의 전쟁처럼 비쳐지는 양상이다. 클라라 제프리의 마더존스는 지난 29일 트럼프와 비판적인 언론의 대립을 다룬 온라인 기사에서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했다. “언론인들은 권력과 언론간의 전투에 있어 나폴레옹이 했던 이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네 개의 적대적인 신문은 1만 자루의 총검보다 두렵다.’”

 

※ISOJ 회의에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국제언론회의 참가지원·선발과정을 거쳐 참가했다.

 

오스틴|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