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여행]by 걷기여행길

소설 '태백산맥'이 생생하게 재현한 길을 걷다, 전남 보성 벌교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낮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질 즈음, 찬바람이 등을 떠밉니다. 이맘때 쫄깃하게 살이 오른 꼬막도 꼬막이거니와 '태백산맥' 속 무대를 걷기에도 겨울이 제맛이거든요. 갯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소설 속 장면이 생생하게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벌교로 갑니다. 조정래 작가가 16,500매 분량의 원고로 재현해낸 땅, 486명에 이르는 소설 속 인물들이 숱하게 오갔을 길을 걸으러.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소설 '태백산맥'에 종종 등장한 철다리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그대로 남은 땅

막상 벌교읍내에 들어섰을 때 역시 남도는 남도구나 싶더군요. 단단히 챙겨 입은 차림이 무색할 정도로 벌교는 여행자를 푸근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벌교는 조정래 작가가 3년 동안 유년기를 보냈던 곳입니다. 등굣길에 벌교천을 건넜던 다리(소화다리), 시시때때로 놀러 다니던 친구네(김범우의집) 등 읍내 곳곳의 풍경이 소설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옛 골목 풍경이 남은 회정리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벌교를 문학기행 1번지로 만든 소설 '태백산맥'

'태백산맥'은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선포된 1953년까지 5년 동안의 격동기를 다룬 대하소설입니다. 토지를 둘러싼 계급 갈등, 분단과 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구수한 전라도 토속어로 풀어냈습니다. 이곳 일대를 소설의 주요 무대로 삼은 건 벌교가 일제강점기 근대화의 상징적인 장소였기 때문인데요. 일제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던 벌교를 수탈 목적으로 개발했습니다. 지금도 벌교에는 당시 개화 문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요. 8km 남짓 이어진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에는 소설 속 주요 장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도 차근차근 둘러볼 만한 길이랍니다. 장소마다 소설 속 장면과 설명글이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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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길 곳곳에 세워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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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문학관에 전시된 조정래 작가의 사진

걸쭉한 사투리가 맛깔나게 담긴 소설 구절구절을 곱씹으며 태백산맥문학관으로 향합니다. 문학관에 들어서기 전, 외벽에 새긴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먼저 만나는데요. 조정래 작가가 6년 동안 대하소설 10권을 집필해낸 힘이 느껴집니다. 문학관 내에는 소설을 구상하고 출간하기까지 6년간의 집필 과정, 수많은 등장인물과 현장 스케치가 담긴 취재노트, 작가가 사용하던 물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가족과 독자들이 남긴 방대한 필사본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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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1층 전시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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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염원' 벽화가 내다보이는 문학관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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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쓴 태백산맥 필사본

문학관과 마주한 소화의집과 현부자네 집은 소설의 첫 장면을 여는 장소예요. 현부자네 전속 무당의 딸로 등장하는 소화는 밤중에 몰래 숨어든 정하섭을 현부자네 별장에 숨겨줍니다. ‘빨치산’임을 고백하는 정하섭과 목숨을 건 사랑을 이어가지요. 한옥과 일본 주택 양식이 섞인 현부자네 집 2층 누각이 이색적인데요. 소설 속에서 이 누각은 현부자가 본인 소유의 중도들판을 내려다보며 소작농을 감시하고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등장합니다.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2층 누각이 이색적인 현부자네 집

큰길로 내려와 벌교천을 따라 소화다리(부용교)로 향합니다. 소화다리는 일제 수탈의 비극적인 현장 중 하나인데요. 당시 일본인들이 다리의 쇠 난간까지 뜯어 가버려, 난간 없는 다리에서 무수한 민초들이 처형당했습니다. 소설 속에는 여순사건 때 학살당한 시체가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질펀하게 널렸던”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리 아래 고요하게 흔들리는 갈대와 한적한 읍내 풍경이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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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소화다리

5분쯤 걸어 회정리 마을로 접어들면 돌담이 예쁜 ‘김범우의 집’을 만납니다. 일제가 인위적으로 키운 건너편 읍내와는 달리 그나마 옛 골목 풍경이 남은 곳입니다. 몇해 전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헤매며 찾아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사이 넓은 길로 바뀌었더군요.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낡은 옛집이 아늑하게 맞아줍니다. 소설에서 유일한 양심적 지주인 김사용의 집으로, 김범우는 그의 작은 아들입니다. 이념대립의 현장에서, 독립투사인 형과는 달리 어느 쪽에도 손을 들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마당 풍경이 소담하고 멋스러우니 잠깐 앉았다 가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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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의 집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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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의 집 안채와 사랑채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옛 돌담이 그대로 남은 회정리 마을길

이제 홍교를 건너 태백산맥 문학거리가 있는 벌교읍내로 걸음을 옮깁니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염상진과 하대치 등이 지주에게 뺏은 쌀을 이 다리 위에 쌓아 놓고 소작농에게 나눠줍니다.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홍교는 현재 세 칸만 남고 나머지는 새로 복원되었어요. 벌교(뗏목다리)라는 지명은 이 다리에서 유래했는데요. 원래 이 자리에는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해요.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홍교는 선암사의 승선교를 모방했다고 전해진다. 다리 아래 용머리도 똑같다.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현존하는 아치형 돌다리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홍교

문학거리 탐방에 나서기 전 부용산공원에 먼저 올라보길 권합니다. 좀 전에 지나왔던 홍교와 벌교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 그리고 제석산 자락이 훤하게 내려다보이거든요. 좀 더 발품을 팔아 부용정에 올라도 좋겠어요. 벌교 일대와 중도들판이 더욱 너른 풍경으로 펼쳐집니다. 공원 아래 월곡영화마을에는 토토로, 어린왕자 등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진 골목이 얽혀 있어요. 묵직한 소설 무대에서 잠깐 벗어나 발랄하게 산책을 즐기고 태백산맥 문학거리로 들어섭니다.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부용산공원에서 바라본 벌교 일대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월곡영화마을 벽화골목

돈, 행정, 주먹이 모여들던 곳, 태백산맥 문학거리

태백산맥 문학거리의 초입,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로 보존되어 있는 옛 벌교금융조합을 지나면 소설에서 정하섭의 본가인 술도가 자리가 있던 책방 일대와 최익달, 정현동 등의 지주들이 은밀히 회의를 하던 남원장 자리 등이 영화 세트장처럼 이어집니다.

 

이쯤 해서 잠시 앉았다 가기 좋은 장소가 있는데요.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보성여관입니다. 소설에서는 남도여관으로 종종 등장하지요. 지금은 아늑한 객실과 카페, 전시실 등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 중입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전시장에 풀어놓은 태백산맥 이야기를 둘러봐도 좋고 소설 무대에서 하룻밤 묵어보는 것도 문학기행의 참맛이겠지요.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등록문화재 제226호 벌교금융조합. 당시 일본인들이 관공서로 짓던 건축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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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정원이 딸린 보성여관 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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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한쪽에는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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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여관 1층 카페

문학거리를 빠져나와 철다리로 향합니다.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진트재터널을 거쳐 순천으로 가는 열차가 이 다리를 지났지요. 옛날 철교 아래 벌교포구 일대는 중도방죽이 생기기 전까지 꼬막을 실은 통통배가 득시글거렸다고 합니다. 이 철다리는 소설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염상구와 깡패 두목 땅벌이 달려오는 열차 앞에서 결투를 벌이던 장면이 절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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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들판을 가로지르는 철다리

철다리를 건너 벌교천을 따라 10분쯤 걸어 내려가면 중도방죽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소설 속 인물 김범우가 해거름에 한정 없이 걷던 20리 방죽길을 따라 찬찬히 걸음을 내딛습니다. 지금은 철마다 꽃이 피고 지는 산책길이지만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리”로 묘사된 소설 속 구절이 무겁기만 합니다. 중도방죽은 농민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강냉이가루나 밀가루로 품삯을 받으며 피땀 흘려 일궈낸 곳입니다.

“돌뎅이 지고 깔끄막 올라댕기기도 심이 들겄제만, 장딴지고 허벅지꺼정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돌짐 지는 고초에야 비허겄소?”

이외에도 서민영과 이지숙이 야학교사로 활동하던 회정리교회, 안창민이 총상을 입고 숨어들었던 자애병원 등 소설이 재현했던 생생한 현장들이 벌교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농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중도방죽

이 계절, 벌교에서 꼬막 맛을 놓칠 수 없지요.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에서 “벌교에서 물 인심 다음으로 후한 것이 꼬막 인심”이라 했습니다. 제철 맞은 꼬막이 한가득 쌓인 벌교매일시장을 지나,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꼬막을 맛보러 읍내 식당으로 갑니다. 벌교의 문화이자 벌교 사람들의 삶 한 상을 푸지게 먹고 돌아가는 길,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기나긴 겨울 밤,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태백산맥과 함께 꼬박 밤을 지새울지도 모르겠네요.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한겨울,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뻘밭에서 캐낸 참꼬막(아래 맨 왼쪽).

소설 '태백산맥' 따라 보성 벌교 태

꼬막정식 한 상에 꼬막무침, 꼬막숙회, 꼬막전, 꼬막탕수 등이 푸지게 차려진다.

걷기 여행 필수 정보

  1. 걷는 거리 : 8km
  2. 코스 경로 : 태백산맥문학관 → 회정리교회 → 소화다리 → 김범우의집 → 벌교홍교 → 자애병원 → 부용산공원 → 구)벌교금융조합 → 벌교초등학교 → 보성여관 → 벌교역 → 철다리 → 중도방죽 → 진트재 → 벌교공용버스터미널
  3. 소요 시간 : 30대 여성 걸음으로 넉넉하게 2시간 30분
  4. 난이도 : 하
  5. 찾아 가는 길 : (출발점 주소)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로 89-19
    1. 기차 : 벌교역에서 ‘보성-벌교(조성)’ 버스를 타고 벌교공용버스터미널 하차, 태백산맥문학관까지 도보 3분.
    2. 버스 : 벌교공용버스터미널 하차, 태백산맥문학관까지 도보 3분.
  6. 돌아가는 길 : 벌교공용버스터미널 이용
  7. 문의전화 : 보성군청 문화관광과 061-850-5213

걷기 여행 TIP

  1. 화장실 : 벌교공용버스터미널, 벌교역, 태백산맥문학관, 중도방죽, 보성여관 등
  2. 식사 : 벌교역 주변, 회정리 꼬막거리에 꼬막 전문 식당이 몰려 있다.
  3. 숙박업소 : 보성여관, 벌교소형관광호텔
  4. 추천 여행 시기 : 꼬막이 제철인 늦가을~겨울
  5. 사진 찍기 좋은 곳 : 보성여관, 월곡영화마을, 부용산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6. 휴식 취하기 좋은 곳 : 태백산맥문학관, 보성여관 카페
  7. 주변 관광지 : 득량역 추억의거리, 보성녹차밭, 순천만
  8. 길 상세 보기 : 걷기여행 | 두루누비 전국 걷기여행과 자전거여행 길라잡이 www.durunubi.kr

글, 사진 : 강민지님

2018.12.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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