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심에 으름장을 놓다!
‘가야산’이라고 하면 으레 해인사가 있는 경상도 가야산(伽倻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에 못잖은 충남의 명산이 있으니 그 이름도 ‘가야산’이고 한자표기까지 같다. 100개 암자를 거느렸던 대찰 ‘가야사’가 있었다고 전하는 충남의 가야산은 ‘가야구곡 녹색길’이라는 걷기여행길을 품었다.
이 길은 인간의 그릇된 욕심이 불러오는 참담함이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는 역사교훈의 현장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화자원과 경관을 갖고 있으며, 아울러 한겨울에 빛나는 덕산온천지구를 향하는 이 길의 시작은 예산군 덕산면의 가야산 아래 작은 마을이다.
가야사 자리에 들어선 남연군묘
덕산면 상가리 마을회관 앞에서 조선 영조 때 문신인 윤봉구 선생이 가야구곡의 하나로 칭송한 와룡담 방면으로 향한다. 자연스레 오르막을 걷게 되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기분 좋게 걷기를 이어갈 수 있다. 다만 음지가 있으므로 한겨울에는 아이젠과 스패츠를 갖고 가는 것이 안전하고 쾌적한 걷기에 필수다.
안내사인을 따라 작은 언덕을 에둘러 걷다보면 멀리 맞은편으로 정자각과 한눈에 봐도 명당으로 보이는 곳에 석물과 함께 잘 조성된 무덤이 보인다. 무덤자리는 언뜻 보아도 가야산 제2봉인 옥양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가야산을 배경으로 삼았다. 특히 옥양봉 기암에 모인 기운이 흘러내려 모이는 곳임을 어림잡을 수 있을 만큼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보인다. 본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묘지의 주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 이구(李球)이다.
망주석 등의 석물들이 잘 갖춰진 남연군묘. 대한제국 황실문장인 오얏꽃 문양을 볼 수 있다. |
길의 시작점인 상가리 마을회관 부근, 와룡담 방향으로 걷기를 시작한다. |
잎을 떨군 한겨울의 노거수들이 길동무를 해준다. |
헌종 10년이던 1844년, 이하응은 아버지 이구의 무덤자리를 어느 풍수가에게 부탁하였는데, 이 풍수가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고 지목한 천하의 명당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묘지를 쓸 수 없었다. 이에 이하응은 몰래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탑을 부수어 사찰을 없앤 후 그곳에 아버지 이구의 묘를 썼다고 전한다.
이 일이 있고 7년 후 이하응은 훗날 고종이 된 차남 재황을 얻고,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천자(황제)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그 아들 순종도 황제에 오르니 풍수가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사찰을 불태우는 등 욕심이 앞서 저지른 과오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는 그것으로 문을 닫고, 후손들은 치욕의 날들을 보낸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은 남연군묘에서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 불러오는 화가 얼마나 치밀하고 뒤끝 있게 밀려오는 지를 읽어야 할 것이다.
가야산 옥양봉의 기운이 흘러내리는 자리에 쓰인 남연군묘를 바라보며 걷는다. |
숨죽인 채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 |
덕산온천 온천수가 그리운 계절
남연군묘를 멀리서 바라보며 구릉을 돌아가면 관목들과 나무들이 호위하는 오롯한 오솔길이다. 그 후로 상가리마을 논에 물을 대는 상가저수지를 크게 돌아 걷는다. 상가저수지는 연안으로 다양한 식생들이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가야산 마루금이 수면에 비치는 모습은 걷는 이들에게 큰 즐거움이다. 상가저수지를 돌아 내려오면 비로소 남연군 묘를 이장할 때 썼다는 꽃상여(복제품)를 모셔놓은 제각과 왼쪽으로 남연군 묘역까지 올라갈 수 있는 징검다리 길을 만난다.
남연군 묘역은 격식에 맞춰 세워진 석물들과 무덤이 자리한다. 망주석 한 쌍에 돋을새김 된 당초문양과 대한제국 황실문장인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묘역의 격을 한껏 올린다. 배산임수의 이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는 절묘한 자리다.
관목들이 길섶을 지키는 오솔길을 지나 상가저수지에 닿는다. |
어느 수련원 마당에 드리워진 노거수 그림자가 이채롭다. |
가야산 마루금을 배후로 삼아 자리한 남연군묘. |
남연군묘 바로 앞에 있던 가야사터. 묘가 있는 곳은 본래 탑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
하지만 남연군묘의 이후는 순탄치 않았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흥정하기 위해 남연군묘의 시신과 부장품을 도굴하려고 묘지를 파헤치다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까지 가중시키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개화기에 조선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계기를 앗아간 것으로 이 사건을 보는 시각도 있다.
나비이론 혹은 도미노이론처럼 우리의 작은 욕심은 연쇄적으로 파급되고 또 끈질기게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을 이런 사례로 살펴볼 수 있다.
남연군묘 이후의 길은 상가리에서 옥계리로 흐르는 개천을 따라 걷는다. 옥계저수지를 지나면 광덕사를 지나 율곡 이이가 탁월한 약수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덕산온천 온천지구에 닿는다. 덕산온천의 따듯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이 길이 들려주던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몸의 피로는 풀어지고, 마음도 맑아지지 않을는지.
상가리와 옥계리를 잇는 실개천 옆으로 길이 조성되었다. |
옥계저수지 쉼터. |
심신의 피로를 달래줄 덕산온천단지에서 길이 마무리된다. |
코스요약
- 걷는 거리 : 약 16km
- 걷는 시간 : 5시간 내외
- 걷는 순서 : 상가리 마을회관~상가저수지~남연군묘~상가리천변길~옥계저수지~광덕사~덕산온천지구
교통편
- 대중교통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덕산온천행 버스 이용.
- 주차장 : 가야산 주차장에 주차하고 상가리 마을회관까지 300m정도 걸어간다.
걷기 여행 TIP
- 자세한 코스정보는 이곳을 참조해주세요. http://www.koreatrails.or.kr/course_view/?course=38
- 화장실 : 남연군묘(동절기 폐쇄), 가야산주차장(노선 200m 이격), 광덕사 등
- 식수 : 사전준비 필요.(남연군묘 앞 식수대는 동절기 폐쇄)
- 식사 : 가야산주차장 부근, 덕산온천지구
- 길안내 : 길 안내사인이 부실하므로 GPS트랙 활용이 필요하다.
- 기타 : 총 거리 16km가 부담된다면 가야산 주차장을 출발해서 원점회귀하는 4km 구간을 핵심구간으로 추천한다.
- 코스문의 : 예산군청 환경과 (041)339-7503 /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41) 339-893
윤문기 '걷기여행작가, (사)한국의 길과 문화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