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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춤의 神` 니진스키,
발레를 아름다움에서 해방시킨 혁명가

by매일경제

바츨라프 니진스키(무용수·안무가, 1890~1950)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매일경제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6년 영국 윔블던 대회를 관전했다. 그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환상적인 경기를 보고 감복했다. 자신이 목격한 경이로운 순간을 글로 남기기로 한다. 그렇게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탄생했다. 월리스는 자신이 왜 페더러에게서 경외감을 느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실패를 인정했다.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의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묘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경외감이란 인간의 이해로 헤아리기 어려운 대상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다. 점프 후 중력이 허락하는 시간보다 한 박자 더 공중에 머물렀던 마이클 조던, 드리블을 하는 순간 상대 수비수를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마라도나,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주먹을 날린 무하마드 알리. 모두 페더러와 같은 부류다. 물리법칙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이들은 초자연적 인물에 가깝다. '천재'라는 칭호를 얻은 운동선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플레이를 선사하는 사람들이다.


스포츠만큼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장르는 무용이다. 이 세계에도 페더러처럼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무용수가 있었다. 그는 도약 후 원하는 만큼 공중에 머물며 춤을 추고 지상에 내려왔다. 그 순간 관중은 시간이 멈춘 듯한 최면에 걸렸다. 세상은 "신처럼 춤춘다"며 그를 찬양했다. '발레의 전설'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이야기다.

발레의 혁명 '목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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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오후` 공연 당시 니진스키의 모습.

1876년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목신의 오후'라는 작품을 썼다. 목신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다. 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목신은 시칠리아섬 해변가 숲속에서 꾸벅꾸벅 낮잠을 자다 깨어난다. 잠결을 다 떨치지 못한 목신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해한다. 그 순간 숲속 저 멀리서 목욕하는 요정들을 발견한다. 목신은 욕망을 느끼며 요정들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아직 꿈속이었던 걸까. 요정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환상은 어딘가로 영영 떠났지만, 목신의 욕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목신은 다시 나른한 권태를 느끼며 까무룩 잠든다. 풋풋한 여름 풀내음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달콤한 미풍 속에서.


몽환과 관능이 넘실거리는 '목신의 오후'는 후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드뷔시는 말라르메 시에서 느낀 감정을 담아 동명의 관현악곡을 1894년 완성했다. '목신의 오후'는 드뷔시 출세작이 됐고, 그는 인상주의 작곡가로 우뚝 섰다.


1912년, 파리의 한 극장에 또 다른 버전의 '목신의 오후'가 등장했다. 이번엔 발레였다. 말라르메 시 '목신의 오후' 서사를 가져온 작품이었다. 무대 음악은 드뷔시 곡 '목신의 오후'를 사용했다. '반인반수' 목신으로 분장한 남성 무용수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단지 걸었을 뿐인데도 기이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 남자는 관객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목신의 오후'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데 집중했던 기존 발레와 달랐다. 무용수들은 이집트 벽화 속 인물처럼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관중 대다수는 '이것도 발레인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카리스마와 관능을 휘감은 목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화 속 목신이 육체를 얻어 현세에 도래한 듯했다.


'목신의 오후'는 사건이자 혁명이었다. 문제는 작품 후반부였다. 요정들이 떠나버린 후에도 목신에겐 욕망이 남아 있다. 목신은 요정이 남기고 간 스카프를 이용해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동작을 취한다.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다. 안무가이자 목신 역할을 맡은 무용수는 '발레 뤼스'의 간판스타 니진스키였다.


니진스키는 외설죄로 경찰에 연행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도발적인 발레에 열광한 관객이 더 많았다. 그렇게 '목신의 오후'는 발레 역사의 이정표가 됐다. 고상한 유흥거리로 여겨졌던 발레는 이 작품 덕분에 고전이라는 사슬을 끊었다. 발레도 다른 장르처럼 무엇이든 표현 가능한 현대예술 영역으로 입성했다.

중력을 무시한 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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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정령` 공연 중인 니진스키.

폴란드 출신 무용수 부모를 둔 니진스키는 걸음마와 동시에 춤을 배웠다. 니진스키 부친은 능력에 비해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한 무용수였다. 늘 불만이 가득했다. 니진스키의 형이 추락사고로 뇌를 다쳐 평생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할 운명을 안게 된다.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친다. 남겨진 가족은 궁핍함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하듯 살았다.


러시아가 오랫동안 발레를 호령한 이유는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에 소질 있었던 니진스키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아홉 살에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한다.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부터 러시아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춤의 신동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니진스키 춤을 본 사람들은 곧바로 매혹당했다. 그의 도약에는 논리로 따지기 힘든 신비함이 있었다. 키가 작은 니진스키는 단점을 비웃듯 높이 뛰어올랐다. 단순히 높이 뛰었을 뿐만 아니라 허공에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동작을 선보였다. 중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듯했다. 관중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경외감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니진스키의 재능은 선택받은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을.

'절대권력' 댜길레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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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진스키(왼쪽)와 디아길레프.

니진스키에게 매료된 사람 중에는 황족이었던 류보프 왕자가 있었다. 그는 후원자를 자처하며 니진스키 가족의 재정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춤밖에 몰랐던 니진스키는 류보프 왕자 덕분에 러시아 귀족 사교계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댜길레프를 만났다.


댜길레프는 20세기 초 유럽 예술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다. 예술 비평가이자 기획자였던 그는 '예술세계'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러시아 예술 사조를 뒤흔들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댜길레프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09년 창단한 '발레 뤼스'다. 러시아 무용수로 꾸려진 발레단 '발레 뤼스'는 서유럽을 휩쓸었다. '발레 뤼스' 인기는 신드롬에 가까웠다. 간판 무용수가 입었던 옷이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될 정도였다. 최고의 예술가들이 반딧불처럼 댜길레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피카소, 마티스, 스트라빈스키, 샤넬, 장 콕토. 모두 '발레 뤼스' 공연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재능을 기여한 예술가들이다.


니진스키는 류보프 왕자의 소개로 댜길레프를 만났다. 댜길레프도 단번에 니진스키 춤에 사로잡혔다. 그는 니진스키를 '발레 뤼스'에 합류시킨다. 댜길레프와 니진스키는 고용·피고용인 관계를 넘어섰다. 댜길레프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는 니진스키를 애인으로 삼는다. 니진스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절대권력의 유혹을 거절하긴 어려웠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재능과 댜길레프 후광 속에서 훨훨 날았다.

아름다움에 맞선 '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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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해석한 피나 바우쉬의 작품.

니진스키는 '목신의 오후'로 일으킨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인 1913년 '봄의 제전'을 내놨다. 이번엔 무용수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직 안무가로서 자신의 이상을 선보이려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이 던진 충격은 '목신의 오후' 이상이었다.


'봄의 제전'은 봄맞이 제사의식을 다룬 작품이다. 알몸에 가까운 이교도 무리가 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 원시 종교를 다룬 이 작품은 형용하기 어려운 에너지로 가득했다. 무용수들은 영혼의 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진할 기세로 격렬히 몸을 내던졌다.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이었다. 원초적인 욕망, 충동, 무질서가 무대 위를 가득 채웠다.


관중은 무용수만큼 온 힘을 다해 야유를 퍼부었다. '발레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념이 굳건했던 시절이었다. 아름다움은커녕 불편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봄의 제전'은 재앙이었다. 동화 같은 디즈니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악몽 그 자체인 데이비드 린치 영화를 틀어준 셈이었다.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흥분한 관중을 제지하기 위해 경찰도 출동했다.


시간은 니진스키 편이었다. 오늘날 무용계에서 '봄의 제전'은 거대한 산이다. 한 세기 넘도록 안무가, 무용수에게 영감을 주고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피나 바우슈, 마사 그레이엄과 같은 현대무용 대가들은 통과의례처럼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봄의 제전'을 선보였다. '봄의 제전'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춤을 우아함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세상이 선한 의지로만 채워져 있지 않듯, 발레도 꼭 아름다움만을 대변할 필요는 없다고 니진스키가 알려준 것이다. 더 나아가 니진스키의 도발적인 몸짓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 아닌가"라고 묻는 듯하다.

10년을 춤추고, 30년은 암흑 속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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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 이후 안무가로 각성한 니진스키는 고민에 빠진다. 그는 자신이 힘껏 도약하더라도 결국 댜길레프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니진스키는 댜길레프와의 연애를 끝내고, 예술적으로도 독립하려 했다. 그는 남미 순회공연 중 자신의 팬이었던 헝가리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과 충동적으로 결혼한 건 댜길레프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댜길레프는 분노했다. 그는 니진스키를 '발레 뤼스'에서 내쫓았다.


니진스키는 자신의 무용단을 꾸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수완 좋은 사업가는 아니었다. 게다가 댜길레프도 사사건건 옛 연인의 홀로서기를 방해했다. 공백은 길어졌다.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했다. 다시는 춤출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이 니진스키를 짓눌렀다.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훨훨 날았기에 추락의 충격도 컸다. 니진스키는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곪아갔다. 최고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트도 니진스키의 먹구름을 걷어내지 못했다. 니진스키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다. 그 이후로 니진스키는 30여 년을 더 살았다. 보호시설과 정신병원을 끊임없이 오가는 삶이었다. 당연히 춤을 출 수도 없었다. 니진스키는 마지막까지 망상, 불안, 무질서 속에서 허우적대다 눈을 감았다. 니진스키를 잊었던 세상은 그가 떠난 후에야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다. 니진스키의 업적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은 사후에 더 높은 곳으로 도약했다. '춤의 신'에게 바치는 무용계의 제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해석한 작품만 150편에 달한다.


니진스키 전기를 쓴 무용 평론가 리처드 버클은 비운의 천재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나머지 30년은 암흑 속에 가려진 채 살았다." 니진스키가 춤췄던 시간은 고작 10년이었다. 만약 니진스키가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며 계속 아름다운 춤을 췄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10년보다 더 오래 박수를 받으며 천재라는 칭호를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진스키는 재능 저 너머의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에 없던 몸짓을 창조하며 현대무용의 역사를 바꿨다. 천재는 태어나고, 전설은 만들어진다. '천재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니진스키는 자신을 전설로 만들었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