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고독을 끌어안은 화가....
`슬픈 전설`로 남은 천경자

by매일경제

천경자 (화가, 1924~2015)

호크니 옆 천경자

매일경제

팝아트 거장. 동성애자. 살아있는 화가 중 가장 비싼 몸값. 모두 데이비드 호크니를 수식하는 말이다. 호크니는 수영장 풍경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겁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던 유년 시절 감각을 되살려준다. 튜브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떠다닐 때 느꼈던 안온감. 일렁이는 수면 위에 내려앉은 햇살. 수영장 특유의 냄새. 느릿느릿 흘러갔던 한낮의 여름. 호크니 작품은 초여름 미풍처럼 마음의 무게를 잠시 덜어준다.


지난 3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작한 호크니 회고전은 첫날부터 대성공했다. 전시장에 들어가려면 번호표를 뽑고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4개월 만에 누적 관객 30만명을 돌파했다. 한국을 찾은 호크니 작품은 133점이다. 1960~70년대에 그렸던 '수영장 시리즈'부터 캔버스 60개를 이어 붙여 그린 '더 큰 그랜드 캐니언'(1998) 등 대표작 대부분이 포함됐다. 호크니가 60여 년간 걸어온 예술 여정을 압축한 전시회였다.


호크니 작품을 감상한 관객 일부는 미술관을 찾은 김에 바로 옆에 마련된 국내 화가 전시장에도 들어갔다. 이곳에 걸려있는 작품은 30여 점에 불과하다. 모든 그림을 한데 모아야 호크니의 '더 큰 그랜드 캐니언' 한 점 크기에 겨우 미칠 정도다. 하지만 그림에 담긴 기운은 호크니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꽃, 뱀, 여성, 환상을 주제로 한 30여 점은 폴 고갱 그림처럼 원초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프리다 칼로 작품처럼 찬란하면서도 고독하다. 청량함 가득한 '호크니 세계'를 탐험하고 나온 관객은 바로 옆 전시장에 마련된 또 다른 세계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이 전시장에 붙어 있는 타이틀은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다.

뱀을 그리는 여자

매일경제

천경자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생태`(1951).

1952년 부산은 거대한 피란촌이었다. 죽음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으로 북적였다. 거기엔 당연히 예술가들도 있었다. 6·25전쟁은 그들의 창작욕을 꺾지 못했다. 부산이 피란 수도 역할을 맡은 3년간 이곳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는 100건이 넘는다. 젊은 화가들은 다방에, 폐건물에, 길거리에 그림을 내걸었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은 '생태'다.


'생태'는 독사 35마리가 한 데 뒤엉켜 있는 그림이다. 공포와 금기의 상징인 뱀이 우르르 등장하는 이 작품은 금세 유명해졌다. 도발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여자라는 사실도 당시엔 파격이었다. '뱀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전시회는 '생태'를 보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천경자라는 이름이 한국 미술사에 각인된 순간이다.

"뱀을 그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일경제

`환`(1962). 60년대 초반 환상적인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

천경자는 훗날 '생태'를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태'를 그렸을 때 천경자는 28세였다. 당시 천경자는 폭우처럼 쏟아진 불행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집안이 몰락했고,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다. 세상은 자신의 그림을 무시했다. 폐병을 앓던 여동생마저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잠긴 천경자는 어느 날 뱀을 보고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독을 품고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뱀을 보자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했다. 구렁텅이 같은 삶에 저항해야겠다는 의지도 일었다. 뱀은 천경자에게 위로, 구원, 부적인 셈이었다. 천경자는 뱀을 스케치했고 그 결과 '생태'가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천경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에 2년 연속 입선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광복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일제 잔재 청산'이 시대정신이 됐다. 한국 화단은 일본 채색화 기법을 터득한 천경자를 "왜색이 짙다"며 깎아내렸다. 일본에서 채색화를 배운 한국 화가 대부분은 수묵화로 전향하며 시류에 합류했다. 천경자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그는 그림을 정치적 이해와 엮지 않았다. 예술은 예술일 뿐이었다. 결국 '생태'로 화단을 뒤흔들며 모든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생태'에 반한 인물 중엔 김환기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도 거장 화가였다. 천경자는 김환기의 추천으로 홍익대 미대 교수 자리를 얻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매일경제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천경자는 처음엔 세밀한 묘사로 사실적인 작품을 그렸다. 50년대 중반부터 천경자의 붓은 현실에서 해방돼 저 너머로 뻗어 나갔다. 꿈, 환상, 낭만 세계를 그렸다. 이 세계는 샤갈 작품처럼 '사랑'이라는 정서로 가득하다. 당시 천경자는 허랑방탕했던 두 번째 남편 때문에 마음 평온한 날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고독이고 고통이었다. 아등바등 네 자녀를 혼자서 키웠다. 천경자는 35마리 뱀을 그렸을 때처럼 자신이 색칠한 '사랑의 세계'에서 위안을 얻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천경자는 본격적으로 여인상을 그렸다. 대표작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다. 50대에 들어선 천경자가 고통뿐이었던 22세 때를 떠올리며 그린 자화상이다. 뱀 네 마리를 월계관처럼 머리에 두른 젊은 여성이 정면을 응시한다. 가슴엔 장미꽃 한 송이가 달려 있다. 이렇다 할 표정 없는 얼굴은 스산하다.


천경자의 여인상은 화가 자신의 고통을 주제로 삼은 점에서 프리다 칼로 자화상과 비교된다. 하지만 두 화가 작품에 깃든 온도는 다르다. 망가진 육체와 마음을 짊어졌던 프리다는 고통을 직시했다. 그림 속에서 프리다는 쏘아보듯 우리를 응시한다. 강인한 눈동자엔 저주 같은 운명을 향한 분노가 담겨있다. 반면, 천경자 작품 속 여성의 눈동자는 담담하다. 허공을 바라보는 듯하다.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은 무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인 후 초월적 경지에 가 닿은 모습이다. 천경자는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라는 문장을 남겼다.


천경자는 열정적인 여행자였다. 1969년 남태평양을 시작해 아프리카, 인도, 중남미, 유럽, 미국 등을 여행했다. 전 세계 풍경을 두 눈에 담았고, 그곳 여성을 그렸다. 천경자가 그린 태국 여성, 자메이카 여성, 인도 여성, 하와이 여성, 괌 여성, 스페인 여성의 피부색은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눈동자는 모두 황금색이다. 얼굴 생김새도 자화상 속 여성과 빼닮았다. 천경자가 그린 전 세계 여성은 결국 자화상의 변주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본 것은 자신처럼 슬픔과 고독을 끌어안고도 초연이 살아가는 여자들이었다. 천경자는 그들의 얼굴에서도 '슬픈 전설'을 봤다. 그렇게 동시대 여성의 애달픈 영혼을 보듬고자 했다.

30년간 이어진 '미인도 스캔들'

매일경제

`여인의 시Ⅱ`(1985)

천경자는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 외골수는 아니었다. 박경리 등 걸출한 문화예술계 인사와 두루 어울렸다. 글솜씨로도 유명했다. 그는 10여 권의 수필집을 출간한 문인이기도 했다. 천경자가 남긴 감각적이고 진솔한 문장은 그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다. 1980년대 들어서 김환기, 박수근을 잇는 거장 화가의 지위를 얻었다. 한 많은 삶을 버텼던 여인에게 세상이 이제야 보상하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은 1991년 한 번에 무너졌다.


'미인도' 스캔들이 터졌다. '미인도'는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자택에서 나온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91년 '미인도'를 세상에 공개했다. 천경자는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술관 측은 "진품이 맞는다"며 반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각을 세운다는 건 주류 미술계를 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천경자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자식처럼 아낀 화가다. 천경자는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미인도'가 위작임을 주장했다. 미술계는 천경자를 두고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고 공격했다. 천경자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마음을 다쳤다.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1998년 첫째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소식은 묘연했다. 시간이 흘렀다. 2015년 천경자가 미국에서 91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추모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세상은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에 집중했다. 유족은 진품 여부를 따지기 위해 프랑스 감정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를 섭외했다. 이 업체는 루브르 박물관과 협업할 정도로 권위를 갖춘 곳이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을 0.0002%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위작이라고 봤다. 하지만 검찰은 "미인도는 진품이다"라며 감정업체의 결론을 뒤집었다.


'미인도'를 둘러싼 공방이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사이 김환기, 박수근 작품은 전 세계 무대로 진출했고 전설이 됐다. '미인도'에 발목 잡힌 천경자는 그들만큼 높은 곳으로 날지 못했다. 그가 50년간 쌓아온 성취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직도 세상은 천경자라는 화가를 이야기할 때 '미인도는 진품인가, 가짜인가'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

끝없이 파도쳤던 삶

매일경제

`환상여행`(1995)

북적이는 호크니 전시장을 빠져나와 천경자 작품이 걸려 있는 조용한 공간을 걷다 보면 쓸쓸한 기분이 든다. 동시대에 그림을 그린 호크니와 천경자의 삶이 극명히 비교되기 때문이다. 호크니에게 세상은 축복이었다. 그는 30대 때부터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화가로 군림했다. 변화하는 세상과 호흡하며 쉼 없이 작품 세계를 넓혔다.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개최할 만큼 혁신을 거듭했다. 세상 역시 호크니 작품 한 점에 1000억원 이상의 가치를 매기며 거장의 우아한 예술 여정에 찬사를 보냈다.


천경자에게도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온 힘을 다해 그의 앞길을 막았다. 발목을 잡고, 할퀴고, 상처를 안겼다. '미인도' 스캔들 직후 천경자는 붓을 내려놨지만, 곧 "절필은 내게 죽음이다"라며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 기간 탄생한 천경자 작품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절제된 슬픔이 아닌 선명한 슬픔이 배어 있다. 1995년 작 '환상 여행'은 절절한 고통이 흐르는 작품이다. 저승으로 보이는 암울한 공간에 여인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들은 한없이 고독해 보인다. 눈동자엔 절망, 원망이 서려 있다. 자신의 '슬픈 전설'을 초연한 눈동자로 지켜봤던 화가는 끝내 아픔을 감추지 못했다.


1998년 천경자는 서울시립미술관에 그림 93점을 기증했다. 작품을 건네며 먼 곳으로 자식을 보내는 부모처럼 속상해했다. 상처투성이인 이 땅과의 정을 겨우 끊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17년 뒤 한 줌의 재가 되어서야 고국에 돌아왔다. 유족은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아 고인의 작품 곁을 걸었다.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은 천경자가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휴관 일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언제든 입장료 없이 천경자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사연 많은 인생. 숙명 같았던 고독. 쓸쓸한 영혼. 하지만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은 강한 의지. 이 모든 것을 끌어 모아 화폭에 담은 화가. 이제라도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슬픈 전설'을 마주해야 한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