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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프랑스 농가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농사 짓는 김순기

by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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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울에 설치된 김순기 작품 `시간과 공간 2019`.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내가 저승에 가서 게으른 구름이 되리라 생각을 하니 너무나 신난다. 바다는 산이요, 산은 바다요."


지난 8일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전시마당. 로봇 '심심바보 영희'가 김순기 작가(73)가 1998년 쓴 시(時) '게으른 구름'을 낭송하고 무당 김미화가 굿판을 벌였다. 21세기 첨단 기술 결정체인 로봇과 초자연적인 세계를 넘나드는 무당이 만난 퍼포먼스 '시간과 공간 2019'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대규모 회고전 '게으른 구름'을 위해 전시마당에 대형 에드벌룬 비행기까지 띄운 김 작가는 "현대미술관을 달나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게으른 구름'은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 의미, 삶의 태도를 은유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게으름은 삶에서 지양해야 할 불성실과 나태, 부정적인 측면을 함의한다. 하지만 김순기에게 게으름이란 규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삶의 매분 매초가 결정적 순간임을 긍정하며 사유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그는 여느 작가들과 달리 프랑스 비엘메종 농가에서 텃밭을 일구며 독서와 활쏘기, 붓글씨를 즐기면서 살고 있다.


가녀린 몸 뼈대에서 자신감이 넘쳐 흘러나오는 그는 32세에도 그렇게 당당했다. 1975년 9월 서울 광화문 미국문화센터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김순기 미술제'를 열었다. 197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한 이 전시에서 현대미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영상 작품 '일기'는 1971~1973년 프랑스에서 실행했던 퍼포먼스 기록물이었다. 도끼로 나무를 패고, 들판의 흙을 파서 옆에 쌓았다가 다시 그 구덩이를 메우고, 바닷가에서 물을 퍼서 다시 그 옆에 물을 붓는 '물+물(일기)', 실뜨기를 하는 '줄놀이(일기)' 등이 담겨 있었다. 자연 속에서 일상적인 행위에 기반을 둔 퍼포먼스는 미술의 비물질성을 추구했던 1960년대 해외 미술계 동향과 흐름과 같이 했다. 회화 중심이었던 한국 미술계 경향과 비교할 때 매우 앞선 것으로 김순기 미술제에 참여한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람회'라는 용어 대신 '미술제'를 쓰고 영상을 활용하는 구성도 혁신적이었다. 이 낯선 행사의 불온성을 검증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까지 탐문에 나섰다고.


김순기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젊은 여자, 아니 계집애가 (미술계에) 잔소리한다고 건방지다고 했다. 난 그래서 '당신네처럼 깡패처럼 장악하는 게, 이상한 짓이 아방가르드(전위예술)가 아니다. 소통하고 질문하는 게, 새로운 것을 열어주는 게 아방가르드'라고 했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하고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길거리 작품을 다 걷어가 버렸는데, 밤샘 작업을 해 다시 만들어 전시하면 또 가져가 다시 만들었다. 내 머리카락을 끄집어당기면서 '여자가 이런 거 하면 안 된다'고 야단치는 사람도 있었고···."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그는 남성·계파 중심 국내 미술계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때 '마녀'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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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 중 존 케이지 콘서트.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내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외국에서는 유명 예술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86년 미국 현대음악 거장 존 케이지, 다니엘 샤를 등을 초청해 멀티미디어 페스티벌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김순기와 그의 초청자들'을 열었다. 이 자료뿐만 아니라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프랑스 작가이자 영화 배우 장 뤽 낭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등과의 인터뷰 영상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백남준과 함께 색동천 캔버스에 함께 시를 쓴 퍼포먼스인 '봉주르 백남준' 관련 자료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장 미디어랩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 예술의 의미'를 주제로 비디오 카메라를 메고 전 세계를 일주하며 촬영한 '가시오, 멈추시오'(1983), 호주 원주민의 제의 모습을 담은 '하늘 땅, 손가락'(1994)도 눈길을 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1년 프랑스 니스 국제예술교류센터 초청작가로 선발되면서 도불한 그는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1986년부터는 인적 드문 농가를 작업실로 개조해 살고 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국내에 덜 알려졌는데,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그의 예술성을 발견했다. 강 실장은 "2000년 초에 선생님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몇 년 전 유럽 출장을 갔다가 선생님 농가에 들러 여러 작업 공간을 뒤지면서 그동안 내가 알았던 선생님 작품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 실장은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소외돼온 여성 작가 전시를 통해 미술사에서 구멍난 부분이 제대로 메우고자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50년 동안 외지에 있었지만 김순기 선생님 예술 바탕에 근본적으로 한국적 철학과 생각이 있다. 작업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한국 미술을 새롭게 쓰는데 필요한 작가다"고 전시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에 전시된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 회화 등 200여 점을 통해 자유롭게 다원예술을 넘나든 선구자 김순기를 재발견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27일까지. 문의(02)3701-9571


[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