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美언론에 주목받은 심찬양 그라피티 작가

[컬처]by 매일경제

한복 곱게 입은 흑인소녀…그의 `낙서` 하나가 LA를 울렸다


선교사 꿈꾸던 목사님 아들

10대때부터 그라피티 활동

"포기하더라도 본토는 가보자"

필리핀 신학교도 그만두고

무일푼으로 동경하던 미국행


한국적 그라피티 대성공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있으랴'

도종환 시인 詩에서 영감 받아

한인에게 차별받은 설움 가진

흑인여성들 눈물 났다고 말해

작년엔 청와대 벽화 그리기도


난 예술가가 아니다

아무도 소유할수 없는 그림

그래서 거리예술은 평등하죠

한번에 스프레이 200통 쓰고

하루 8시간 기본인 '중노동'

매일경제

그라피티 작가 심찬양(31)이 그라피티 작업에 쓰이는 수백여 개 스프레이 앞에 서 있다. 그는 "그라피티를 매개로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라피티 아트는 스프레이를 사용해 담벼락에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2001년 경북 김천. 열세 살 소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좇아 목사의 길을 가려 했다.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빈자들을 위한 우물을 만드는 게 소년이 키우게 될 꿈 중 하나였다. 집안의 영향 때문인지 소년은 자꾸 가난한 이들이 눈에 밟혔다. 그것도 이상하게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힙합을 좋아했던 소년은 만화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소년은 열여덟 살 때부터 "좋아하던 소녀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동네 담벼락에 그라피티를 그리기 시작한다. 당시에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언젠가 이것이 '한복 입은 흑인 여성 그라피티'라는 화제의 작품이 될 줄을. 그리하여 온 세상이 자기를 주목하게 될 줄을.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심찬양(31)은 한국보다 미국이 더 주목하고 있는 세계적 그라피티 작가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와 캐나다가 그의 활동 1번지다. 스프레이 하나만 들고 창조한 그림이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올 때면 팬들은 이름 그대로 그를 찬양(讚揚)한다. 결혼 후 미국에서 산 지 이제 고작 반년째이지만 "한 달에 한 번 쉬면 감사할 만큼" 주문이 쌓여있을 정도다.


그라피티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서도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지난해 그는 청와대 사랑채에 대형 벽화 '어깨동무'와 '안녕'을 그렸다. 그중 '안녕'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을 다룬 기획물이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싶어" 필리핀 신학대를 다니기도 했던 그이지만, 작업 중 기독교 단체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비난마저 들어야 했다고.


그라피티 예술가 심찬양을 서울 홍대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3년 전이다. 2016년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더 컨테이너 야드'(800 E 4th St, LA) 벽면에 그림 한 점을 그렸다. 먹빛 저고리에 청록색 한복 치마를 입은 흑인 여성이었다. 제목은 '꽃이 피었습니다'였다. 미국 본토 느낌에 한국적 정서까지 살린 소재를 고민한 나만의 '필살기'였다. 20대 후반 접어들면서 그라피티를 포기해야 하나 고뇌하던 차에 그린 것이었는데 큰 화제가 됐다.


그라피티를 포기하려 했다고?


한국에선 그라피티로 먹고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과 달리 이 장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여전히 생소하다. 10대 후반부터 그라피티를 했고, '압구리'(압구정 굴다리) 등을 누비며 흑인들을 주로 그려왔다. 내내 무일푼이었다. 죄송하게도 아버지 카드를 쓰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지라 좌절만 깊어갔다. 그러다 본토인 미국이나 가보고 포기하자고 땡전 한 푼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거다. 가장 동경하던 곳이었으니까. 대부분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 집에 신세를 졌다. 그러다 친구 소개로 우연히 '더 컨테이너 야드'에 가로 4m, 세로 2.5m 그림을 그릴 기회를 잡았다. 눈에 안 띄는 실내 구석 공간이었으나 상관 안 했다. 작업한다는 거 자체로 행운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린 게 국내엔 안 알려진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꽃이 피었습니다'는 그다음 작품인가.


그렇다. '흔들리며 피는 꽃'은 도종환 시인의 시 제목을 썼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처럼 내가 겪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주목받지 못한 서러움을 딛고 꽃처럼 피고 싶다는 열망을 담았다. 이것도 흑인 여성이 한복을 입은 그림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해 8시간 만에 그렸다. 그런데 전시회 측에서 인상 깊게 봐주더라. 바로 숙소 해결해주고 작업 도와 줄 테니 가장 잘 보이는 메인 스폿에서 작업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 재능 다 쏟아붓는단 각오로 '꽃이 피었습니다'를 선보인 거다. 가로 7m·세로 8m 벽에 13~14년간 쌓아올린 내 내공을 전부 발휘했다.


현지 흑인 작가들 반응은 어떻던가.


굉장히 신기해하고 특별하게 봐줬다. 그라피티라는 게 미국 본토에서 흑인들이 40년 전에 하던 '놀이'다.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가난한 흑인들이 '거리 낙서'로 시작했다. 일종의 저항문화랄까. 스프레이 하나에 맨몸으로 건물 벽부터 담벼락, 지하철 등 대중교통 시설에다 자기 '서명'을 새긴다. 그러던 것이 지구 반대편 한국으로 가 한국적 문화까지 더해졌으니 이들에겐 굉장히 남달랐던 것 같다.


이 작품을 본 흑인 여성들이 많이 울었다고.


처음엔 '오버'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근데 사실이더라. 팬들에게서 받은 인스타그램 메시지마다 '눈물이 났다' '감동했다'는 반응이 쇄도했다. 나중에 지인들과 얘기해보니, 내 그림에 '화해의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은 그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진 않다. 한인 업주가 운영하는 술집이나 식당이나 각종 가게에선 가난한 흑인들이 주로 일한다. 이들이 겪는 설움이 적지 않다. 흑인 가수 아이스 큐브(Ice Cube)가 한인 비판 내용을 담은 곡을 낸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 그런 맥락에서 흑인들이 그간에 쌓인 감정적 응어리를 풀어주는 화해의 의미로서 내 작품을 해석한 거다. 그 이후 더 책임감 갖고 작업하게 됐다.


'동서양의 미를 조화시키는 예술가'라는 평가에 동의하나.


과분한데 일단 감사하다. 그러나 나 자신을 거창하게 아티스트라고 포장하고 싶진 않다. 불편하다. 미국 가기 전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가 1년간 그라피티 작업을 했다. 거기서 친구들 소개로 현지 래퍼들을 만났다. 영어가 서툴러 이들에게 '아티스트'라고 나를 소개했는데, 다들 콧방귀 뀌더라. 건방떨지 말라는 거다. 이때부터 그냥 그라피티 작가로 소개한다. 유념할 것이, 그라피티를 포함한 힙합은 그냥 힙합이다. 랩이든 비보잉이든 그라피티든 힙합은 힙합 자체로 '멋'이 있다. 우리는 '길'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잊는 순간부터 망가진다. 거칠고 건방지지만 자신감 넘치는, 이른바 스왜그(Swag),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저항성이 우리 뿌리임을 늘 직시해야 한다.

매일경제

심찬양이 LA 거리 담벼락에 그린 `꽃이 피었습니다`(왼쪽)와 시카고에 그린 `미셸 오바마`.

유명인도 그리는 것 같더라.


미셸 오바마, 리한나, 힙합의 대부라 할 투팍과 비기, 농구선수 스티븐 커리(Stephen Curry) 등을 그렸다. 유명인에 기대고 싶지 않아 많이 작업하진 않는데, 선별 기준은 '상징성'이다. 미셸 오바마, 리한나는 흑인 여성의 상징적 존재니까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겠다 싶었다. 투팍과 비기, 스티븐 커리 등도 마찬가지고.


그라피티 문화는 어떻게 분류되나.


크게 세 가지다. 캘리그래피, 캐릭터 만화 그리고 리얼리즘. 나는 리얼리즘 쪽이다. 사진처럼 최대한 똑같이 그린다. 답이 정해져 있어서 안 똑같으면 망한다. 그라피티의 매력이라는 게 세상 곳곳에 내 존재를 '서명'하고 '새긴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흔적으로 누군가를 불시에, 예상 못 한 순간에 기습적으로 매료시킨다. 생각해보라, 골목을 걷든, 운전 중이든 갑자기 내가 그린 그림을 만나는 경우를. 그 강렬한 색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또한 그라피티는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 왕도 못 가져간다. 언젠가 세월에 바래 사라지겠지만 그전까진 공유재산으로 모두가 평등히 감상할 수 있다. 가난한 빈민촌 담벼락에서든, 화려한 도심 곳곳에서든.


작품당 작업 시간은 얼마나 되나. 스프레이 소모량은 어느 정도고.


그때그때 다르다. 흑백이면 덜 들고, 컬러는 많이 든다. 스프레이로 점점이 찍어 작업하는 데 보통 100개에서 200개까지 주문한다. '꽃이 피었습니다'는 50개 정도 썼다. 작업은 하루에 7~8시간, 밥 먹는 시간 제외하고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계속한다. 그야말로 '노동'이다. 특수 방독면 쓰고 크레인을 오르내리며 하기에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건강 관리가 그래서 중요하다. 일례로 지난 10월에 6일간 안동에서 작업을 했다. 동부초등학교 외벽에 그린 그라피티다. 가로 9m, 세로 10m에 흑인 어린이 벨라(미국계 한국인)를 그렸는데, 닷새간 하루 7시간씩 쉬지 않고 그렸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


격투기 선수를 잠시 했다. 군대 다녀온 직후 코리안탑팀이라는 MMA팀에 선수로 있었다. UFC 선수인 '코리안 좀비' (정)찬성이 형이 한때 소속됐던 곳이다. 형을 존경해 작년에 형 모습을 그라피티로 그려준 적도 있다. 요새는 틈틈이 헬스장 가서 체력을 기른다. 그리고 리버스 크루라는 비보잉팀 소속이기도 하다.


한복 입은 흑인 여성은 계속 그릴 건가.


물론이다. 근래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 나를 아끼고 참 기특해 하신다. 내 그림을 통해 우리 한복을 처음 접하는 외국인이 굉장히 많으니까. 더 책임감이 생긴다. 제대로 된 한복 그림을 선보이고 싶다. 내가 한복을 잘못 그리면, 그만큼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니까. 박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한복을 입은 모델들을 촬영해 이들 이미지를 그라피티로 작업한다.


(한국인 그라피티 작가가 그라피티만으로 먹고살 확률은 1000명 중 1명꼴. 그만큼 난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 본토 주류 작가로까지 올라섰으니, 심찬양은 이미 제 '꿈'을 이룬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번쯤 묻고 싶어졌다. 지금도 '꿈'이 있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그는 문득 아버지 얘기를 끄집어냈다. "목사이신 아버지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다. 그간 헌혈만 150번 이상, 간과 콩팥 기증까지 하셨다. 그걸 쭉 옆에서 지켜보며 컸다. 소년 시절 아프리카 오지로 가 우물을 파주고 싶다는 꿈을 키웠던 건 그런 아버지 영향일 테다. 언젠가 꼭 아프리카를 가보고 싶다. 현지 흑인들이 우리 한복을 입은 모습을 아프리카 곳곳에 그려주고 싶다. 물론 무료로.(웃음)")

He is…

1989년생. 김천예고를 나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군 전역 후 필리핀에 있는 신학대학을 다녔다. 이후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와 서울 도심 벽면 곳곳을 그라피티로 물들였다. 2016년 무일푼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전통 한복을 입은 흑인 소녀를 그린 '꽃이 피었습니다'를 선보여 일약 세계적 그라피티 작가로 부상했다. 지난해에는 청와대 대형 벽화를 그려 화제가 됐다.

김시균 기자

2019.12.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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