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라는 계절”

[여행]by 변종모

코나, 하와이 / Kona, Hawaii

“하와이라는 계절”

때로는 작은 커피잔 속에 출렁이는 부드러운 거품이 거대한 지구를 상상하게 할 때가 있다. 푸른 바다 앞에 서서 생뚱맞게 깊은 산속의 바위 하나를 떠올릴 때가 있듯이. 무시로 생각나던 곳.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던 작은 길이 파도를 따라 펼쳐지는 곳.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비난한다 해도 내게는 전부인 그대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커다란 섬의 서쪽 끝에서 아직도 열렬하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듯하다. 가능하지 않던 모든 상상이 푸른 파도처럼 넘실대던 곳. 섬이었으나 내게 가장 큰 대륙이었고, 잠시 스쳐지나 듯 며칠을 살았을 뿐인데 평생을 두고 아껴야 할 풍경이었다. 당신의 뒷모습을 잠시 봤을 뿐인데 마치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듯이. 이유 없이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쪽이다. 그럴 때 가장 먼저 고요하게 떠오를 마음속의 섬. 지금도 그 섬의 서쪽을 따라 걷는다. 아니다, 이미 도착해 있을는지 모른다.

섬의 방향

후두둑 후두둑. 창가에 계속 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 실내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예의 바르게 낮아지고, 온통 마음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실 나를 비롯해 그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빗소리를 자세히 들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창가에 반복적으로 맺혔다 흘러내리는 투명한 빗방울을 보면 소리가 느껴진다. 그만큼 비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크지만 청각적인 평온함이 크다. 고요하지 못한 그 공간에서 빗소리는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들리지도 않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그리운 곳에 닿는다. 그래서 비가 온다는 것은 마음이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비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각, 아마도 그곳에 비가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삼청동의 그 카페로 약속을 정한 것은 어느 정도 나의 얄팍한 계산 때문이었다. 집에서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코나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늦는 너를 나는 이해하기로 한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반쯤은 더 느리게 만들고 있을 시간. 그때는 섬의 방향을 몰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섬, 코나가 하와이의 어디에 있는 섬인지 알지 못했었다. 비가 오면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먼 곳으로 떠나고 있었다. 비와 커피와 혼자만의 시간을 계산하면 답은 여행인 셈이다. 그러니까 네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섬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가 본 적도 없는 섬을 상상으로 떠돌 것이다. 반쯤 남은 커피잔 속에 빗방울처럼 파문이 인다. 그것이 곧 부드러운 파도가 된다. 오래전부터 커피 향 나는 그곳에 가게 될 것만 같았다. 너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섬의 방향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알았다. 

커피 한 잔의 섬

“하와이라는 계절”
하와이 어느 섬에서나 그랬듯 실제로 빅 아일랜드의 곳곳에서도 자주 비가 내렸다. 섬의 특성이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비가 내렸고, 아무렇지 않게 해가 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가 하늘을 둥글게 잘라내고 있었다. 섬의 수분은 대부분 바다를 빨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과장을 하자면 어느 지역에서는 바다의 양보다 많은 비가 내렸다. 섬은 하늘도 바다였다. 비가 온다고 함께 우울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하고 맑은 공기 속에는 우울함이나 슬픔의 흔적들은 없었다. 


도착한 날 밤, 창 너머로 흔들리는 달빛의 바다를 보면서 한참을 서성였다. 밤은 푸른 바다를 남김없이 감추고도 여전히 신비로운 것이었다. 달빛의 크기만큼 흔들리는 바다는 검은 쟁반에 담아둔 유리구슬처럼 빛을 냈다. 섬의 동쪽에서 시작한 밤에는 섬의 서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밤.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자주 이곳을 상상했지만, 막상 도착한 섬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스스로 의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곳곳에 새겨진 푯말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잘 못 도착한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겠다.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늘이 바뀌고 하늘이 바뀔 때마다 바다도 함께 움직였다. 어느 날은 깊은 숲속을 걸었고, 어느 날은 뜨거운 용암이 끓는 화산지대를 밟기도 했다. 그때도 여전히 섬의 서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삼청동의 어느 카페에서 견뎌내던 시간에 다녀온 섬의 서쪽. 동쪽의 아름다운 마을 힐로(Hilo)를 떠나 섬의 중심부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풍경이 차창을 스쳤다. 이끼처럼 낮은 나무들이 고대의 흔적들을 덮고서 사납게 움직이는 하늘 아래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다가 기우는 태양을 봤을 때는 영화의 엔딩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코나에 닿기 전이었으므로. 

“하와이라는 계절” “하와이라는 계절”

왜? 사람들이 코나에서 사랑스러워지는지 알 것 같았다. 섬은 늘 바다에 둘러싸인 덕분에 바다가 귀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만, 바다를 똑 닮은 아담한 마을이 잔잔한 파도를 닮았다. 수더분하기도 하고 너무 예의 바른 아이 같기도 하다. 미국적인 정서가 많이 없고 그야말로 작고 흔한 섬마을이다. 어지럽고 화려한 와이키키는 어디에도 없다. 총천연색으로 염색한 슬러쉬 가게의 점원을 제외하면 코나 어디에도 화려함은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야말로 쉬러 오는 것이다. 마음을 누이기에 적당한 곳. 좋은 마음으로 잡은 손은 쉽게 놓기 싫은 법이다. 코나로 가요! 복잡한 와이키키를 떠나 코나로 가요! 라는 문구의 포스터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닿는다면 사랑을 피할 길이 없다. 하루 종일 손을 잡고 걸어도 걷지 않아도 그들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므로. 경쟁하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다. 

“하와이라는 계절”

사랑 없는 나는 홀로 바다를 걷다가 수면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거북의 등을 보거나 멀리 유람선이 구름의 그림자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리고 언제든 코나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불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바다의 수분을 머금은 커피는 부드러워질 때로 부드러워서 이 또한 미국적인 강함은 전혀 없다. 어설프게 기억하는 혀끝의 감각은 이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도취에 흥분한다. 이 안에서 사랑하고 싶다. 허영이 많은 사람이라면 손을 꼭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손바닥만 한 백사장에 앉아서 이곳처럼 살자고 커피나 한잔하면서 순하고 부드럽게 살자고 부탁하면 될 일이다.  


꼭 커피 한 잔만 한 섬마을코나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디에도 없는 계절

커피잔이 이마에 그려졌다. 아니면 금방 구운 커피콩들이 와르르 쏟아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투명한 얼음이 꽉 찬 일회용 플라스틱 잔에 커피가 찰랑거린다든지. 일종의 강박이다. 섬에서는 커피향기가 나지 않겠지만, 커피가 유명하다는 이유로 어딜 가나 코를 킁킁거리며 내 안의 어디선가 냄새를 추적하고 있었나 보다. 잔을 감싸던 물방울들을 닦아 내듯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내던 시간은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남루한 차림의 여행자가 담배를 나누어 피울 수 있겠냐고 묻던 시간은 정오를 막 넘기고 인스턴트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할 쯤 이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운 편의점 입구에서, 청년은 미안하고도 다소곳한 얼굴로 인사했다. 강아지에게 눈길이 간 것도, 자연스럽게 담뱃갑 전부를 건넨 것도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샌드위치도 좀 먹어보겠냐던 말에는 정중히 사양했다. 마음에 드는 태도다. 편의점 앞의 거대한 나무는 섬을 스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쉬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이를테면 태풍이 몰아쳐도 거뜬히 견뎌낼. 혼자 먹자니 신경이 쓰였던 것 말고는 대체로 평화로웠던 그늘의 시간. 강아지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헤어졌을 것을,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하와이라는 계절”

아무래도 현지인 같지는 않았다. 남루하거나 근사하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눈이 그랬고 낡고 홀쭉한 배낭이 그랬다. 나도 여행자였으나 내가 가지지 못한 눈빛을 그는 가졌다. 깔끔하지 않지만 맑았고, 정돈되지 않았지만 순수한 눈매가 오래도록 길에서 본 것을 담고 있었다. 그런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잭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는 섬의 동쪽에서 만난 누군가에게서 그에게 넘겨졌다. 잭은 눈 밑에 상처를 가졌지만 주인처럼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였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둘의 만남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처음 볼 때부터 자신에게 올 것을 알았다고 했다. 이 부분은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섬의 반대편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잭이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고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럴 때는 철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진심 어린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온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그 말에서 자신이 잭을 더 사랑하는 것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잭은 얼마 살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서 잭과 함께 이 섬을 계속 여행할 거야!” 함께 물놀이하고, 함께 휴식하고, 함께 잠을 자고, 잠시 함께 걷고 자주 자신의 배낭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어디가 아픈지에 대해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여행할 거냐고 묻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 말에 슬픔은 없었고 신념만 있었다. 그렇다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슬픔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는 방향만 있고 끝은 없는 것이니까. 죽음이 결코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과 개가 아니라 그냥 참 근사한 커플이었다. 순한 얼굴의 잭은 잠시 바다 냄새나는 목덜미를 내 팔에 안겨주었고, 그는 꽁초를 주머니에 넣으며 악수를 청했다. “빅 아일랜드는 항상 좋은 계절이야! 그러니까 좋은 일만 생길 거야! 고마워!” 그냥 잘 가라는 답례를 했지만 둘에게 더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다. 나는 내일 떠나는 사람이니 내 몫의 행운까지 보태져 당신들은 오래도록 이 섬에서 여행하라고, 되도록 아주 오래오래 여행자로 남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의 시간에는 상하도 없고 높낮이도 없다. 길 위에서 만난 사이라서 더욱 그럴 거라 생각했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만나면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겠다. 둘은 여전히 닮았다. 걷는 모습이 닮았고 서로를 처다보는 방향이 닮았다. 정말 좋은 계절이다. 

“하와이라는 계절”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들을 떠올려보았다. 카페에서 기다렸던 사람과 끝내 오지 않았던 사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 앞으로도 또 만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모두가 한 사람의 이름이다. 그래서 결국 홀로 섬이 된 것처럼. 하지만 이 섬의 어느 방향에서든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가 뜨고 언제 오더라도 좋은 계절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누구와 언제 오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와이라는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계절, 하와이라는 계절에 당신의 무지개를 만나보길 바란다. 그곳에서 당신의 희망도 보게 될 것을 믿는다. 

Tip : 하와이의 남쪽, 빅 아일랜드의 서쪽

빅 아일랜드는 코나의 반대편, 힐로(Hilo) 공항으로 도착하길 추천한다. 시원하게 내려오는 아카카 폭포주립공원, 마우나 케아(Mauna Kea) 국립 공원의 일몰. 아직도 움직이는 화산국립공원과 사우스 포인트 로드를 체험할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곳이 힐로 쪽이다. 물론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섬 전체를 부지런히 둘러보고 마지막을 조용히 마무리하기에 좋았던 이유다. 빅 아일랜드의 드라이브 코스는 여러 개가 있는데 어딜 선택하더라도 최상의 드라이브를 할 수 있다. 특히 섬을 가로지르는 200번 도로를 따라서 이동하는 코스는 해안선을 볼 수는 없는 섬의 또 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코나는 작은 시골 마을과도 같은 느낌이지만 없는 것이 없다. 해양 스포츠부터 커피 농장 체험 등 여행 방법을 먼저 선택하면 얼마든지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고요히 보낼 수도 있는 곳이다. 남쪽의 카일루아 지역의 코나 타운은 비교적 저렴하고 다양한 식당과 바 그리고 주말 시장과 소소한 볼거리 등 폭이 넓고 선택사항이 다양하다. 하지만 코나에서는 무엇보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 바라보며 낮잠을 자거나 가벼운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하늘과 바다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최고의 여행이 될 수도 있다.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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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도 여행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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