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영웅본색 진짜 남자의 영화

[컬처]by 맥스무비

“나 이거 4,720번 봤다.” <응답하라 1988>(tvN, 2015)의 동룡(이동휘)이 4,720번을 보고 쌍문동 5인방이 택이(박보검) 방에서 숨도 안 쉬고 본 영화. 남자들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심어놓은 영화 <영웅본색> 시리즈가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쌍문동 5인방과 동시대를 보냈던 세 남자에게 물었다. <영웅본색>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당신의 인생에 무엇을 남겼는지. 구성 이유진

1987년의 극장 풍경

응답하라 영웅본색 진짜 남자의 영화

영웅본색

이건 실화다. 1987년이니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학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마치 어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던 시기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영화를 통해 난 비로소 조금씩 어른의 문턱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해 가을 즈음이었나? 아니면 늦여름이었다. 4호선 총신대입구역 근처의 재개봉관 방배예술극장에선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영웅본색> 두 편을 동시상영 중이었다. 내가 노린 건 물론 <씨받이>였다. 나는 이런 영화들이, 그러니까 그 시절 창궐했던 ‘에로티시즘 영화’들이 날 성숙시킬 거라 믿었고 이미 숱하게 섭렵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영웅본색>이었다. 어디서 소문들은 들었는지, 100석 남짓한 극장은 꽉 찬 상태였다. 그 와중에 동네 놀이터에서 애들한테 ‘삥’ 좀 뜯을 것 같은 불량배들이 보였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씨받이>가 끝나고 막간 휴식 시간에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자 “어이, 거기 앞에 니들 춤 좀 춰 봐!”라면서 자기들끼리 킬킬대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호연지기는 거기까지였다. 주윤발이 보트를 돌릴 때부터 아마 심장은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주윤발이 죽어갈 땐 울었을지도 모른다. 적룡이 스스로 수갑을 채우고 장국영과 함께 걸어나왔을 때, “힝 힝 씨우~ 씽…” 하며 시작되는 주제가 ‘당년정’이 흘러나올 때, 오줌을 지렸다 해도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극장 안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아우라로 가득 차 있었다. 재개봉관의  평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고 극장을 빠져 나갔다. 그때 불량배 중 한 명이 앞에 나가 사과했다. “저……,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약자를 괴롭히며 살아왔던 이 불한당 같은 놈도 ‘강호의 도’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구나. <영웅본색>은 그런, 인간을 변화시키는 ‘포스’를 지닌 영화였다. 이후 나의 재개봉관 순례는 시작되었다. 길 건너 이수극장, 노량진 일미일극장, 이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재개봉관들을 찾아다니며 난 <영웅본색>을 보고 또 봤다. 영화도 영화지만, 이 영화가 끝났을 때 그 경건하기까지 했던 극장 안의 분위기를 다시 체험하고 싶었다.  난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해 가을 소풍 땐, 남대문시장에서 싸구려 코트를 사서 걸치고 아버지의 ‘라이방’ 선글라스를 몰래 훔쳐 쓴, 입에 성냥개비를 문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우리 동네 가스 배달하던 형마저 주윤발 스타일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영웅본색 2>가 개봉되었을 때 난 일요일 아침 영등포 명화극장로 달려갔다. 죽은 줄 알았던 주윤발은 쌍둥이 동생이 되어 돌아왔고, 장국영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갔으며, “모우 와 만 워, 깜 띤 띡 씨~”로 시작하던 주제가 ‘분향미래일자’ 역시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처음 그 기분은 아니었다. 아마도 재개봉관을 전전했던 그 1년 사이에,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꽤나 어른이 되어 버렸던 모양이다.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남자의 부끄러움

응답하라 영웅본색 진짜 남자의 영화

영웅본색 2

스물두 살 무렵에 <영웅본색>을 극장에서 봤던 것 같다.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벌써 27~8년 전의 일이다. 사실 그 시절 기억이 희미한 이유는 내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거리가 뜨거웠다. 1987년 6월 이후의 일이다. 내 가슴도 그 어느 때보다 타오르던 때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동네 극장을 전전하고, 나중엔 바깥으로 진출해 성남극장이나 금성극장, 혹은 금호극장으로 ‘나와바리’를 넓히기도 했지만, 이십대 초반엔 영화보다는 현실에 더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들처럼 <영웅본색>을 봤고, 오우삼이라는 감독을 기억하게 됐다. 무엇에 그리도 이끌렸던 것일까. 사실 <영웅본색>을 뛰어난 작품이라던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고백하기는 어렵다. 내가 진정으로 매료됐던 오우삼의 첫 영화는 그보다 조금 뒤에 나온 <첩혈쌍웅>(1989)이다. 과도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현란한 액션 때문이 아니라, 인물의 고독에 더 이끌렸던 것이다. 나는 집단에 속한 이들보다 홀로 움직인 고독한 인물들에 더 매료됐다. 어쩌면 남자들끼리의 우정이니 형제애니 그런 것보다 눈먼 여인과 사랑에 더 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영웅본색>이 나를 오우삼의 세계로 처음 끌고갔던 강렬한 첫 영화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내게 이 영화는 낭만적인 우정과 형제애를 지극히 과장된 남자들의 제스처로 담아낸 작품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허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자들이라면 대체로 그렇겠지만) 닮고 싶은 부분도 있었고, 어느 지점에서는 폭발하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령 이 영화의 마지막에 보트를 타고 기관총을 남발하며 주윤발이 되돌아오는 순간의, 빤한 설정이지만 그래도 지극히 감동적인 순간이 그랬다. 친구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같이 갈 수 있다는, 죽음의 순간에도 그가 달려올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능케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런 친구들이 있기도 했다. 오우삼의 영화는 친구들의 비극, 그들의 명예와 충성을 최고조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 시절에 믿을만한 가치는 그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울 수 있을까? <영웅본색>은 그 시절 (거울도 안 보던) 남자의 얼굴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 시절 그 거울엔 여전히 부끄러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그 거울에 무엇이 비칠까.

 

김성욱(영화 평론가)

그때 그 시절의 비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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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2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10대 시절을 보낸 남자 중 <영웅본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의 바바리코트에 구멍을 뚫었다가 신나게 두들겨 맞거나, 엄마의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거울 앞에서 폼을 잡거나, 하다못해 입에 성냥개비 물고 친구들에게 허세를 부리거나 했던 기억들 말이다. 직접 하지 않았어도 주변에 그런 친구 하나쯤은 반드시 있었다. 김용의 <영웅문>과 함께 <영웅본색>은 그때 남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인생의 포인트와 같았다. 우리 시대의 무협이었다는 이야기다. 모든 순간이 뜨거웠으며, 뜨겁지 않은 순간은 보다 뜨거운 순간으로 달려가는 준비 동작에 다름 아니었다. 많은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에 걸 맞는 음악을 가지는 법. <영웅본색> 또한 예외는 아니다. 차갑되 냉혈하지 않았던 주윤발, 장국영, 적룡의 마음과 애수를 그려낸 음악들이 있다. 이 영화의 음악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은 역시 ‘당년정’일 것이다. 영화가 홍콩을 넘어 한국, 대만 등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배우들은 모두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고 그중 장국영은 가수로서도 웬만한 국내 가수를 상회하는 자리에 올랐다. <스크린> <로드쇼>같은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월간 팝송> <뮤직 시티> 같은 음악잡지에서도 장국영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룰 정도였다. ‘당년정’은 2편의 주제가였던 ‘분향미래일자’와 더불어 장국영의 솔로 앨범에 실렸고 이 앨범은 당연히 국내에도 발매되어 당시 기준으로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아직까지 ‘한국인이 좋아하는 영화음악' 같은 조사에서 이 노래는 늘 순위 안에 있다. 송자호(적룡)와 자걸(주윤발) 그리고 마크(주윤발) 3인이 벌이는 마지막 검무, 아니 총무가 끝난 후 울려 퍼지는 ‘당년정’은 무릇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집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웅본색>을 동시대에 본 사람이라면 중간에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에 놀랐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송자호와 마크, 아성(이자웅)이 모여 옛날 일을 회고하는 장면에서 깔리던 곡 말이다. ‘어? ‘희나리’네?’하면서. 그렇다. 1985년 구창모 솔로 1집에 담겼던 이 노래는 그해를 대표하는 히트곡이었고 <영웅본색>을 통해 중국어 가사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기허풍우(몇 차례의 비바람)’이란 제목으로 번안된 이 곡은 원곡과 달리 심오한 내용을 담아내 현지에서도 좋은 가사의 예로 전해진다. 외국에 대한 동경과 신비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던 시절, 홍콩영화에서 들려오는 인기 가요의 멜로디는 그저 신기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강남스타일’의 빌보드 흥행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자랑스러워하던 몇 년 전의 풍경과 비슷했다고 할까. 재개봉을 앞두고 <영웅본색>을 다시 봤다. 21세기 들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80년대의 사운드였다. 영화음악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기를 누렸던 시대의 직관적 비장미가 그 안에 있었다. ‘기허풍우’가 흐를 때 더 이상 신기하진 않았지만, 신기했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김작가(대중음악 평론가)

 

위 글은 월간 「맥스무비」 2016년 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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