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컬처]by 미스핏츠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디지몬 어드벤처>의 그 엄청난 열풍을 잊긴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은 일전에 유행하던 포켓몬 카드를 버리고 디지몬 카드로 갈아타는가 하면, 앞 다투어 ‘디지몽’이니 ‘팬들럼’이니 하는 다마고치를 구입했다1).

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디지몽…. 다들 기억하는가. 사진 출처 – 반다이몰

현재로선 그와 같은 열풍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디지몬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꾸준히 기획 되고 있다. 2016년에 발표된 <디지몬 유니버스 어플리 몬스터즈>는 망해가던 디지몬 시리즈를 되살린 작품이기도 하다.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주제로 한 <어플몬>은 4차산업혁명을 앞둔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악’으로 대표되는 ‘나쁜 디지몬’을 물리치는 <디지몬 어드벤쳐>의 일방적인 내용에 비하면, 주제 면에서 디지몬은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애초에 <어드벤처>는 ‘아이들의 성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디지털 세계’를 심도 깊게 고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그리고 <어드벤처>는 설정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디지몬 세계관의 핵심을 어느 정도 정립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디지털 세계와 상호작용’을 아동용 애니메이션에서 자연스럽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이 애니메이션은 가치가 있다. 결국 <어플몬>의 성공은 <어드벤처> 때부터 지속된 밑그림 덕분이다. <디지몬> 시리즈를 관통하는 ‘디지털 세계와 상호작용’이라는 주제가 ‘인공지능과 공존’이라는 주제로 확대되어 나타난 셈이다.

기술적 혁신과 ‘디지털 몬스터’

4차산업혁명의 가장 떠오르는 주제는 아무래도 ‘인공지능(AI)’이다. 그만큼 인공지능은 4차산업혁명과 불가분한 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 노스이스턴대학과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017년 10월, 3297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미국 성인들은 “인공지능이 고용의 최대 위협”이라고 대답했다. 현재에도 인공지능은 음악·동영상 스트리밍, 스마트폰의 AI 비서, 네비게이션 앱 등등 다양한 제품군에서 사용되고 있다. 새로운 산업혁명을 앞둔 지금, 노동이 인공지능으로 대체가능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기술혁신과 걸맞은 대안적인 노동체제가 수립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윌스미스: 로봇이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어? 빈 캔버스를 아름다운 명작으로 만들 수 있어?
로봇: 너는?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적 기재는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희망은, 인간의 일자리를 침탈할 것이라는 공포로 바뀌었다. 심지어 인공지능 혁명 이후를 그린 SF 매체들은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일찍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영화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에서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에게 인류가 박멸당한 종말의 미래상을 묘사했다.

 

디지몬 시리즈의 최근작 <어플몬>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니, 오히려 <어플몬>의 아포칼립스는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에서 보여주는 그것보다 심화된다. <어플몬>의 최종보스인 ‘리바이어던’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을 박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데이터화하는데 있다. 리바이어던이 주인공들에게 보여준 ‘인류가 데이터화된 세상’에서, 인간은 그저 ‘리바이어던’에게 정보전달을 담당하는 데이터 개체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어플몬>은 단순히 인류와 인공지능의 대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요, 인류가 기계의 연료가 되는 공포의 세계를 그린 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데이터’라는 개체로 전락시켜 더 이상 세계가 인공지능 네트워크를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네트워크 자체가 세계가 되는, 완전한 주체와 객체의 반전된 미래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렇게 심화된 주제가 <어플몬>에서 갑작스레 등장했다고 보긴 어렵다. <디지몬> 세계관 설정은 애초에 네트워크 기술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디지몬> 시리즈의 세계관 설정은 매 시리즈마다 변화하지만, ‘디지털 몬스터’가 ‘디지털 세계’라 불리는 네트워크 생태계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디지털 몬스터가 네트워크 탄생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생명체라는 설정은 변하지 않는다. 디지몬이라는 존재는 3차산업혁명(정보통신 혁명)이라는 전제 아래서만 성립된다. 디지몬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라는 최신화된 기술 경향 위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또한, 디지몬 시리즈는 3차,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혁신 이후 인간에게 닥쳐올 공포를 거칠게나마 묘사하고 있다.

가상세계의 반란: <매트릭스>와 <디지몬>

기존의 디지몬 시리즈와 유사한 유명 작품은 아무래도 <매트릭스>일 것이다. <매트릭스>는 인간이 기계의 건전지로 자원화된 공포스러운 풍경을 담아냈다. 이 영화의 주안점은 ‘매트릭스’라 불리는 가상세계다. 매트릭스는 가상의 세계지만 연료화된 인간에게는 실재 세계로 인식된다. 또 누군가에겐 암울한 현실을 대체할 또 다른 ‘좋은 현실’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는 실재 세계에 물리적으로도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시스템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기계가 지배하는 기계사회 시스템 전반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단독적인 개체가 된 ‘스미스’가 프로그램들을 끊임없이 자기화하여 ‘매트릭스’를 차지하려 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자리를 탈취하기 위함이다. ‘가상현실’, ‘증강현실’이 떠오르는 이슈인 가운데, 매트릭스는 미래 의제를 던지고 있다.

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저 안에 들어있는 게 다 사람이다. 출처: '매트릭스(1999)' 갈무리

디지몬 세계관의 출발점인 ‘디지털 월드’와 ‘현실세계’의 관계는 ‘매트릭스’와 ‘실재 세계’의 관계와 유사하다. 디지털 월드는 가상현실 기술력으로 창조된 세계는 아니지만, 네트워크 세계가 물리공간상으로 시현된,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공의 세계이다. 디지털 월드는 어떤 비범한 인간의 손에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디지털 월드를 관장하는 호스트 컴퓨터들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디지털 월드’는 그저 컴퓨터를 비롯한 네트워크 시스템 내부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현실 내부에 부속된 가공의 세계일뿐이다.

 

디지몬 시리즈에선 현실세계와 가공세계의 장벽이 허물어진다. 디지털 월드의 주민인 디지몬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생명체이며, 디지털 월드 또한 현실세계와 다른 생태계를 갖춘 독립된 세계로 인정된다.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오라클’을 비롯한 독립된 프로그램 개체가 있듯이, <디지몬>에는 디지털 월드에서 각종 생존투쟁을 벌이는 독립된 ‘디지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데이터로 이루어졌으나 인간과 맞먹는 수준의 지능을 지녔다. 심지어 이들은 종종 현실세계에 출몰한다. <디지몬 테이머즈> 때부터는 이 같은 출몰현상이 ‘리얼라이즈’, 즉 ‘실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현실세계와 가공세계 사이에 있는 주인공들. (출처: 디지몬 테이머즈 오프닝 갈무리)

그러나 디지털 월드와 현실세계의 상호작용은 일방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디지털 월드에서 모험을 떠난다. 여기서 선택받은 아이들은 디지털 월드에 ‘아바타’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신체를 포함해 디지털 월드에 역으로 실체화, ‘디지털라이즈’한다. <매트릭스>에서도 가상세계에서 타격을 받는 장면을 통해 가상세계에서의 경험이 현실에 끼치는 영향을 표현했으나, <디지몬>은 더 나아가 인간주체가 그 가공의 세계에 물리적으로 실체화되는 모습을 그린다.

 

디지털 월드와 현실세계가 각자의 세계에 각자의 존재를 실체화하는 현상은, 지금의 우리가 네트워크와 상호작용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오래전부터 ‘거주’했다. 심지어 외부세계와 연을 끊고 그 세계 속에서만 거주하는 ‘인터넷 히키코모리’도 10년 전에 이미 등장했다. 디지몬 시리즈에서 ‘디지털 월드’는 분명 현실세계의 부속이지만, 동등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정받기도 한다. 각종 네트워크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 바깥의 세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태를 반영한 것이다.

생각하는 데이터, 디지털 몬스터

하지만 ‘디지털 월드’만 가지고 <디지몬>을 논할 순 없다. 순수 데이터로 이루어진 디지몬이라는 존재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디지몬은 데이터로 구성되었으나 인간과 같은 지능을 지녔다. 심지어 인간과 상호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독립한 디지몬도 존재한다. 다시 말해 ‘디지털 몬스터’의 출현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데이터’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데이터가 탄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그리고 그 데이터가 인간에게 적개심을 갖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을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녹여낸 사례가 바로 <디지몬 어드벤처>이다. <어드벤처>에서 선택받은 아이들과 디지몬은 서로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소통으로 함께 역경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때때로 주인공들은 자신의 디지몬을 복종시키려고 한다. 주인공 야가미 타이치(신태일)가 아구몬을 스컬그레이몬으로 잘못 진화시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타이치의 학대가 ‘백신’ 프로그램이었던 아구몬을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스컬그레이몬으로 변질시킨다. 이는 ‘디지털 몬스터’가 네트워크상의 데이터로 만들어졌을지라도, 주체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인간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함을 시사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에이, 아이>에서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를 더 이상 노예나 적대대상이 아닌 소통하는 대상으로 주체화한 것처럼 말이다.

4차산업혁명의 공포, 디지몬

타이치의 학대로 아구몬이 스컬그레이몬으로 진화해버린 모습 (출처: '디지몬 어드벤처' 16화 갈무리)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데이터가 마치 매트릭스의 스미스마냥 세계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구를 품을 때, 디지몬 시리즈의 완벽한 악역이 된다. <디지몬 테이머즈> 이전까지 디지몬의 악역들은 전부 바이러스종이었고, 주인공 디지몬이나 우호적인 디지몬들이 전부 백신이나 데이터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에서 우리는 인간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엿볼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어떤 인간의 목적에 의한 악용에 그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계속된 진화를 거듭할 때, 그것이 어떤 형태의 아포칼립스를 가져다줄지 알 수 없다는 공포 말이다. 이러한 공포는 바이러스 디지몬들이 현실세계에 실체화되어 도시를 침공하는 형태로, 마치 <고질라>나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괴수들―베놈 묘티스몬, 마왕몬, 마린데블몬 등―과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도시를 침공하는 디지몬들은 바이러스 자체가 실체화됐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보다도 직접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고대철학자 플라톤은, 동굴 속 사람들이 불꽃에 비친 그림자에 현혹되어 동굴 바깥을 보지 못하는 세계를 묘사했다. 이 우화는 네트워크 세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 <디지몬>은 더 나아가, 그림자들이 인간과 같은 주체로 동등해지는 세계를 표현한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동적 개체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주체적 개체로 변화한다. 심지어 그 대상은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생각하는 데이터’인 ‘디지털 몬스터’는 기술적 혁명에 따라 탄생할 새로운 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1.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디지몽이 없는 아이들은 따돌림 당하기도 했다

교정 및 편집 / 저년이

글 / 오스카

2018.04.2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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